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힐통령 107화
45장. 저주받은 마녀의 진료소(1)
일반인의 것보다 길고 뾰족한 그녀의 귀를 쳐다보던 카이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엘프……?”
“아, 아니요. 저는 하프엘프예요. 어머니는 엘프지만 아버지가 인간이셨거든요. 숲에서 처음 만난 두 분은 약초를 좋아하는 서로에게 이끌려 금세 사랑에 빠지셨고, 저를 낳으셨다고 들었어요.”
“…….”
카이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 얼마나 높은 자유도를 구현해 놓은 게임이란 말인가.
NPC들이 종족을 초월한 사랑을 나누고 자식까지 낳다니!
신선한 의미로 충격을 받은 카이가 되물었다.
“그럼 아까 말한 저주받은 마녀라는 건?”
“사람들이 우리 엄마를 저주받은 마녀라고 불러요.”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밥부터 먹을까?”
인벤토리에 보관 중이던 음식들을 종류별로 꺼내놓자, 소녀의 입에 침이 고였다.
“저, 정말 괜찮으세요? 저는 마녀의…….”
“마녀의 자식이든 마왕의 자식이든, 사람은 밥 시간이 되면 일단 뭐라도 먹어야 해.”
카이의 입이 기분 좋은 호선을 그려냈다.
***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소녀는 성인 남성 두 명이 먹을 양을 혼자서 먹어치웠다.
인벤토리에 음식을 넉넉하게 넣어두는 카이가 아니었다면 곤란했을 정도!
“흐아아.”
카이는 간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고 행복해하는 소녀를 관찰했다.
‘혼혈이라서 그런가? 귀엽게 생겼네. 나도 나중에 이런 딸 낳았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야.’
크고 동그란 눈과 어린아이의 콧대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높게 솟아오른 코.
그리고 앙증맞게 도톰한 입술과 엘프 고유의 특성을 따라 완벽한 신체 밸런스까지.
지금 당장에라도 아동복 매장으로 달려가 저 꼬질꼬질한 옷 대신 신상품들을 입혀주고 싶은 기분!
만약 그녀를 지구의 초등학교에 입학시킨다면, 그 날은 학교의 퀸카가 바뀌는 날일 것이다,
“흐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카이는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네, 네…….”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한 소녀는 아직까지 카이를 어려워하는 듯했다.
‘아직도 내가 어렵단 말이지? 그렇다면…….’
다년간의 고아원 봉사활동 덕분에 아이를 다루는 기술까지 빠삭한 카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인 그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서로의 이름도 모르네. 내 이름은 카이야. 태양교를 믿는 사제지.”
“저는 아, 아야나예요.”
“아아야나?”
“아, 아야나요! 그냥 아야나예요.”
“이름이 아야나구나? 그러고 보니 나도 속이 좀 아야 한 것 같은데? 하하하!”
“…….”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재 개그를 접한 아야나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그녀의 가녀린 팔뚝 위로 돋은 닭살은 눈에 선명하게 보일 정도!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재미없어?”
“있을 리가 없잖아요!”
빼액!
아야나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날 어려워하던 기색이 옅어졌어.’
아재 개그를 구사한다는 불명예를 떠안은 건 치욕적이었지만, 덕분에 분위기가 많이 풀렸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카이를 쳐다보던 아야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뭐 좀 여쭤봐도 돼요?”
“얼마든지.”
“아, 아빠가 그러셨어요. 태양신님에게 간절히 기도를 올리면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그게 사실일까요?”
“에이, 그게 사실이면 이 세상 사람들 죄다 기도 올리고 있겠지.”
“거, 거짓말이었어요!?”
아빠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아야나가 몸을 한 차례 휘청거렸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엘프 특유의 기다란 귀마저 시무룩하게 접힌 상태!
“왜? 빌고 싶은 소원이라도 있어?”
“네? 아, 그게…… 네에.”
“그럼 그 소원이 뭔지 나한테 말해줄래? 내가 듣고서 나쁜 소원이 아니라면 헬릭 님에게 직접 전해줄게.”
“태, 태양신님이랑 친하세요?”
“당연하지. 그 양반은 내가 뭔 일만 하면 허허거리면서 좋아하거든.”
“그, 그러시구나! 그럼…….”
눈을 질끈 감은 아야나가 두 손을 꼬옥 모았다.
