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힐통령 103화
42장. 칼 라샤의 성기사(2)
‘이 녀석은 성기사.’
행동하는 건 피를 보고 눈 돌아간 광전사 같지만, 일단 직업을 잊어버려선 안 되었다.
‘궁지에 몰리면 엿 같은 패턴이 발동될 게 분명해.’
보통의 성기사 몬스터들이 그러했다.
체력이 떨어지면 주섬주섬 회복 스킬을 쓰거나 무적기를 사용하는 졸렬한 녀석들!
‘아까부터 지켜본 결과. 이 녀석이 스킬을 쓰기 전에는 항상 하는 행동이 있어.’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콰드드득!
바닥의 타일이 솟아올랐고, 카이의 어깨를 중력이 짓눌렀다.
“크윽……!”
마치 안전 벨트 없이 자이로드롭을 타는 기분!
정신력으로 이를 힘겹게 버티는 와중, 시야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날붙이! 검이다!’
파앗!
카이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자신의 심장을 노리는 검을 손으로 밀어낸 것이다.
그 대가로 손아귀가 찢어지고 검이 반대쪽 팔을 베었지만, 결과적으로 죽지는 않았다.
꿀꺽.
‘미, 미친. 그런데 데미지가 왜 이래?’
물론 죽음에 달하는 피해를 입기는 했다.
과연 160레벨의 보스 몬스터가 지닌 공격력은 압도적!
7% 언저리에서 간당거리는 생명력을 보고 있자, 심장을 안 뚫린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심장 찔렸으면 100% 사망이었어.’
재차 위로 올라가는 검을 쳐다본 카이가 라이넬의 품을 향해 달려들었다.
[……!]
설마 나약한 사제가 자신에게 달려들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라이넬은 방어 자세를 취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한 발자국을 물러섰다.
그리고 그것이 결정적인 실수가 되었다.
“잘 받아간다!”
덥석!
라이넬의 옆구리에 끼어진 머리를 쏘옥 빼내는 카이!
그는 왕년의 축구 실력을 뽐내듯, 그것을 뻥 차서 흑곰에게 패스했다.
[라이넬에게 876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떠오르는 메시지를 지워버린 카이가 소리쳤다.
“마무리하세요! 그거 없으면 이 녀석 스킬 못 쓸 겁니다!”
“……!”
“과연, 그렇군!”
라이넬은 스킬을 사용하기 전에 항상 자신의 투구를 높게 들어 올렸다.
도망을 치는 와중에도 꼼꼼히 그 사실을 파악한 카이!
‘자, 계획대로 녀석을 투구 없는 찐따로 만들었다.’
투구가 없으면 스킬을 사용할 수 없을 거라는 가능성만 믿고 실행한 무모한 도전!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옳았다.
콰득, 콰득, 콰드득!
순식간에 투구 주변으로 몰려든 공략 대원들은 모든 스킬을 투구에 박아넣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까지의 울분을 해소하겠다는 것처럼 거칠고 잔혹한 공격들!
[크아아아!]
라이넬이 텅 비어 있는 목구멍으로 푸른색 연기가 피 분수처럼 쏟아져나왔다.
자신의 공허한 어깨 위를 더듬거리던 라이넬은 연신 몸을 비틀며 고통스러워했다.
“역시 투구가 없으면 스킬을 못 쓰나 봐?”
카이의 이죽거림에 자신의 떨리는 손을 내뻗는 라이넬!
그의 머리 위를 슬쩍 쳐다본 카이는 굳이 이를 피하지 않았다.
[일곱 번째 기사, 라이넬]
[남은 체력 : 0%]
“손은 치우시고.”
툭.
손가락으로 녀석의 팔을 때리자, 오래된 흙먼지처럼 부서지는 녀석의 팔.
그 파멸은 곧장 전신으로 확산되어 퍼져 나갔다.
사르르륵.
띠링!
[보스 몬스터, ‘일곱 번째 기사 라이넬’을 처치하셨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스탯 포인트를 20개 획득했습니다.]
“후우…… 힘들었다.”
제아무리 카이라고 해도 힘들 수밖에 없었던 전투!
자리에 주저앉은 카이는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주물렀다.
그때, 죽은 줄 알았던 라이넬이 벌떡 일어났다.
‘……뭐? 죽은 게 아니었나?!’
