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102화 (102/441)

# 102

힐통령 102화

42장. 칼 라샤의 성기사(1)

라이넬의 투구에서 한 쌍의 귀화가 피어올랐다.

옆구리에 끼어놨던 투구를 꺼낸 녀석은 그것이 등불이라도 되는 듯 제 앞으로 가져갔다.

스윽, 스윽.

휘몰이 공략대를 한 차례 훑어보듯 좌우로 돌아가는 녀석의 투구.

곧장 무언가를 파악한 녀석은 바닥을 내달렸다.

‘빨라……!’

‘입고 있는 옷을 보면 성기사인가?’

‘여기선 일단 어그로를 확실하게 잡아놓는다.’

파티의 최고수인 흑곰이 크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동시에 제 상체를 뒤덮는 크기의 방패를 땅에 박아넣는다.

콰드드드득.

“수호의 의지! 위협!”

파티원 전체의 방어력을 올려주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어그로 수치를 상승시키는 스킬!

라이넬이 왼손으로 검을 뽑아내며 흑곰에게 달려들었다.

“와라!”

흑곰의 외침과 함께 이어지는 격돌…… 을 예상하던 모두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

스윽.

흑곰의 코앞까지 도착한 라이넬.

만약 두 사람이 연인 사이였다면 키스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짧은 거리.

0.5초 남짓 눈을 맞추던 와중 라이넬의 신형이 돌연 위로 치솟았다.

“아니!?”

“바닥이 움직여? 젠장, 타일이 이런 용도였나!”

“놈이 뒤쪽으로 간다! 어그로 확보 실패! 후방 라인은 산개해서 흩어져라!”

푸른색으로 깜빡이던 바닥의 사각형의 타일들은 휙휙 솟아오르며 기둥을 만들어냈고, 라이넬은 솟아난 기둥들을 밟으며 공략대의 뒤쪽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오는 녀석을 바라보던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쪽으로 오는 거지? 이쪽은 아직 아무런 스킬도 사용하지 않았어.’

한 마디로 아직 어그로 수치가 0이라는 뜻!

“설마……?”

놈의 의도를 예상한 카이는 짤막한 경고를 날리며 옆으로 몸을 던졌다.

“젠장, 피해요!”

콰아아앙!

바닥을 때리는 녀석의 참격!

산산이 조각나며 튀어 오르는 바닥 파편 사이로, 투구에 깃든 녀석의 서늘한 안광이 엿보였다.

‘이 녀석, 사제만 노리는구나!’

등줄기로 소름이 쫘악 흘러내리는 순간, 라이넬의 왼손이 옆으로 튀어나갔다.

“어억!”

일행 중에서 가장 레벨이 높던 사제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사제의 빈약한 방어력을 단숨에 관통한 검은 그의 체력을 60%나 앗아가 버렸다.

“다르단 형!”

“이런, 탱커들 당장 어그로 수치부터 확보해!”

이제는 파티의 후방이 되어버린 곳에서 노성을 터뜨린 흑곰은 어느새 라이넬의 뒤를 덮치고 있었다.

“나를 봐라!”

스윽.

자신에게 매달리는 스토커를 바라보는 듯한 차갑고 관심 없다는 눈빛을 드러낸 라이넬.

녀석은 흑곰의 가슴을 걷어차더니 다시 사제들에게 달려들었다.

“젠장, 왜 사제만 노리는 거냐! 몸으로라도 막아!”

순식간에 사제들 주변으로 모인 탱커들이 몇 겹의 벽을 세웠다.

[…….]

하지만 그 벽은 애초부터 아무 의미가 없었다.

드드득.

“음?”

“이 진동은……?”

“젠장, 바닥이다!”

콰드드드득!

이 플로어의 바닥은 라이넬의 뜻대로 조종할 수 있으니까.

순식간에 최고 레벨의 사제, 다르단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 안 돼!”

흑곰의 외침을 뒤로한 채 바닥을 박차는 라이넬.

녀석의 검은 허공에서 깔끔한 십자가를 그려냈다.

서걱, 서걱!

“……!”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망해 버린 다르단!

공략대의 머릿속에 제대로 빨간 불이 켜지는 순간이었다.

‘이 녀석…… 사제들부터 먼저 처리할 속셈이다!’

‘자신이 성기사이기에 사제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는 건가?’

‘하지만 굳이 저렇게 공격을 허용하면서까지 사제만 노릴 이유는 없을 텐데?’

라이넬이 다른 모두를 무시한 채 사제의 뒤만 쫓을 때, 딜러들은 꾸준히 딜을 넣고 있었다.

벌써 줄어든 녀석의 체력은 4%!

하지만 놈은 그런 사실이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또 다른 사제를 향해 달려갔다.

