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힐통령 093화
39장. 거래(3)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메일로 보내자, 약속은 즉시 잡혔다.
페가수스 쪽에서는 가능하면 빨리 만나고 싶어 했고, 카이도 미룰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접선 장소가 진짜 여기라고?’
카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메일의 내용을 확인했다.
페가수스사에서 요청한 접선 장소는 다름 아닌 아쿠에리아의 광장.
‘물론 도시의 광장들이 약속 장소로 제격이라고는 하지만…….’
뭔가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 카이가 광장에 도착하자, 한 남자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오늘 안내역을 맡은 김준표 대리입니다. 하하, 게임 안이라서 명함을 못 드리는 게 아쉽네요.”
“아, 예…….”
수다쟁이 남자는 앞장서서 카이를 안내하며 이런저런 잡담을 건넸다.
“영상 매우 잘 보고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 다음 영상은 언제쯤 업로드되나요?”
“글쎄요. 아직 예정은 없습니다만.”
“아쉽네요. 메일에도 써놨지만 제가 워낙 팬이거든요.”
‘메일 보낸 거 너였냐.’
적당히 그의 수다에 맞장구를 쳐주며 카이가 도착한 곳은 도시 변두리의 조그마한 2층 주택.
“자, 들어오시죠.”
“예. 그럼 잠시 실례를……!?”
예전 크라포드 집처럼 낡고 좁은 내부를 기대하며 문지방을 건넌 카이는 눈앞의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
띠리리리리!
“박 대리! 전화 받아!”
“서류 다시 써 오세요. 이걸로 위에서 승인이 나겠습니까?”
“버그 리포트 처리 멀었어?!”
“80% 완료했습니다!”
“크험. 박 과장, 점심시간에 같이 요 앞 사냥터 한 바퀴 돌고 올까? 딱히 버스 태워달라는 건 아니니 싫으면 말하게.”
“어유, 싫을 리가요? 부장님은 당연히 제가 모셔야죠.”
“…….”
바깥에서 봤던 주택의 내부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드넓은 공간.
파티션으로 나누어진 공간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정장 차림의 사람들.
그건 누가 어떻게 봐도 회사의 풍경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카이 님?”
벙찐 카이의 표정을 쳐다보던 김 대리가 돌연 손뼉을 치더니 배시시 웃었다.
“아차. 오면서 설명해 드려야 했는데 깜빡했네요.”
“그게 무슨……!”
오면서 말을 그렇게 많이 해놓고, 정작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안 했다고?
카이가 울컥한 표정으로 노려보자, 김 대리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숙였다.
“정말 죄송해요. 진짜 죄송합니다. 가면서 설명해 드릴게요. 우선 이쪽으로.”
왼쪽으로 향하는 복도를 걸어가던 김 대리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은 저희 사원들이 우스갯소리로 정신과 시간의 방이라고 말하는 장소예요.”
“설마 이곳에서의 일 년이……?”
“에이, 너무 멀리 가셨다, 그건.”
김 대리는 질색한 표정으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시간 자체는 다른 유저들과 같아요. 현실보다 세 배 빠르게 흐르니까요.”
“그럼 설마 효율 때문에 이곳에서 일을 시키는 겁니까?”
이번에는 카이가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대한 문제는 안 그래도 요즘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같은 월급으로 일을 세 배나 더 시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건 진짜 쓰레기 같은 중소기업에서나 시키는 거라고 들었는데?’
설마 페가수스사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이야.
카이의 불편한 표정을 읽은 김 대리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어라? 잠깐만요, 스탑! 지금 무슨 생각 하시는지는 알겠는데, 진짜 아닙니다? 저희 이래 봬도 대기업이라고요. 그것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포브스지에서 공표한 랭킹에 의하면, 페가수스사는 숱한 기업과 은행들을 제치고 세계 기업 순위 4위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았으니까.
“아시다시피 강압적으로 시키면 불법이지만, 자발적으로 하면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입사 때 계약서를 쓰기도 하고, 월급도 제대로 세 배를 지불하고 있고요. 물론 본인이 원하면 언제든지 여기가 아닌 회사로 출근할 수 있지만…….”
김 대리가 싱긋 웃었다.
“아무래도 자택 근무라는 장점이 있고, 돈도 세 배로 잘 버니까 여기서 업무 보는 직원들도 생각보다 많더라구요. 당장 저부터도 그렇잖아요? 아, 물론 그 수가 많지는 않아요. 겨우 천 명 정도 될까 말까니까.”
“천 명이라고요? 여기가 제법 넓긴 하지만…… 천 명이나 일할 수 있는 공간입니까?”
