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힐통령 108화
45장. 저주받은 마녀의 진료소(2)
짝!
손뼉을 치며 공기를 반전시킨 카이가 좌판을 정리하곤 진료소로 들어갔다.
“아야나.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고오급 스테이크를 먹고 싶어 하는 손님들의 리스트야. 혹시 도움이 될 만한 자료가 없을까?”
“으음…… 그러니까 지금 필요하신 게 환자들의 리스트라는 거죠?”
“그렇지. 그중에서도 도시의 외곽에 거주하고 있는…… 진료소로 자주 찾아갈 수 없는 환자들의 목록이 필요해.”
“앗, 그거라면 저희 아빠가 관리하시던 게 분명 이쪽에…….”
아야나가 후다닥 달려 들어간 서재에서는 이내 낑낑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도와줄까?”
“아니요! 다 됐어요!”
서재에서 나온 아야나는 두꺼운 책을 산처럼 쌓아 올린 채 뒤뚱뒤뚱 걸어왔다.
자신의 시야를 모두 차단할 정도로 높게 쌓인 책들!
그 엄청난 양에 놀란 카이가 되물었다.
“설마 이게 전부……?”
“네. 한 번이라도 저희 진료소를 방문하셨던 환자분들의 리스트예요. 게다가 가끔씩 엄마랑 아빠가 약을 전해주시러 찾아가던 환자분들의 주소도 자세히 적혀있어요.”
“……그런 일도 하셨구나.”
먼지 덮인 차가운 책에서는 환자를 위하는 부부의 따스한 마음이 느껴졌다.
‘감히 그런 사람들에게 마녀라는 누명을 뒤집어씌워?’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린 카이는 그녀를 칭찬했다.
“잘했다, 아야나. 이 리스트를 분석하기만 하면 부모님들의 누명을 벗기는 데 도움이 될 게 분명해.”
“저, 정말요?”
“그럼. 물론이지. 대신 아야나가 오빠를 좀 도와줘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니?”
“뭐든지 시켜만 주세요! 제 일인걸요!”
반짝이는 눈을 크게 뜬 아야나가 본인의 의지를 피력했다.
“우선 내가 모르는 단어들이 많아. 약초나 약재의 이름들. 그리고 환자의 병명 등을 물어볼 때마다 알려줘.”
“네!”
진료소의 낡은 책상에 두꺼운 책을 쌓아놓은 두 사람은 책을 읽으면서 조사를 시작했다.
‘환자의 수가 굉장히 많군.’
우드득, 우드득.
카이는 목과 허리, 어깨를 돌려 몸을 풀었다.
앞으로 몇 시간 동안 꼼짝없이 앉아있어야 하니 미리 대비를 한 것이다.
“그럼 시작하자고.”
카이의 손이 빠르게 책의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사르륵, 사르륵.
‘정말 꼼꼼하게 정리가 잘 되어 있구나.’
부부가 환자들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모두 써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로 아픈 부분은 어디인지, 무슨 약을 몇 번 처방해 줬는지,
집의 주소는 어디며 습관이 무엇이고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까지!
내용만 따지자면 진료소가 아니라 정보 길드에서나 나올 법한 내용들이다.
“아야나. 이쪽에 적혀있는 민트아시오랑 클라밀레의 효능은 뭐지?”
“민트아시오는 진통제 효과를, 클라밀레는…….”
마치 시험 기간을 맞이한 친구들이 도서관에서 스터디를 하는 듯한 모습!
카이와 아야나는 무려 여덟 시간 동안 집중력을 유지하며 모든 책을 정독했다.
탁.
마지막 책을 덮은 그들의 눈은 퀭해 보였고 그 밑으로는 진한 다크써클이 내려와 있었다.
누가 봐도 엉망인 몰골.
하지만 그들의 입가에는 감출 수 없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내일 아침부터 순회 진료를 하러 다닐 거야. 혹시 준비할 거라도 있어?”
“아, 그게…….”
아야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말을 하고는 싶은데,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습.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줘. 구해줄 수 있는 거라면 모두 구해줄 테니까.”
“야, 약을 좀 만들고 싶은데요. 진료소에 약재가 다 떨어져서…….”
“약재? 그러고 보니…….”
