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힐통령 098화
41장. 라이넬의 던전(1)
“으흐흥.”
탁, 탁!
자신의 사진을 무단으로 게재한 이들에게 만족스러운 정신적 피해보상을 뜯어낸 한정우는 샤워를 마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96레벨.
여덟 명의 타이탄 길드원을 처치한 한정우가 최종적으로 찍은 레벨이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단 말이지.’
100레벨을 찍는 것이 목표였던 그는 추가적으로 네 개의 레벨을 올릴 장소를 찾고 있었다.
‘이제 멜버른의 공동묘지 쪽은 가기가 좀 그래.’
그 주변에서 타이탄과 그 사달이 났다.
타이탄과의 싸움은 무섭지 않지만, 한정우는 그들에게 발목이 묶이는 시간보다 조용히 사냥을 하는 것이 백 번은 더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검은 벌 때처럼 판돈이 크게 달린 경우라면 모를까…… 아니라면 나만 손해지.’
어차피 타이탄 길드원들 몇 명 죽여봤자, 티도 안 난다.
아예 간부급 유저를 죽이거나 골리앗 본인을 죽이지 않는 이상은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후우, 이럴 때 누가 버스라도 태워주면 얼마나 좋아.’
그때였다.
기적처럼 핸드폰의 진동이 울린 것은.
[발신자 : 민수]
‘민수? 이 녀석이 갑자기 왜?’
자신의 생일과 동창회.
일 년에 딱 두 번만 연락을 하던 녀석이 이렇게 늦은 밤에 전화라니?
고개를 갸웃거린 한정우는 전화기를 귓가에 가져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야야, 정우야, 날 형님이라 불러라.
“……이거 꿈 아니고 현실이다. 헛소리할 거면 다시 자라.”
-후후, 하지만 내 얘기를 들어보면 형님이라는 말 밖에 안 나올걸? 일단 확인 좀 하자. 너 지난번에 사제라고 했지?
“어. 태양교 사제.”
-굳. 레벨은 88이라고 했지?
“으응……? 내, 내가 그랬나? 96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뭐? 96이라고? 지난번엔 88이라며?
“아, 그때 술을 많이 먹어서 헷갈렸나? 나 96인데.”
-우리 술 먹기 전에 대화했던 것 같은데…….
“뭐, 그럼 내가 헷갈렸나 보지. 아무튼 그건 왜 물어보는데.”
-아, 내가 이번에 신입 길드원들 버스 한 바퀴 돌아주다가 던전을 발견했거든? 근데 이게 제법 넓어. 플로어 형식이거든.
“플로어 형식?”
1층, 2층, 3층.
이런 식으로 몇몇 층으로 나뉘어 있는 던전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층의 개수에 따라 던전의 난이도가 천차만별이었고,
플로어 형식의 던전은 대부분 크기가 넓었기에 몬스터들도 제법 많았다.
“……지금 그거 자랑하려고 전화한 건 아니겠지?”
-나 같은 참인성이 설마. 길드 차원에서 공략하러 갈 거 같은데 최초 발견자가 나잖냐. 내가 친구 하나 데려가도 되냐고 물으니까 길마 형이 당연히 괜찮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나 버스 태워준다고?”
-응. 싫으냐?
“그럴 리가.”
세간의 눈을 피해 적당히 레벨 업을 할 수 있는 장소.
그것도 오랜만에 친구 덕을 톡톡히 보며 버스를 탈 수 있는 장소!
겨우 5분 만에 고민을 해결한 한정우는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맙다. 형아.”
-어우씨, 징그러우니까 하지 마! 아무튼 내일 스케줄 없지? 아, 하긴 일 없겠네. 너 백수잖아.
“…….”
스케줄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서러울 줄이야!
“……잠깐만. 피차 마찬가지 사정 아닌가? 너도 학교 안 다닌다며.”
-나는 휘몰이 길드원이거든? 고정 월급 200에 실적치에 따른 추가금도 나와. 이번엔 던전까지 발견했으니 이번 달 월급은 제법 짭짤할 거다. 흐흐.
“……내가 따로 준비할 건 없고?”
-몸만 와, 몸만. 나머진 형이 알아서 다 해준다.
“알았다. 그럼 내일 보자.”
-오냐.
***
아르한의 폐허.
민수가 새로운 던전을 발견한 장소였다.
설정상 고대의 시대에 신전이 세워져 있던 곳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폐허가 되어버린 장소.
그 때문인지 아르한의 폐허는 이끼가 껴있는 돌담이라든지, 한때는 찬란했을 신전의 기둥이나 조각상 파편 따위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온다!”
“이번에는 네 마리예요! 정신 바짝 차리세요!”
“헤이스트! 블레스! 홀리 인챈트!”
카이는 슬쩍 고개를 돌려 정신없이 사냥하는 유저들을 쳐다봤다.