“에이, 저희는 지금 1층이구요. 여기에 구현시켜놓은 건 무려 20층짜리 건물이에요. 삼 천명도 들어갈걸요?”
“…….”
카이는 게임 내부에 빌딩을 세워놓은 페가수스사의 만행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긴, 개발사니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거겠지.’
게임에 지부를 차린 기업들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들에게는 2층짜리 단독 주택을 20층으로 만들 만한 기술력이 없었다.
당연히 천문학적인 거금을 지불하고 게임 내의 건물을 사야 한다.
‘페가수스사는 이런 식으로도 돈을 버는구나. 하나 배워가네.’
이렇게 쌓인 돈은 유저들이 골드를 현금으로 바꿀 때 일어나는 손실을 메꿔줄 것이다.
“그리고 천 명이면 페가수스사 지부치고는 굉장히 적은 거예요. 하루에 미드 온라인에서 발생하는 사건 사고가 얼마나 많은지 아시면 깜짝 놀랄걸요? 수십만 단위로 벌어지거든요. 작게는 사기 사건, 절도 사건부터 약간 크게는 PK 사건도 있고 심지어는 아직 만들어놓지도 않은 길드전을 지들 멋대로 치른다니까요? 여기서 근무하는 사람들 없었으면 미드 온라인은 진작에 망했을 겁니다. 내기해도 좋아요.”
“뭐, 그건 그렇다 쳐도…… 지나가던 유저나 NPC가 저택 문이라도 열면 어떻게 되나요?”
“제가 들고 있는 이 사원증이 없으면 어차피 문 열어봐야 평범한 주택이라서 괜찮습니다.”
유쾌하게 웃은 김 대리는 텔레포트 마법진 위로 올라가더니 목에 걸고 있던 사원증을 톡톡 두드렸다.
“20층.”
순식간에 뒤바뀌는 시야.
카이가 탐나는 눈빛으로 사원증을 쳐다보자, 김 대리가 이를 슬며시 감췄다.
“이 건물 안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에요. 다른 곳에서는 사용 불가니까 그 두려운 시선을 거두어주세요.”
“아쉽네요.”
20층의 복도 끝까지 카이를 안내한 김 대리는 새하얀 재질로 만들어진 문을 두드렸다.
“아, 이거 문 때깔 끝내주죠? 통짜 미스릴로 만든 거예요. 나중에 퇴사할 때 손잡이만 떼어주면 퇴직금 안 받아도 될 텐데…….”
“…….”
마지막까지 이어지던 수다는 안쪽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끝을 맺었다.
“아, 부르시네요. 그럼 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눈을 찡긋 깜빡이는 김 대리에게서 도망친 카이는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는 순간, 카이의 눈이 반짝였다.
‘……강민구 페가수스 한국 지부 지사장. 신문에서 본 적 있어.’
설마 뉴스, 신문에서나 나오던 인물과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며 거래를 하는 날이 올 줄이야!
새삼스럽게 지난날을 회상하는 카이에게, 강민구 지사장이 다가와 오른손을 건넸다.
“반갑습니다. 페가수스사의 한국 지부 지사장을 맡고 있는 강민구라고 합니다.”
“카이, 아니, 한정우입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니 편하신 대로 해주시길.”
“그럼 언노운으로 할게요.”
“…….”
강민구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굳이 스스로를 언노운이라 칭한 건, 이 거래의 갑이 누구인지 잊지 말라는 경고일 테니까.
‘이것 봐라?’
강민구는 이 거래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한층 공손해진 그의 목소리에 이끌린 카이는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괜찮으시다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실까요?”
“……그럽시다.”
표정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강민구의 눈매가 살짝 떨렸다.
한국 지사장 자리에 오른 후, 그는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본 적이 없다.
당연히 잠시의 여유도 주지 않고 자신을 몰아세우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에 상대하는 것이었다.
“아시다시피 카이…… 아니, 언노운 님이 세우신 인던 랭킹. 그것이 문제입니다.”
“혹시 페가수스사에서도 버그를 의심하는 거라면…….”
“아뇨. 그건 아닙니다. 저희는 개발사이니까 그 정도 정보는 파악할 수 있습니다. 불사의 의지와 마법의 소라고둥, 그 두 가지 효과를 섞으신 것 맞지요?”
“맞습니다.”
카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많은 유저분이 이게 버그가 아니냐고 문의를 보내는 상태입니다. 저희는 이에 대해 신속히 답변을 해야 할 의무감을 느끼는 중이고요.”