기겁한 카이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으나, 이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가늘게 뜬 카이가 그의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몸이 옅어?’
마치 자신이 영체화를 사용했을 때와 비슷한 모양새.
게다가 라이넬은 아까처럼 지독한 살기나 분노를 뿜어내지 않았다.
수도승들이나 보여줄 법한 자비로운 미소와 따듯한 감정이 공기를 타고 전해져왔다.
‘우선 적은 아닌 것 같은데? 방어구도 바뀌었고.’
기존에 라이넬을 뒤덮고 있던 낡고 해진 사제복과 찌그러진 갑옷은, 어느새 이단심판관들이나 입을 법한 정갈하고 기품이 느껴지는 사제복, 그리고 명장이 수십 번은 담금질을 했을 법한 갑옷으로 변모해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목이 붙어 있는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라이넬이 입을 열었다.
[그대인가. 우리 칼 라샤의 신도들에게 내려진 겪은 영겁의 저주를 풀어준 은인이…….]
“저희 일행이 죽여드린 건 맞는데…….”
[그렇군. 멈출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있던 나와 동료들을 멈춰줘서 고맙네.]
아련한 눈빛을 지은 라이넬이 플로어를 크게 한 바퀴 둘러봤다.
[칼 라샤 교단. 나와 형제들이 속해있던 교단의 이름일세. 우리는 뮬딘 교에게 패배했고, 그 대가는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을 불러왔지.]
자신의 흐릿한 두 손을 바라보던 라이넬의 입가로 씁쓸한 미소가 스며들었다.
[그들에게 패배한 우리는 그들의 실험체가 되어 끔찍한 일을 당해야만 했네.]
“설마 그 끔찍한 일 중 하나가 언데드가 되는 것이었나요?”
[맞네. 피와 복수, 분노에 미쳐 사는 언데드 기사 듀라한이 되는 것. 자랑스러운 칼 라샤의 성기사와 사제들은 스켈레톤 나이트와 듀라한이 되어 아직도 이 땅 주변을 맴돌고 있을 걸세.]
라이넬은 천천히 칼 라샤 교단의 성호를 그리더니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정말 고맙네. 그대 덕분에 나와 형제들은 영겁의 저주에서 풀려나 영원한 안식의 땅으로 갈 수 있게 되었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교과서, NPC를 상대하는 올바른 자세 1권에 수록되어 있는 정석적인 대답!
이에 크게 흡족한 라이넬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칼 라샤는 변화를 관장하시는 분. 신을 모시는 우리 또한 정도가 무엇인지는 모르지 않으니, 그대의 도움에 걸맞은 보상을 주겠네. 게다가 자네의 몸에서 느껴지는 건 타교(他敎)의 신성력. 내 예상이 맞다면 태양교가 맞는가?]
“맞습니다.”
[역시 그렇군…… 악독한 뮬딘 교의 잔당들이 내 머리에 심어놓은 명령은 단 하나였네. 바로 태양교의 신자들을 말살하라는 것이었지.]
“아…….”
카이는 그제야 라이넬이 그렇게 얻어맞으면서도 사제들만 노리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자네가 칼 라샤의 의지를 이어줬으면 좋겠네.]
띠링!
[히든 클래스, ‘칼 라샤의 이단심판관(영웅)’으로 전직할 수 있습니다.]
[칼 라샤는 변화를 관장하는 신입니다. 이미 이 땅에서 잊혀진 옛 신이지만, 당신이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고 다니면 잊혀진 칼 라샤의 교단을 다시 한번 부흥…….]
“안 할래요.”
[당신의 굳건한 믿음에 태양신 헬릭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태양교의 공헌도가 5,000 상승합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튀어나온 거절!
하지만 카이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신화 등급 직업을 준다고 해도 할까 말까인데, 영웅 등급 클래스를 내밀어?’
물론 이와 같은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라이넬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 자네가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안 합니다, 안 해요.”
[하, 하지만 칼 라샤의 숭고한 뜻은 대륙에 이어져야…….]
“저 믿는 신 있어요.”
남친 있는 여자가 철벽을 치는 것처럼 단호하게 철벽을 세우는 카이!
이에 어쩔 줄 모르던 라이넬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부탁했다.
[정말 안 되겠나? 내가 무릎이라도 꿇겠네.]