“사, 살려 줘!”

일행 중 두 번째로 레벨이 높던 사제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160레벨의 보스 몬스터가 자신만 노리고 달려든다면 그 어떤 사제라도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마법사들! 발 묶어!”

“스, 슬로우 필드!”

“인탱글!”

“속박의 사슬!”

여러 개의 이동 제한 주문들이 라이넬의 몸을 뒤덮었다.

하지만…….

[안 다로스!]

라이넬은 듀라한의 몸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성기사인 몸!

상태 이상에 걸리는 족족 풀어버리는 녀석의 발걸음을 늦추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방법…… 방법을 찾아야 한다.’

흑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어그로 확보 스킬도 먹히지 않는 녀석이 사제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

“젠장…… 이판사판이다!”

입술을 콱 깨문 흑곰이 제 무기와 방패를 해제하며 소리쳤다.

“탱커들은 놈의 팔다리를 물고 늘어져라! 이동 속도를 조금이라도 낮추고, 딜러들이 그사이에 딜을 넣어!”

임기응변치고는 나름 괜찮은 판단이었다.

[……?]

자신의 팔과 다리, 목에 탱커들이 주렁주렁 매달리자 라이넬의 신형이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라이넬의 몸이 확 주저앉았다.

[림 가르도!]

콰드드드득!

푸른색으로 빛난 바닥의 타일들이 모로 휘어지며 그의 몸에 붙은 탱커들을 파리처럼 쳐냈다.

동시에 라이넬은 자신의 투구를 높게 들어 올렸고, 그의 주변에 소환진이 생성되었다.

[라이넬이 스켈레톤 나이트들을 소환했습니다.]

“젠장, 소환 패턴까지 있나!”

흑곰의 얼굴 위로 절망이 피어올랐다.

라이넬 혼자만을 상대하기도 벅찬 상황.

그 상태에서 스켈레톤 나이트 다섯 마리는 확실히 귀찮은 상대였다.

‘하지만 스켈레톤 나이트쯤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안도감이 섞인 한숨이 흘러나오기도 전에, 라이넬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가 흑색의 빛을 뿜어냈다.

위이이잉!

추웁, 추우웁.

바닥에서 튀어나온 끈적한 어둠이 스켈레톤 나이트들의 몸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뒤이어 떠오르는 메시지창.

[라이넬이 서임 스킬을 사용하였습니다.]

[라이넬의 권능에 따라 스켈레톤 나이트 다섯 기가 듀라한으로 서임됩니다.]

“……!”

“마, 말도 안 되는!”

그 메시지가 결정적이었다.

그야말로 공략대의 전의를 확실하게 꺾어버리는 야심 찬 한 수!

“흑곰 형님. 이건 아무리 봐도…….”

공략이 힘들 것 같습니다.

뒷말을 삼켰지만, 자리에 있던 모두의 뇌에선 그 뒷말이 자동적으로 재생되었다.

그만큼 상황은 절망적이었으니까.

[……라 데가르.]

라이넬의 손짓과 함께 다섯 기의 듀라한이 탱커들에게 달려들었다.

그제야 자유의 몸이 된 라이넬은 다시금 사제들에게 달려가며 죽음의 검을 흩뿌렸다.

“커억……!”

“죄, 죄송합니다. 먼저 들어가 볼게요.”

줄줄이 사망하는 사제들!

메인 힐러들은 라이넬의 압도적인 공격력을 버티지 못하고 검격 몇 번에 산화되었다.

[…….]

그들을 모두 해치운 라이넬의 목표는 이제 겨우 하나.

그 대상이 된 카이는 헛웃음이 섞인 한숨을 토해냈다.

“허허. 그래…… 내가 언제부터 쉬운 길 갔다고…….”

그래도 버스를 타면 쉬운 길을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늘!

재수 한 번 더럽게 없는 카이는 슬쩍 스킬창을 확인했다.

‘불사의 의지는 아직 쿨타임이 며칠 남았어. 따라서 내 목숨은 단 하나뿐.’

카이의 눈이 빠르게 전장을 훑었다.

‘여섯 명의 탱커들은 듀라한들을 맡고 있어. 흑곰 혼자서 세 마리를 맡고 있군.’

지금 당장은 흑곰이 힘내고 있으니, 힐러가 없다고 하더라도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적을 죽이지 못하면 전투는 끝나지 않는 법!

카이는 모양새를 내려고 들고 있던 사제용 메이스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결국 내가 뭐 빠지게 도망다녀야 한다…… 이거구만.”

그동안 딜러들이 자신을 쫓아다니는 라이넬을 공격해서, 죽인다.

몇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 죽음의 레이스!

카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나도 점점 미쳐가나 봐.’