카이는 진료소를 스윽 둘러봤다.
‘처음 진료소를 들어왔을 때도 냄새가 고약했었지.’
카이도 초보자 시절에 진료소를 몇 번 들러본 적이 있었지만, 이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다.
“도, 돈이 없어서…… 약재와 최대한 비슷한 효능을 내는 몬스터의 부산물들을 싼값에 매입해서 약을 만드는 것에 도전해 보고 있었어요.”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자신의 잘못을 밝히는 아야나.
물론 그녀는 두 손을 붕붕 휘저으며 자기 자신을 변호했다.
“그래도 환자분이나 타인에게 먹여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제가 전부 마셔서 확인하고, 버리고 그랬으니까…….”
이야기를 듣던 카이는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잠깐만. 몬스터 부산물들을 이용해서 약을 만들고 있었다고?”
“네에. 몬스터 부산물들도 다양한 효과를 지니고 있으니까 대충 될 것 같았거든요. 계속 실패를 해서 문제지만…….”
그녀가 수줍게 내민 수첩의 겉면에는 손때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대체 얼마나 손에 쥐고 있었으면…….’
그녀의 근성에 가볍게 감탄한 카이의 손가락이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민트아시오를 삼킨 큰 귀 박쥐 포션 LV.1]
5분 동안 모든 스탯 +15만큼 증가합니다.
10분 동안 받는 피해 5% 감소합니다.
30분 동안 실명 상태에 빠집니다.
아야나의 메모 : 실패! 큰 귀 박쥐의 성분이 너무 강력해.
[붉은 에가르의 뿔 포션 LV.1]
10분 동안 공격력이 약간 상승합니다.
10분 동안 공격 속도가 약간 상승합니다.
복용 시 기절 상태에 빠집니다.
아야나의 메모 : 또 실패! 다만…… 불면증에 시달리는 환자에게는 한 번쯤 줘보는 것도?
‘이건……?’
수첩에는 그녀가 구상한 듯한 레시피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이, 이걸 전부 네가 구상한 거라고?”
“네에. 그런데 성공한 게 하나도 없어요.”
“그야 당연하지…….”
카이의 두 눈이 빠르게 실패 요인을 훑었다.
‘이 레시피에는 약재다운 재료가 단 하나도 안 들어갔어. 그런데도 이런 효과를 이끌어냈다고? 이건 실력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만약 그녀가 정상적인 약재들만 사용할 수 있었어도, 훨씬 효과가 좋은 약들을 만들어냈을 것이 분명했다.
“혹시 평소에도 부모님을 도와서 약을 만든 거야?”
“아니요. 엄마랑 아빠는 제가 17살이 되기 전까지는 위험하다고 불 근처에도 못 가게 하셨어요.”
“…….”
한마디로 태생적으로 타고난 천재!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야 부모님 모두 약재사니까 그 피가 어디 가진 않았겠지.’
하지만 이 정도로 놀라운 재능이라니.
카이가 곧장 인벤토리에서 골드 무더기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좋아. 필요한 약재들을 말해 봐. 구할 수 있는 건 전부 사올 테니까.”
“저, 정말요?”
아야나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마치 이번 주말에 놀이동산에 데리고 가주겠다고 선언한 아빠를 바라보는 표정!
그녀는 곧장 새하얀 종이에 자신이 필요한 약재들을 하나씩 적기 시작했다.
‘만약 그녀가 만들어내는 포션들의 효과가 기대 이상이라면…….’
벼랑까지 내몰린 스마일 진료소의 상황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도 있었다.
‘결과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마치 수능 시험의 결과를 기다리는 것처럼 초조하고 애가 타는 시간이 흘러갔다.
***
햇살이 들어오는 이른 아침.
“와, 완성됐어요!”
아야나의 외침에 카이가 슬며시 눈을 떴다.
천천히 열린 입술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어때? 성공이야?”
“헤헤!”
대답 없이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그녀가 조그마한 병 하나를 내밀었다.
녹색의 액체가 가득 들어 있는 병.
“확인해 보세요!”
병을 받아든 카이의 눈앞으로 인터페이스창이 떠올랐다.
[생명이 깃든 민트아시오 농축액 Lv.7]
120분 동안 최대 체력이 상승합니다.
