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힐통령 106화
44장. 두 번째 임무(2)
“푸른 역병의 아오사? 그게 뭡니까?”
“뮬딘 교가 만들어낸 악몽 중 하나라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책을 펼친 타르달이 돋보기안경을 고쳐 썼다.
“일반인은 아오사가 근처를 지나가기만 해도 중독된다. 중독 증상은 온몸에 푸른색의 반점이 돋아나는 것으로, 반점이 몸의 절반을 덮으면 칠 일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다…… 역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네.”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죽는다고요?”
“물론 일반인을 기준으로 한 이야기일세. 모험가의 경우에는 경우에 따라 오래 버틸 수 있겠지. 더군다나 자네는 사제가 아닌가?”
책을 덮은 타르달이 카이의 눈을 응시했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사제의 몸으로 어둠 추적자의 일원이 된 건 자네가 최초일세.”
그의 말마따나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카이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시험 난이도를 생각하면 당연하지. 솔플을 통해서만 비늘을 구해와야 하는데, 사제가 가능할 리가.’
전투 사제라 하더라도 결코 쉽지 않은 입단 시험!
카이의 호수처럼 고요한 표정을 바라보던 타르달이 말을 이었다.
“화이트홀 영지의 진료소로 찾아가게. 만약 주민들이 중독된다면 진료소보다 그 사실을 빠르게 알 수 있는 곳은 없으니 말이지.”
“아오사가 그곳에 나타나는 건 확실한 정보입니까?”
“푸른 역병은 신출귀몰한 것이 특징. 어두운 밤이 되면 그림자에 녹아들어 이동하기에 옆을 지나가도 모르는 일마저 생긴다네. 하지만…….”
촤아아악.
타르달이 책상 위에 거대한 지도를 펼쳤다.
카이도 숱하게 보아왔던 대륙 전도!
‘그런데 이건 뭐지?’
타르달의 지도에는 특정 지역에 빨간색 X 표시가 수십 개나 그려져 있었다.
하비에르 왕국에서 처음 시작된 표식은 마치 기차놀이를 하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라시온 왕국의 국경까지 이어졌다.
“설마 이 붉은색 X 표시는……?”
“아오사가 이동한 경로일세. 정확히 두 달 만에 하비에르 왕국의 남동쪽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라시온 왕국의 국경을 넘었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속도!
하지만 지도를 보고 있던 카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동 경로는 단순하네요.”
하비에르의 라단 마을에서 창궐한 푸른 역병은 일직선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경로를 보면 알겠지만 놈은 반드시 화이트홀을 지나칠 것일세. 그러니 그곳에서 기다리게.”
“알겠습니다. 혹시 아오사의 약점은 따로 없습니까?”
“약점이라…….”
자신이 읽었던 책의 내용을 고민하는 듯, 타르달의 눈이 감겼다.
“신성력에 취약하다는 점. 그리고 몸속에는 아오사의 힘이 담긴 핵이 존재한다는 점. 이 정도뿐이군.”
“충분합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어낸 카이는 곧장 저택을 떠났다.
***
보글보글.
화이트홀에 위치한 한 진료소.
그곳의 커다란 항아리에 담긴 거무튀튀한 액체는 연신 기포를 터뜨리는 중이었다.
휘익휘익.
고작 13살쯤 되었을까?
제 종아리 높이까지 올라오는 발판에 올라선 채, 거대한 국자로 항아리의 내용물을 젓고 있던 소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조그마한 수첩의 내용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이, 이제 큰 귀 박쥐의 날개 두 개랑 민트아시오의 잎을 세 장만 더 넣으면…….”
퐁, 퐁!
수첩의 내용대로 약재를 집어넣은 소녀는 30분이 지나자 국자를 조심스레 입가로 가져갔다.
‘제발…… 제발!’
호오, 호오.
후루룩.
뜨거운 액체를 잘 불어서 식힌 뒤, 눈을 꼬옥 감고 이를 단숨에 마셔버린 소녀!
이내 그녀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구웨에엑!”
한참이나 장을 깨끗하게 비워낸 소녀는 이내 허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번 레시피도 글렀구나.”
고사리 같은 손으로 펜을 놀려 수첩에 X 표시를 그어버린 그녀의 몸이 축 늘어졌다.
일어설 힘조차 없는지 저절로 풀려버린 다리가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아으…….”