“헬릭 님, 엄마랑 아빠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녀의 연령에 걸맞지 않은 소원에 카이의 눈빛이 바뀌었다.
‘역시 뭔가가 있구나.’
혼자 진료소를 지키는 하프엘프 소녀.
점심시간이 지나가는데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녀의 부모님.
카이는 아이를 달래는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줄래?”
“그러니까…….”
아야나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13살짜리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였기에 횡설수설하는 감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카이는 그녀의 말을 끊지 않고 천천히 모두 들어주었다.
“흐음.”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카이는 자신의 목젖 부근을 문질렀다.
그러자 뇌를 거치지도 않고 곧장 결론이 나왔다.
‘듣는 것만으로 목이 턱턱 막히는 이 이야기는…… 고구마로구나!’
카이는 아야나가 해준 이야기를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아야나의 어머니는 엘프의 지식을 이용해 비약을 만들었어.’
당연히 비약의 효과는 인간들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군이었다.
덕분에 화이트홀은 금세 최상급 비약을 다루는 영지로 취급되었고, 이곳 스마일 진료소의 이름도 널리 퍼졌다.
‘그녀의 존재 하나만으로 화이트홀의 약재 산업은 몇 배나 성장한 거나 다름없지.’
홀로 일궈냈다고는 믿기 힘든 엄청난 업적!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시장이 커지면 파리가 꼬이기 마련이다.
‘다만 이 파리의 경우에는 덩치가 너무 컸다.’
바로 화이트홀 영주의 동생이 약재 산업에 눈독을 들인 것이었다.
그는 비약을 판매해 막대한 매출을 일궈내는 스마일 진료소를 보며 한 가지 사업을 구상했다.
‘그가 스마일 진료소에 제시한 조건은 내가 듣기에도 대단해.’
하지만 그는 비약의 수량을 철저하게 통제해서 가격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쉽게도 그러한 주장은 가난한 이들도 치료해 주고 싶어 하는 부부의 생각과는 맞지 않았다.
‘거절과 동시에 더러운 짓을 벌이기 시작했어.’
여태껏 아무 문제가 없던 그녀의 약재를 먹은 사람 중 대다수가 중독되었고,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가족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해명할 수 있는 기회를 요청했지만, 귀족의 힘은 강력했다.
순식간에 진료소를 포위한 병사들이 부부를 체포했고, 마녀라는 누명을 뒤집어씌운 채 감옥에 수감시켰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진료소를 만들었지.’
영주에게 인정받은 화이트홀 유일의 진료소라는 타이틀.
게다가 최신식의 시설과 수도에서 초청해온 고명한 약재사들까지!
그들은 마녀에게 중독당해 죽음만을 기다리던 주민들을 말끔하게 치료해 주며 칭송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각본대로 잘 흘러갔을 거야.’
문제는 이후부터 계획이 조금씩 틀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스마일 진료소가 문을 닫으면 자신이 그 매출까지 독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애초에 엘프의 비약이 없는데 돈이 나올 리가 없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라버린 격이야. 지금쯤 답답하겠지.’
엘프의 비약이 판매되지 않자 화이트홀의 약재 산업 파이는 거짓말처럼 축소되었다.
상인이나 다른 도시의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에서도 구할 수 있는 비약을 웃돈 주고 구매할 만한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까 그 염소수염 영주 동생이라고 했지? 그가 노리는 건 아마 스마일 진료소의 레시피일 거야.’
당연한 말이지만 아야나는 엘프의 비약에 대한 레시피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
물론 염소수염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대충 이야기는 이해가 되었고…….’
카이는 울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야나에게 물었다.
“아야나, 만약 헬릭 님이 소원을 안 들어주면 어쩔 계획이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그야…… 여, 열심히 약초를 캐고, 팔아서…… 다음 실험 때는 정말 엄마가 만들었던 약재를 재현해내는 거예요.”
“그리고?”
“그, 그리고…… 그 약재들을 팔아서 다시 진료소를 부흥시킨 다음…….”
두 주먹을 꽉 쥐고 자신의 계획을 열심히 주창하던 아야나의 목소리는 점점 힘을 잃었다.
오래된 치즈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어설픈 계획.
성공률이 낮은 계획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지, 그녀의 눈시울은 붉어진 상태였다.
카이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아이가 믿을 수 있었던 건…….’
저 허술한 계획뿐이었을 것이다.
