# 92
힐통령 092화
39장. 거래(2)
강민구.
세계적인 명문대인 한국대 경영학과를 나온 뒤 미국으로 건너가 페가수스사에 입사.
이후 본인의 능력을 인정받으며 승진에 승진을 거듭.
마침내 페가수스사의 한국 지부 지사장 자리에 발령된 입지전적인 인물!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달려오던 엘리트 경주마, 강민구는 여느 때처럼 사장실 창가에서 자신의 지난 세월이 이룩한 경치를 쳐다봤다.
굽이치는 한강과 그 옆으로 빼곡히 들어선 빌딩들의 숲.
그 모든 것들을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에서는 평소와 같은 자신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후…….”
건강을 챙긴다고 한참 전에 끊었던 담배가 당긴다.
씁쓸한 입가를 달싹거리던 그는 불과 며칠 전 자신에게 떨어진 본사의 지령을 떠올렸다.
‘플레이어 카이…… 그러니까 한정우에게서 그가 버그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있는 영상을 구매하라고?’
얼토당토않은 소리!
강민구가 생각하는 한정우는 똑똑하고 조심스러운 녀석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신화 클래스의 직업을 가진 녀석이 이토록 조심스럽게 움직일 이유가 없지. 무엇이 되었든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게 분명해.’
사람은 누구나 명성을 추구한다.
특히 남들이 이루지 못한 업적을 세웠을 때, 사람의 손과 입은 근질거리는 법!
‘병장 제대를 일평생의 자랑거리로 삼는 멍청이들이 널린 세상이다. 전 세계 유일의 신화 등급 플레이어라면 오만함에 차 있어도 절대 이상하지 않지. 뭘 해도 성공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강민구의 생각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 당장 카이가 자신의 직업을 공개한다면, 온갖 방송사와 신문, 잡지에 일면으로 그의 얼굴이 내걸릴 것이다.
그만큼 미드 온라인은 현실의 깊숙한 곳까지 자연스럽게 스며든 상태였으니까.
‘널리고 널린 랭커들도 광고 찍고, 노래 부르고, 심지어 연기까지 하는 세상이다. 카이 정도의 플레이어라면 고급 CF 섭외도 줄기차게 들어오겠지.’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정체를 꼭꼭 숨김으로써 그 모든 편의를 제 발로 걷어찼다.
‘욕심이 없는 건가? 이해할 수가 없군.’
물론 그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
설마 인간 불신에 걸려 사회와 동떨어진 게임 폐인이 신화 등급 직업을 획득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니까!
‘신비주의 콘셉트도 똑똑한 한 수였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마케팅해야 하는지 아는 녀석이다. 현재 그가 연기하는 언노운은 클래스부터 직업, 레벨까지 모든 게 비밀. 만약 그것들이 훗날 하나씩 공개되기 시작하면…….’
그리고 마침내 직업이 공개되는 순간, 그의 명성은 세계를 아우르게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강민구는 결국 참지 못하고 금연 껌을 하나 꺼내 질겅질겅 씹었다.
‘후…… 그런 놈이 대체 뭐가 아쉽다고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냐 이거지.’
거래란 서로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야 이루어지는 법!
한쪽이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원할 때는 절대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본사에서는 돈으로 영상을 살 수 있게끔 만들라고 명령했다.
물론 강민구가 생각해도 페가수스 입장에서는 그것이 최상의 거래 시나리오다.
‘하지만 이쪽에 최고의 시나리오라는 건 한정우 쪽에서 손해를 보게 된다는 걸 의미하지.’
왜냐하면 거래란 보통 한쪽이 약간의 손해를 감수해야 이루어지니까.
더군다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한정우는 철저한 갑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거래를 성사시켜야 하는 강민구는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선 전제부터 뜯어고쳐야겠군.”
기울어진 저울추를 맞추는 것.
그것이 가장 먼저 선결되어야 할 일이다.
금연 껌을 씹으며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서로가 만족스럽게 거래를 하는 방법은,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다.’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고, 상대방이 원할 때.
마찬가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방이 가지고 있고, 자신이 원할 때.