이번 실험이 남긴 것은 레시피가 실패했다는 사실과 1골드의 적자뿐.
불과 2시간 전까지만 해도 설레던 마음은 어느새 식어버렸고, 현실만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 달 실험도 허탕이었으니까…… 당분간은 또 뒷산의 풀을 끓여서 죽을 만들어서 먹고, 장작도 함부로 피우면 안 되겠어.’
현재의 재정 상태라면 다음 실험은 최소 두 달 뒤에나 시도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점점 더 악화되는 가계 사정에 그녀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떻게든 레시피를 성공시켜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해. 그래야…….”
그녀가 각오를 다짐하려는 순간, 누군가 진료소의 문을 두드렸다.
쿵, 쿵, 쿵!
“누, 누가……?”
엉거주춤 일어나는 그녀의 눈빛은 두려움에 물들어있었다.
‘설마 또 그 나쁜 사람들이?’
두 손으로 입을 꾹 막은 채 숨 쉬는 소리조차 흘러나가지 않게 막은 소녀.
그 미묘한 대치가 20초 정도 이어졌을까? 누군가 문밖에서 곤란하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분명히 간판에는 진료소라고 쓰여있는데…….”
쫑긋.
아주 작은 음성이었지만 소녀는 이 음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챙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굳게 닫혀 있던 문을 활짝 열면서 소리쳤다.
“아니에요! 진료소 맞아요! 들어오세요!”
“음?”
이제 막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하려던 모험가 하나가 행동을 멈추었다.
하얀색의 정갈한 사제복을 입고 있는 20대의 남자였다.
“다행이다. 안에 사람이 있었구나. 그런데…….”
한쪽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춘 남자는 문고리를 잡고 있는 소녀의 뒤쪽을 살피며 물었다.
“다른 분들은 안 계시니? 진료소의 소장님이라거나…….”
“저, 저밖에 없어요.”
조그마한 목소리로 우물쭈물 대답하는 소녀를 바라보던 모험가 사제, 카이는 주변을 살폈다.
‘화이트홀 영지에는 진료소가 두 개 있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이쪽 진료소의 상태는 영 부실해 보였다.
실제로 해가 중천에 떠오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진료를 받으러 온 주민을 찾아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소장이 이 시간에 출근조차 하지 않은 진료소라니.
카이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여긴 안 되겠어.’
타르달이 자신에게 이곳에서 주민들을 돌보라고 시킨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아오사에게 중독당한 주민을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기 때문!
당연히 진료를 받으러 오는 주민들이 없으면 중독 사실을 알아차릴 수도 없었다.
마음을 굳힌 카이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구나. 아무래도 내가 잘못 찾아온…….”
카이가 사과를 하려던 찰나, 뒤에서 드리워진 그림자가 그의 몸을 뒤덮었다.
“죄송하지만, 혹시 이곳의 손님이십니까?”
고개를 돌린 카이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이들을 살폈다.
‘남자 셋. NPC인가?’
영지 소속의 엠블럼을 가슴에 달아놓은 이들은 십중팔구 NPC일 가능성이 높았다.
자신에게 말을 건 이는 중앙에 위치한 염소수염의 사내.
그의 양옆으로는 엄청난 근육질을 자랑하는 남자 둘이 병풍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료소를 찾고 있긴 합니다만.”
“하하, 그렇다면 저희 진료소로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저희 진료소는 화이트홀의 최대 크기를 자랑하고 있고, 최신식 약재와 함께 수도에서 자격증을 따낸 우수한 선생님들이 진료를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두 손을 장사치처럼 비비적거리던 염소 수염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저희는 화이트홀 영주님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영지의 유일한 진료소랍니다.”
“예? 그렇다면 이곳은…….”
“유사 진료소죠. 한마디로 불법입니다.”
염소수염의 말에 카이는 슬쩍 고개를 돌려 소녀를 쳐다봤다.
자그마한 입술을 앙다물고 있는 소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사실일까?’
사실 카이가 이런 고민을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염소수염의 말처럼 이곳이 불법 진료소이든 아니든 그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태양교의 사제가 진료를 무료로 도와주겠다고 하면 이를 마다할 진료소는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더 큰 진료소로 찾아가는 편이 아오사의 출현을 알아차리는 것도 쉽겠지.’