‘90레벨 정도의 유저들이 사냥하는 곳이라더니, 인기 좋네.’
기본적으로 몰이 사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몬스터가 많기에 유저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물론 몬스터의 레벨이 95 정도라고 플레이어들이 그 레벨에 맞춰선 안 되었다.
이곳에서 몰이 사냥을 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 레벨은 105.
다른 유저들 입장에서는 이곳에서 몰이 사냥을 하는 것이 그나마 경험치가 잘 오르는 것이었지만, 솔플 유저인 카이의 기준에서는 그저 그런 장소였다.
‘어디로 오라고 했더라.’
미니맵을 확인하고 민수가 찍어준 좌표로 이동하자, 돌담에 앉아 있던 남자가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했다.
“왔냐. 조금 빨리 왔네.”
“민수?”
“어. 게임에선 발터라고 부르면 된다.”
발터는 카이를 쳐다보며 실실 웃었다.
“이야, 확실히 사제복이 잘 어울리네. 너 닉네임 뭐냐?”
“카이.”
악수를 나누며 카이를 친구 창에 등록한 발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너는 왜 레벨이며 클래스며 죄다 비공개로 해놨어?”
“왜? 혹시 버스 타는 데 문제가 되나?”
“아니, 딱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뭐, 상관없나. 일단 이동부터 하자.”
앞장서는 발터의 장비를 흘깃 쳐다본 카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에서 버스를 태워주네 마네 말이 많아서 얼마나 대단한가 했더니…….’
확실히 어디 가서 큰소리를 칠 정도는 되어 보였다.
‘레벨은 135 정도인가. 직업은…….’
친구 창에 떠 있는 발터의 클래스는 방패 전사.
파티에서 주로 탱커 포지션을 맡는 유저들이 선호하는 클래스였다.
“자, 이쪽으로.”
폐허의 외곽 지역에 도착한 발터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목격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더니, 바닥을 만지작거렸다.
드르르륵.
그러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옆으로 밀려나는 돌바닥.
그 밑으로는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이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아무리 봐도 다른 바닥들이랑 똑같잖아? 어떻게 이런 곳에서 던전을 찾은 거야.”
“운이 좋았지. 휴식 좀 하겠다고 여기 앉았다가 발견했거든. 일단 남들 보기 전에 들어가자.”
드르르륵.
안쪽으로 들어오자 다시 입구를 닫는 발터.
벽에는 횃불이 달려 있었기에 어둡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던 카이가 질문을 던졌다.
“여긴 무슨 몬스터 나와?”
“밖이랑 똑같지 뭐. 리빙 아머들 돌아다니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듀라한도 있더라.”
리빙 아머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방어구였다.
억울하게 죽은 병사들의 혼이 방어구에 깃들어 영원히 돌아다닌다는 것이 게임의 설정.
듀라한도 마찬가지였지만, 듀라한은 언데드 몬스터로 취급되었다.
“던전 퀄리티는 괜찮은 것 같은데. 레벨은 좀 높겠지?”
“뭐, 필드보다 조금 높은 정도지. 1층에 나오는 리빙 아머들이 보통 97에서 100 사이. 듀라한은 125더라. 아, 저기 모여 있으시네.”
활짝 웃어 보인 발터는 앞으로 나가더니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한 무리의 일행에게 인사했다.
“저희가 좀 늦었나요? 죄송해요.”
“아니. 10분까지 오기로 했으니 조금 빨리 도착한 편이지. 이쪽이 말했던 친구?”
“넵. 야, 인사드려. 우리 길드 부 마스터인 흑곰 형님이셔.”
살짝 상체를 숙인 발터가 카이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놀랍겠지만 무려 랭커야. 7,825위시거든. 존경스럽지?”
“…….”
보통 10,000위까지를 랭커로 취급하니 발터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물론 그 사실이 놀랍지도 않고, 딱히 존경심도 들지 않는다는 건 별개였지만.
‘그래도 민수 입장을 생각해 줘야겠지.’
오늘 하루 신세를 지는 입장이기도 하고, 흑곰은 발터의 상관이기도 하다.
그 사실이 카이의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오늘 함께 사냥하는 걸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직업은 사제, 카이라고 합니다.”
“허락은요. 다 같이 즐기려고 하는 게임인데요, 뭘. 그런데 발터에게 듣기로는 아직까지 길드가 없으시다고…….”
흑곰의 눈빛에 살짝 기대감이 어렸다.
혹시 말이 잘 통하면 사제라는 고급 인력을 길드에 끌어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카이는 가볍게 철벽 스킬을 시전했다.
“네, 아직까지는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서요. 워낙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터라…….”
발터가 카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크게 웃었다.
“하하. 이 녀석이 이래요. 얘 오픈 베타부터 게임했다는데 레벨이 아직도 96이라니까요? 심각하죠?”