‘의무감은 개뿔. 주주들 때문이겠지.’
하지만 카이는 그 뻔한 연기에 속아주었다.
“그렇군요. 그럼 역시 저의 개인플레이 영상을 원하시는 겁니까?”
“예. 물론 이 과정에서 카이 님이 원하시는 요구 사항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반영될 겁니다.”
“흠…….”
잠시 고민을 하던 카이는 일어날 채비를 했다.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귀사와의 거래는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예? 아니 그게 무슨……?”
카이를 따라 서둘러 일어난 강민구 사장의 가면이 깨지고, 당황한 표정이 드러났다.
아직 거래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거래를 엎어버리다니?
이에 옅은 한숨을 내쉰 카이가 입을 열었다.
“제 요구 사항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반영하시는 게 아니라, 절대적으로 반영해 주셔야 합니다. 불사의 의지와 같은 스킬 효과가 저희 유저에게 어떤 존재인지 아시잖아요? 이건 저의 욕심이 아니라 당연한 요구입니다.”
“하지만 저희의 입장도…….”
“강민구 사장님이 페가수스사의 입장을 생각하시는 것처럼, 전 제 입장을 생각하는 겁니다. 서로의 이해가 일치하지 않으면 거래는 없는 일이 될 수밖에 없구요.”
“으음…….”
강민구의 얼굴 위로 낭패감이 떠올랐다.
한정우가 나이에 비해 뛰어나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래 봤자 22살이라고 무시한 감도 없잖아 있었다.
‘잘 구슬리면 고개만 끄덕이다가 돌아갈 줄 알았는데…….’
직접 보니 절대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이 평범한 꼬맹이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 강민구는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저희의 사전 준비가 철저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카이 님의 타당한 요구는 절대적으로 반영될 것을 제 이름으로 약속드리겠습니다. 거래를 계속해주시겠습니까?”
‘타당한 인가.’
100% 자신이 원하던 결과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거래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자신은 물론, 상대에게도 재확인시켜주었다.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카이는 자리에 앉았다.
“사장님께서 그렇게 고개를 숙이니 당황스럽네요. 우선 자리에 앉으세요.”
방의 주인인 강민구를 마치 손님인 듯 대하는 모양새!
강민구는 헛웃음을 삼키며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우선 페가수스사에서 제 영상을 받는 대가로 무엇을 준비했는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예. 우선 금전적인 보상을 준비하는 방안을…….”
카이의 눈동자에서 관심 없음이라는 대답을 읽어낸 강민구 사장이 빠르게 핸들을 돌렸다.
“……준비했었지만, 아무래도 개발사인 저희만이 알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드리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거 좋네요.”
카이는 진한 미소를 드러내며 몸을 앞으로 살짝 숙였다.
“그렇다면 그 정보의 가치에 따라 저희 거래가 성사되느냐, 마느냐가 결정되겠네요.”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배가 터지기 전까지 먹어치우겠다!
그런 눈빛을 가감 없이 드러낸 카이를 마주한 강민구 사장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벤트를 하나 기획하고 있습니다.”
“이벤트라 하시면?”
“조만간 저희 미드 온라인의 누적 가입자 수는 7억 명을 넘어갑니다. 동시 접속자 수는 7천만을 유지하고 있는데, 7천 7백 7십 7만 동시 접속자를 기념하여 이벤트를 하나 개최하려고 합니다.”
“……그 정보를 저에게 알려주시겠다는 겁니까?”
“예. 이 정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아이템과 레벨, 명성 등 원하시는 것들을 만족스럽게 챙기실 수 있으실 겁니다.”
“흠.”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7억 명이 모르는 정보를 자신 혼자서 독차지하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추가적인 이득을 이끌어내는 건 누워서 헤엄치기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부족해. 고작 이거 하나로 끝내기엔 아쉽기도 하고.’
자신이 언제 이런 자리에 앉아보겠는가.
그것도 페가수스사를 상대로 이렇게 유리한 입장에서 말이다.
아마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후우…… 이거 사람 미치게 만드네. 괜히 튕기면 오히려 페가수스사에게 밉보일 것 같고, 그냥 거래 끝내기엔 너무 아쉬운데…… 콱 한 번 밀어? 아니면 그냥 당겨?’
카이가 일생일대의 고민에 빠지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그도, 강민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협상 스킬이 발동합니다. 상대방의 기분을 약간이나마 파악합니다.]
[강민구 : 초조, 불안. ???, ???.]
“……어엉?”
강민구의 방에 들어온 이후, 카이가 가장 멍청한 표정을 짓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