하지만 저 소녀를 두고 떠나려니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마치 헬릭의 시험을 치를 때, 에이미를 혼자 내버려 두고 갈 수 없던 기분과도 비슷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카이가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으으.”
만약 자신이 이해 타산적인 사람이라면 얼마나 편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카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죄송한데 진료소는 나중에 방문할게요. 전 이쪽 소녀에게 볼일이 있습니다.”
염소 사내의 눈이 카이의 복장을 훑었다.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태양교의 사제분이신 것 같습니다만.”
“맞습니다.”
“그런 분이 이 불법 진료소에는 무슨 용무이시죠?”
“제 개인적인 볼일의 내용까지 말씀드릴 이유는 없을 텐데요.”
“그건…… 그렇군요.”
대화 내내 미소를 잃지 않던 염소 사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거룩하고도 자비로우신 태양신 헬릭을 섬기는 수행자시여, 모쪼록 빠른 시일 내에 저희 진료소에서 뵙기를 고대하겠습니다.”
“별말씀을.”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카이는 자리를 떠나는 염소수염의 등을 향해 말했다.
“그런데 그쪽 분이야말로 여긴 어쩐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
자리에 멈춰선 염소수염은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활짝 웃었다.
“하하, 아무리 태양교의 사제분이시라고 해도 제 개인적인 용무까지는 말씀드릴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내 고개를 숙인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뒤에서 풀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음?”
고개를 돌린 카이의 시야로 자리에 주저앉아있는 소녀가 보였다.
“괜찮니? 무슨 일…….”
꼬르르륵!
소녀의 뱃가죽이 내는 우렁찬 소리!
“아, 아니에요. 이건…….”
귀까지 붉게 물들인 소녀는 부끄러운지 챙 모자를 더욱 깊이 눌러썼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카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혹시 점심 안 먹었으면 같이 밥 좀 먹어줄래? 혼자 먹기가 심심해서 그런데.”
“네, 네에? 저, 정말요?”
반짝이는 눈동자를 선보인 소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감사히 먹을게요! 그 전에 잠시만요!”
소녀는 후다닥 진료소로 들어갔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가 나오질 않자, 카이는 천천히 진료소 내부로 들어갔다.
“음…… 무슨 냄새가…….”
진료소에 들어오는 즉시 코를 찌르는 강렬한 약재들의 냄새!
인내심을 발휘한 카이는 관심사를 카운터에 놓여있는 탁상용 액자를 향해 돌렸다.
‘가족사진인가?’
액자에는 제법 뛰어난 화가가 그렸는지 사진처럼 정교한 그림이 들어있었다.
지금 소녀가 쓰고 있는 챙 모자를 쓴 아름다운 여인과 그녀의 품에 안긴 채 환하게 웃는 소녀.
그리고 마찬가지로 웃음을 지은 채 뒤에서 그들을 껴안고 있는 덩치 큰 남자.
진료소 앞에서 그렸는지 배경으로는 작지만 깔끔한 진료소의 외관이 그려져 있었다.
“허억, 허억. 죄송해요. 냄새 때문에 머리 아프셨죠? 평소에는 창문을 열 수가 없어서…….”
황급히 내부 청소를 했는지, 소녀는 순식간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나타났다.
카이는 허공을 떠다니는 먼지를 손으로 날려 보내며 물었다.
“평소에는 창문을 못 열다니, 대체 왜?”
“네? 그야…….”
카이를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소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 거예요?”
“오늘이 이 동네 처음 방문한 날이야.”
카이의 말에 소녀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눈을 질끈 감으며 사과했다.
“여, 역시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아무것도 모르고 여길 오신 거라면 지금 당장 나가시는 게 좋아요.”
“왜지?”
“그야…… 여기 오래 계시면 좋은 꼴을 못 보실 테니까요.”
“그러니까 그 이유를 말해 봐. 판단은 내가 할 테니.”
카이의 질문에 머뭇거리던 소녀는 제 머리를 덮고 있던 챙 모자를 천천히 벗었다.
그러자 그 안에 감춰져 있던 풍성한 은발이 흘러내렸고, 그 사이로 뾰족한 귀가 엿보였다.
무언가를 체념한 듯, 나이에 걸맞지 않은 쓸쓸한 얼굴을 지어 보인 소녀가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이곳이 저주받은 마녀의 진료소이기 때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