“저도 무릎 꿇을까요? 저 진짜 안 할 거예요.”
[…….]
띠링!
[히든 클래스, ‘칼 라샤의 이단심판관(영웅)’의 전직을 거절하셨습니다.]
카이는 입을 헤 벌린 채 넋이 나간 라이넬을 쳐다보더니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어쩔 수 없군요, 제가 칼 라샤의 사제가 되어드릴 순 없지만, 언젠가 마음에 들고 재능 있는 사제를 보면 칼 라샤의 이단심판관을 강력 추천하겠습니다.”
[그, 그래 준다면 정말 고맙겠네! 그렇다면 자네에게 이걸 미리 전달해놔야겠군.]
라이넬은 이것이 카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직업 권유를 포기한 그는 카이에게 두 개의 반지를 내밀었다.
“이건……?”
[확인해 보게.]
“아이템 감정.”
[타락한 성기사의 반지]
등급 : 유니크
공격력 15
주문력 15
방어력 150
마법 저항력 147
서임 스킬 사용 가능.
[서임 : 휘하의 스켈레톤 나이트들을 듀라한으로 승격시킵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하루.]
뮬딘 교의 타락한 신도들은 다른 교단의 신들이 지닌 힘을 이용할 방법을 여러모로 강구했습니다. 이 반지에는 그들이 변화를 관장하는 칼 라샤의 신도들을 실험체로 사용하며 얻은 힘의 일부가 담겨있습니다.
착용 제한 : 레벨 100 이상, 사제 클래스.
내구도 47/100
“이, 이건!”
카이의 눈이 휘둥그렇게 뜨여졌다.
‘휘하의 스켈레톤 나이트를 모두 듀라한으로 승격시킨다고? 이건 아까 라이넬이 썼던 기술이잖아?’
스켈레톤 나이트가 순식간에 듀라한으로 변모했던 엿 같던 순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걸 내가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아니, 잠깐만. 그런데 난 스켈레톤 나이트가 없잖아.’
카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놀 언데드 치프의 스태프를 이용하면 놀 언데드를 소환할 수는 있지만, 그건 스켈레톤 나이트가 아니었다.
‘……이런 효과를 지닌 스킬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
돌려 말하면, 하급 언데드를 스켈레톤 나이트로 승격시키는 스킬이 있을 수도 있다는 뜻!
‘호, 혹시?’
동시에 받은 다른 하나의 반지가 그런 효과를 지니고 있지는 않을까?
카이는 황급히 다른 반지도 마저 감정했다.
[칼 라샤의 인도자]
등급 : 레어
방어력 10
마법 저항력 10
반지를 착용 시 칼 라샤 교단의 의지를 이어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이동시켜줍니다.
착용 제한 : 레벨 100 이상, 사제 클래스.
내구도 100/100
“쩝.”
대놓고 아쉬움을 토해낸 카이는 라이넬을 쳐다봤다.
“혹시…… 놀 언데드, 그러니까 하급 언데드를 스켈레톤 나이트로 변화시키는 방법을 아십니까?”
[흐음. 난해한 질문이로군. 미안하지만 나는 뮬딘 교에 의해 조종을 당하고 있던 상태였기에 그간 내가 사용했던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다. 자네의 질문은 오히려 대륙의 네크로맨서들이 더욱 잘 알고 있겠군.]
“그렇습니까…….”
[이런.]
대답을 마친 라이넬의 몸이 점점 더 흐려지기 시작했다.
[칼 라샤의 인도자 반지는 꼭 칼 라샤 교단을 번영시켜줄 형제에게 전해주게나. 다른 반지는 자네가 가져도 되네. 그럼 이만 헤어질 시간이로군.]
“지옥…… 아니, 좋은 곳에서 칼 라샤 교단의 번영을 지켜보시지요.”
[고맙네.]
일말의 미련도 없는 상쾌한 미소를 지어 보인 라이넬은 담배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태양신 헬릭이 친우의 자식이었던 라이넬의 소원을 받아들인 당신에게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선행 스탯이 +10 상승했습니다.]
“나, 원.”
칼 라샤가 자신의 친구였던 걸까.
기분이 좋아 보이는 헬릭의 메시지에 카이가 피식 웃음을 터뜨릴 때였다.
“카이 님. 보상 문제 말씀입니다만…….”
등 뒤에서 흑곰의 정중한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