서로가 윈윈하는 거래는 그런 상황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그가 원하는 건 뭘까.’
그가 원하면서 자신이 지불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동시에 페가수스사가 아니라면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하기도 하고.
잠시 머리를 굴리던 강민구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정보밖에 없나.’
미드 온라인의 정보는 일종의 화폐나 다름없다.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돈은 물론이고, 명성과 레벨까지 올릴 수 있는 만능의 화폐.
그 때문에 페가수스사는 남들 다 하는 기초 공략조차 홈페이지에 게재하지 않았다.
‘정보의 중요성과 가치를 일찌감치 알아챘으니까. 아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의도했으니까.’
강민구는 한정우가 랭커들을 따라잡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지난번에 세계 10대 길드를 상대로 깽판을 제대로 쳐놓은 거로 봐선…… 적당히 어디 한 곳에 머리 숙이고 들어가서 얼굴마담이나 할 녀석은 아니야.’
만약 한정우가 정말 그들을 따라잡기를 원한다면, 그에겐 필요할 수밖에 없다.
남들보다 빠르게 성장을 하고, 선두주자와의 격차를 줄일 수 있는 정보가.
“후우…… 이거 또 한 소리 듣겠군.”
똥 씹은 표정을 지은 강민구는 자신의 핫라인을 통해 누군가에게 통화를 걸었다.
액정에 떠오른 이름은 누구나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야 전화 통화의 대상은 바로 페가수스사의 주인, 마르코 프레드릭이었으니까.
***
“흠.”
카이의 눈이 메시지 로그를 훑었다.
‘내가 몬스터를 잡았을 때의 경험치 분배 비율은 9 대 1 비율.’
한마디로 블리자드 녀석이 놀고먹는 게 아닌 이상 함께 사냥하면 성장이 더 빨라진다는 소리!
게다가 블리자드를 역소환하면 경험치 비율을 원래대로 복구할 수도 있었다.
“괜찮네. 나쁘지 않아. 그럼 알아볼 건 대충 다 알아봤으니 사냥이나…… 음?”
카이는 인터페이스창 하단에 반짝거리는 알림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지금 바깥은 이른 아침. 그런데 이 시간에 메일이라…… 경매장에 등록한 물건이 벌써 팔렸나?’
곧장 메일함을 연 카이의 얼굴이 길가에 굴러다니는 페트병처럼 구겨졌다.
“뭐야, 이게?”
[안녕하세요. 운영자입니다. 카이 님에게 긴히 전해드릴 말씀이…….]
“……스팸 메일이잖아?”
예전에 PC게임을 할 때도 이런 녀석들이 있었다.
운영자를 사칭하며 유저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요구하는, 초등학생 같은 사기 수법!
‘웃기지도 않지만, 여기에 걸려드는 멍청이들도 있었지.’
수요가 없으면 공급도 없는 법.
당하는 녀석이 있었으니 저런 종류의 사기가 성행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곧장 메일을 삭제하려던 카이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잠깐만, 지금 보니 이건 내 개인 이메일인데?”
그렇다.
현재 메일이 온 것은 게임에 가입하기 위해 이메일 인증을 마친 개인 이메일이었다.
‘게임 내 우편함에야 골드 대출해 준다는 스팸 편지가 넘쳐 흐른다지만…… 그 녀석들이 내 개인 이메일까지는 알 수 없을 텐데?’
혹시 일전에 영상 제작을 맡긴 마이클을 통해서 정보가 유출된 걸까?
미간을 찌푸린 카이는 메일의 내용을 다시 한번 정독했다.
“으음…….”
미묘한 신음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거 아무래도 진짜 운영자 맞는 것 같은데.’
신화 등급 클래스의 획득을 뒤늦게나마 축하하는 것은 물론이고, 언노운의 영상을 항상 잘 보고 있으며 자기가 팬이니 언젠가 사인 한 장 해달라는 사심 듬뿍 담긴 문장까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내용은 정작 따로 있었다.
‘역시 인던 쪽 랭킹을 싹 다 털어버린 게 문제가 됐나?’
인던 솔로 랭킹 1위.
그것도 영원히 깨지지 않을 전무후무의 기록!