“……오픈 베타 때부터 하셨다고?”
흑곰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오픈 베타 때부터 게임을 한 이들 중 재능 좀 있다는 사람들은 모두 레벨이 170은 넘겼으니까.
‘안타깝게도 게임에 썩 재능이 있는 친구는 아닌가 보군.’
아쉽다는 표정을 지은 흑곰은 카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렇군요. 하지만 이 게임은 레벨이 다가 아니니까 너무 실망하지 말아요. 자유롭게 여기저기 여행다니는 거, 개인적으로 저도 언젠가 꼭 해보고 싶은 게임 스타일이니까. 아! 그리고 혹시라도 길드에 들고 싶은 마음이 들면 언제라도 발터 녀석을 통해서 말해주세요. 사제 클래스 유저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가 길드에 소속될 마음이 들면 이 녀석에게 꼭 말할게요.”
인사를 마친 흑곰은 마지막으로 사냥을 준비하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돌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이는 자리에 위치한 휘몰이 길드원들을 스윽 훑어봤다.
‘인원은 30명 정도? 길드 단위로 공략하는 것 치고는 인원이 많지 않네. 아니, 오히려 적어.’
카이의 눈빛에 떠오른 의문을 읽었는지, 그의 어깨에 팔을 척 올린 발터가 말했다.
“길드의 레벨 높으신 분들은 사냥이랑 메인 퀘스트 진행한다고 바빠서 신입들 버스 태워줄 시간 따위는 없으시다. 사실 흑곰 형님도 바쁜 시간 쪼개서 겨우 와주셨어. 사람 좋지?”
“어. 배려심 깊어 보이시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형님이라니까. 아, 그리고 사냥 시작하면 넌 뒤쪽에 있어야 된다?”
엄지를 목에 그은 발터가 죽는 시늉을 했다.
“너 사제니까 어그로라도 끌리면 몇 대 맞고 바로 죽을걸? 사제 몇 명 더 있으니 리저렉션으로 살리면 되긴 하지만 경험치는 엄청 떨어지잖아. 넌 저기 뒤에 있는 애들이랑 같이 이동하면 돼. 우리 길드 신입들.”
“신경 써줘서 고맙다.”
“우리 사이에 뭘, 아직 던전 발견 버프 게임 시간으로 7일 정도 남았거든? 파티하면 너도 적용될 거야. 100레벨 찍을 때까지 죽지 말라고.”
싱긋 웃은 발터는 카이를 제 길드의 신입들에게 끌고 갔다.
“이쪽은 오늘같이 사냥할 내 친구. 사제니까 아프면 호 해달라고 해.”
“처음 뵙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려요!”
마치 군대처럼 기합이 바짝 들어있는 신입들!
카이가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발터가 작게 속삭였다.
“우리보다 나이가 어린데, 휘몰이 들어왔다고 기합이 아주 군인 저리 가라다. 가능하면 네가 애들 좀 풀어줘. 너 이런 거 잘하잖아?”
“여기가 보육원이냐…….”
“아무튼 부탁한다. 그리고 여기 몬스터 진짜 많거든? 몰이 사냥 시작하면 경험치 아주 쭉쭉 오를 거다. 안전 벨트 꽉 매.”
“버스 받는 게 처음이라서 잘 모르는데, 기여도 낮으면 경험치 덜 들어오지 않아?”
“그건 그런데 레벨 높은 사람이랑 파티하면 경험치 보정 있어서 잘 들어갈 거야. 그리고 너 사제니까 나한테 계속 버프랑 힐 줘. 내가 어그로 꽉 잡으면서 네 기여도 팍팍 올려줄 테니.”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척 하고 올리는 발터!
‘이 녀석이 믿음직스러울 때가 다 있다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자, 흑곰이 손뼉을 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금 대열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히 이동해주십시오. 어그로 끌리면 바로 손 들고 외쳐주시고, 혹시라도 비밀 통로 같은 거 발견해도 제보해주시고요.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나도 간다. 난 앞쪽에서 탱 서야 돼.”
황급히 떠나는 발터를 쳐다보던 카이는 자신의 경험치 창을 바라봤다.
‘96레벨에 12%라…….’
미드 온라인을 플레이하면서 처음으로 받아보게 되는 버스!
비록 솔플을 하는 것보다 레벨 업 속도는 늦어질지도 모르겠으나,
눈에 불을 켜고 있는 타이탄 길드의 이목을 피하기에는 이곳만큼 안성맞춤인 장소가 없었다.
‘살다 보니 편하게 레벨 업하는 날도 오는 건가. 이번엔 진짜 편하게 레벨 업 해보자. 편하게…….’
던전 최초 발견 버프가 끝나기까지는 아직 7일.
버스를 타는 사람이 대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카이는 천하 태평한 마음가짐으로 대열을 따라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