‘아주 잘못된 항해를 하고 있어.’
항해라는 건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침반도 없이 망망대해를 누비는 배의 최후는 침몰뿐.
카이는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만약 아야나가 독자적인 레시피로 엘프의 비약을 만들어내도 만사형통은 아니야.’
오히려 염소수염은 뛸 듯이 기뻐할 것이다.
만약 그가 아아냐에게 레시피를 알려주면 부모님을 풀어주겠다는 말을 한다면?
과연 그 꿀 같은 말들을 귓가에 속삭이는데 13살짜리 소녀가 버텨낼 수 있을까?
‘못 버텨. 더군다나 부모님을 끔찍이 생각하는 이 녀석이라면 더더욱.’
결국 그녀의 항해에 필요한 것은 나침반이었다.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똑바로 나아갈 수 있게 조율해 주는 존재.
‘그렇다면…… 여기서는 내가 나침반 역할을 좀 해줘야겠군.’
그 결정에 고민이 개입할 여지 따윈 없었다.
투욱, 툭.
잠시 후.
카이는 진료소 입구의 땅에 팻말 하나를 꽂아 넣고 있었다.
“저, 정말로 하시려구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야나는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던졌다.
“한다니까. 이쪽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쿠우욱.
확실하게 팻말을 박아넣은 카이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후우. 이 짓도 정말 오랜만에 해보네.’
그가 지금부터 하려는 건 다름 아닌 신속, 정확, 무료 치료!
프리카 마을에서 했던 것처럼 주민들을 치료해 주는 행위였다.
‘일단 사람부터 좀 모으자고.’
태양교의 사제가 진료를 봐준다고 하면 주민들은 모이게 되어 있다.
그건 프리카에게 이미 검증이 된 사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손님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체 왜……?’
카이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자, 아야나가 괜히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저 때문에 굳이 이렇게까지 해주시는데…… 애초에 이곳은 사람들이 잘 다니는 길목이 아니라서…….”
“사람들이 잘 다니는 길목이 아니다……?”
번쩍 정신이 든 카이는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이런 바보 같은! 이렇게 간단한 사실을 놓치다니!’
카이가 프리카 마을에서 그토록 많은 주민을 손님으로 동원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그의 레벨이나 명성, 스킬 레벨이 높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주거 구역 코앞에 판을 깔았기 때문이었지.’
주민들은 멀리 있는 진료소나 신전에 찾아갈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카이에게로 찾아왔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딱 정반대야.’
염소수염의 진료소는 도시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기에 찾아가기가 훨씬 수월하다.
반면 스마일 진료소의 경우에는 도시 외곽에 위치한 상태!
애초에 이곳을 방문할 목적이 아닌 이상 지나칠 여지가 없는 장소였다.
“이래서는 안 돼…….”
잠시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던 카이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팻말을 쑥 뽑아버렸다.
“아…… 여, 역시 안 되는 거겠죠……?”
솔직한 아야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전부 드러났다.
그녀가 마음속에 담은 작은 희망의 불씨가 꺼지기 직전,
카이는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린 뒤 이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햇살의 따스함.’
정수리를 통해 스며든 신성력이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켜주었다.
“걱정하지 마. 난 포기를 모르는 남자니까.”
“그,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려고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문을 표하는 아야나.
그 모습을 쳐다보던 카이가 씨익 웃으며 자신의 두 주먹을 앞에 내밀었다.
“자, 내 왼 주먹을 부드러운 고급 스테이크로, 오른 주먹을 평범한 닭고기 수프라고 생각해 봐.”
“둘 다 먹고 싶어요!”
“그, 그렇지. 둘 다 맛있겠지? 그런데 만약 아야나가 이 중에서 단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면 뭘 먹을까?”
“그야…….”
아야나가 고민도 하지 않고 카이의 왼손을 덥석 붙잡았다.
“고급 스테이크요!”
“고렇취. 아니 그런데 이럴 수가?! 이 끝내주는 고급 스테이크는 집까지 출장 서비스를 해주는데 닭고기 수프는 레스토랑을 방문해야만 먹을 수 있네? 그렇다면 아야나는 뭘 먹을래?”
“네? 그야…… 더더욱 고급 스테이크요.”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아야나.
이에 카이는 왼손 주먹으로 제 가슴을 툭툭 쳤다.
“내가 바로 그 고급 스테이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