당연한 말이지만 카이도 커뮤니티를 둘러보면서 자신이 구설수에 올랐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언제나처럼 사그라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자신의 안티 팬이 많았던 모양.
언노운이 버그 플레이어라는 장작은 시간이 갈수록 활활 타올랐다.
‘검은 벌 녀석들이 댓글 알바를 푼 건 아닌지 의심이 갈 지경이었지.’
하지만 카이에게도 그 정도를 분간할 눈은 있었다.
자신에 대해 떠드는 이들은 평범한 플레이어들.
그렇기 때문에 카이의 기록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의구심을 품은 것이었다.
이전까지의 그 어떤 랭커도 내지 못했던 성적을 갑자기 튀어나온 존재가 내버렸으니까.
‘그것도 고작 사흘 만에 말이지.’
쩝…….
씁쓸한 기분에 입맛만 다시던 카이는 다시 한번 메일을 쳐다봤다.
‘이 시점에서 제안이라…… 확실히 페가수스 쪽도 타격이 없지는 않나 본데?’
실제로 페가수스의 주가는 그 루머가 퍼지던 날 약간이지만 떨어지기까지 했다.
미드 온라인의 오픈 이래 끝없이 오르기만 하던 그래프가 처음으로 아래로 떨어진 것!
그것이 그들의 무거운 엉덩이를 들게 만든 원인일 것이다.
‘내가 페가수스사 입장이라면 나 같은 꽃미남 플레이어에게 뭘 요구할까?’
버그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달라고 할 것이다.
쉽게 풀이하자면 결국 플레이 영상을 넘겨달라는 것일 터.
카이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불사의 의지는 끝까지 숨겨야 하는 스킬이야. 하지만…….’
이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불사의 의지 스킬은 죽음에 달하는 피해를 입었을 때 부활하는 스킬.
하지만 카이가 인던을 돌 때의 영상에는 그런 사실이 나와 있지 않았다.
‘죽었던 건 이미 심해에서 나가들이랑 싸울 때였으니까. 이 영상만 보고 내가 무적 상태라는 걸 눈치채는 녀석은 없겠지.’
던전 네 개를 도는 동안 지속되는 무적 스킬이 있다고 생각하는 미친놈은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영상으로만 봤을 때의 카이는 단순히 맷집이 무지막지하게 단단한 플레이어다.
‘불사의 의지 스킬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지 말라고 못을 박으면 못 넘겨줄 정도의 영상은 아니야.’
중요한 건 영상을 넘겨주는 대가로 무엇을 뜯어낼 수 있는가다.
카이는 초거대 공룡 기업인 페가수스 사를 상대로 거래를 하면서도 주눅 들지 않았다.
‘거, 목마른 놈이 우물 파는 거 아니었나?’
이번 거래가 불발되어봤자, 자신은 인터넷상에서 욕을 먹고 만다.
그것도 본명이 거론되는 것도 아니고, 정확한 플레이어 닉네임이 거론되는 것도 아니다.
언노운이라는 가면만 실컷 욕을 처먹는 것!
카이 입장에서는 귀를 후비고 배를 긁으면서 구경할 수도 있는 가벼운 일이었다.
반면에 페가수스사의 입장에서는?
‘똥줄 타겠지.’
이번 루머를 깔끔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플레이어는 물론 페가수스사의 주주들도 불안에 빠지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투자한 아이템과 회사 주식이 각각 데이터와 종이 쪼가리로 변하는 걸 원치 않으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있지.’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카이는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었다.
“지난번에 한 번 해보니까, 그게 또 경험이 됐나 보네.”
세계 10대 길드를 상대로 했던 즉석 경매!
카이는 그곳에서 갑질이란 갑질은 다 해봤다.
그날 카이에게 강퇴까지 당한 타이탄 길드의 마스터 골리앗은 지금도 잘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목덜미를 잡을지도 모른다.
“이번 기회 아니면 내가 언제 또 페가수스사에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해보겠어.”
포식자의 눈빛을 드러낸 카이는 곧장 운영자의 이메일에 답장을 보냈다.
그것도 순한 양의 탈을 쓴 가식적인 말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