두렵기보다는 재미있다는 감정이 먼저 느껴지다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기 위해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쓴 카이가 소리쳤다.

“도망치겠습니다!”

“……?”

“……?”

난데없는 도망 선언!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카이가 손가락으로 라이넬을 가리켰다.

“제가 예전부터 달리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했어요. 한 시간이 되든, 두 시간이 되든, 도망다니겠습니다. 그러니까…….”

콰드드득!

카이의 말이 끝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검을 내뻗는 비매너의 극치, 라이넬!

하지만 순식간에 몸을 굴려 공격을 회피한 카이는 오뚜기처럼 일어나며 말을 마무리했다.

“딜러분들은 안심하시고 녀석을 공격해주세요.”

***

콰득, 콰드득.

흑곰의 방패가 마지막 남은 듀라한의 명치를 몇 번이고 내려찍었다.

그제야 폴리곤으로 변하는 지독하고 끈질긴 듀라한 녀석.

“후우…….”

듀라한들을 모두 물리쳤지만, 탱커들은 누구 하나 기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다만,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표정으로 어딘가를 멍하니 쳐다보는 중이었다.

콰르릉, 콰릉!

벨라지오라는 호텔이 있다.

라스베가스를 방문한 이들이라면 무조건 한 번쯤은 지나칠 수밖에 없는 유명한 호텔.

그 호텔의 정면에는 거대한 인공 호수가 있는데, 15분 간격으로 화려한 분수 쇼가 펼쳐진다.

바로 지금처럼.

콰악, 콰악, 콰악!

바닥의 푸른색 타일들은 마치 분수 쇼라도 보여주는 것처럼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그것들이 노리는 바는 오직 하나.

바로 카이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라이넬이 그를 죽일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은 지난 1시간 20분 동안 단 한 번도 카이를 방해하지 못했다.

‘왼쪽, 오른쪽, 왼쪽, 왼쪽.’

몸을 숙여 뒤에서 날아드는 검을 회피한 카이의 시선이 빠르게 전방의 바닥을 훑었다.

깜빡, 깜빡.

푸른색으로 빠르게 점멸하는 바닥의 타일들.

그것은 다음 순간 어느 타일이 솟아오를지를 알려주는 일종의 신호였다.

다음 순간 카이의 몸은 돌개바람처럼 움직이며 솟아오르는 타일들을 모조리 피해냈다.

‘그렇지. 페가수스 애들이 좀 변태 같기는 해도, 아무런 공략법이 없는 던전을 만들 리는 없지.’

물론 이 변태 같은 공략법을 눈앞에 들이밀어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없다는 게 문제지만.

“……사제가 저런 움직임을 펼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멍하니 카이의 도주를 쳐다보던 흑곰이 물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우사인 볼트를 데려다 놔도 저렇게 잘 도망칠 수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였다.

“그, 글쎄요. 저 녀석이 중학교 고등학교 체육 대회 때 단거리 육상 선수로 나가기는 했었는데…….”

머리를 긁적이던 발터도 크게 놀라기는 마찬가지!

흑곰의 마음속에 카이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점점 커지던 때, 라이넬이 입을 열었다.

[……멈춰라!]

주문을 읊조리는 것이 아닌, 사람의 말을 처음으로 내뱉는 라이넬!

그가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말을 꺼냈을까.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탱커들이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당사자인 카이도 화들짝 놀라며 뒤를 쳐다봤다.

“……말도 할 줄 알잖아?”

[그대, 지금 당장 걸음을 멈추고 정의의 심판을 받으라.]

“혹시 그쪽 왼손에 들린 검이 정의의 심판?”

[기꺼이 받으라.]

“가서 엿이나 까먹으라.”

콰르르릉!

별 영양가 없는 대화를 끝으로 재개되는 치열한 추격전.

그 모습을 쳐다보는 딜러들도 놀라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들의 손은 바삐 움직였다.

“꿰뚫는 화살!”

“아이스 스피어!”

“일레트릭 볼!”

모두가 전투를 포기했을 때, 오직 100레벨도 안 되는 사제만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저렇게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다.

그 부끄러운 사실이 그들의 집중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콰앙.

콰르릉!

파지직!

쏘는 족족 명중하는 딜러들의 스킬들!

공격하는 족족 명중하니, 손맛을 느낀 딜러들은 더욱 흥이 나서 스킬들을 쏟아부었다.

‘……남은 체력은 3%.’

어느새 막다른 길에 몰린 카이는 열심히 움직이던 두 다리를 멈췄다.

깜빡, 깜빡.

발밑에서 깜빡이는 푸른색의 타일.

‘체력도 적당하군. 여기서 승부수를 띄운다.’

카이가 라이넬을 뚫어질 듯이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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