120분 동안 체력 재생 속도가 30% 증가합니다.
생명력 15%가 즉시 회복됩니다.
초급 레벨의 디버프를 모두 제거합니다.
“……!”
그야말로 놀라운 포션의 효과!
카이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완성시켜본 포션이라고?’
카이는 자신의 인벤토리에서 마탑이 만들어준 포션들을 꺼냈다.
[저항력 증가 포션 Lv.3]
5분 동안 각종 상태이상 저항력이 증가합니다.
[속도 증가 포션 Lv.3]
5분 동안 모든 속도가 증가합니다.
[공격력 증가 포션 Lv.3]
5분 동안 공격력과 마법 공격력이 증가합니다.
“……말도 안 되잖아.”
물론 마탑에서 포션을 제작하는 이들보다는, 전문적으로 포션을 제작하는 연금술사나 약재사의 포션이 더 뛰어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초심자, 아니.
처음 만들어본 사람과 이 정도의 격차가 나는 것은 비정상적!
‘아야나에게는 미안하지만, 딱 좋은 시기에 그녀를 만났어.’
그녀의 가족에게 더 큰 불행이 닥치기 전, 그녀를 도와줄 영웅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녀를 도와주면 점수를 따는 것은 물론이고 호감도도 팍팍 상승할 터!
‘나처럼 솔로 플레이를 지향하는 유저는 도핑 약이라도 잘 챙겨 먹어야 해.’
만약 아야나의 실력이 여기서 더욱더 상승한다면?
‘그냥 지금 종신 계약서라도 써버릴…… 아니, 역시 그건 아니겠지.’
가까스로 욕망을 억누른 카이는 그녀를 칭찬했다.
“아주 훌륭해. 부모님이 보신다면 반드시 기뻐할 거야.”
“헤헤헤.”
칭찬을 듣고는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기뻐하는 아야나.
카이는 수십 개의 병에 약을 나눠 담았다.
“내일부터 바로 환자들을 치료할 거야. 밤새 약 만든다고 고생했으니 쉬고 있어.”
“그, 그래도 제 일인데 그런 고생을 혼자 하시면 죄송해서…….”
“어허. 이 은혜는 나중에 천천히, 아주 길고 긴 시간 동안 다 갚으면 되는 것이야.”
그녀를 재운 카이는 진료소를 나서기 전, 블리자드를 소환해냈다.
“크아아?”
“진료소 잘 지키고 있어. 특히 저쪽의 소녀는 털끝만큼도 다치게 해서는 안 돼.”
“크로롱.”
블리자드가 우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엉덩이 뒤에서 살랑거리는 꼬리만 아니었다면, 언노운 그 자체라고 해도 믿을 정도!
‘자, 이제 슬슬 반격을 시작해볼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것을 영주 형제에게 알려줄 시간이었다.
***
[명성이 상승하였습니다.]
[선행 스탯이 1만큼 상승합니다.]
“흐음, 그래도 선행 스탯이 오르긴 오르는구나.”
카이는 지난 이틀 동안 도시의 외곽 부근.
그러니까 빈민가들을 돌아다니면서 그들을 집중적으로 치료했다.
물론 그 이틀 동안 오른 선행 스탯은 고작 두 개!
하지만 애초에 선행 스탯을 보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크흑, 아이의 열이 내렸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제 다리마저 망가지면 가족을 먹여 살릴 수단이 없었는데……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마땅한 보상조차 해드리지 못하는 저희에게 이렇게까지 해주신 분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빈민가의 성자 카이.
지난 이틀간의 순회 치료를 통해 카이가 획득한 별명이었다.
물론 칭호로 인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NPC들이 멋대로 떠는 것뿐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화이트홀의 주점에서도 간간이 카이라는 이름이 흘러나온다는 것이었다.
“자네 그 소문 들었나? 빈민가에 성자가 나타났다는군,”
“성자?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태양교를 믿는 모험가 사제가 빈민가 주민들을 치료하고 다니는데, 신성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손만 댔다 하면 아픈 곳이 싹 낫는다더군.”
“허어, 모험가가 대체 무슨 이득이 있어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예끼 이 사람아. 모험가 사제는 사제 아닌가? 사제가 무슨 이득을 보고 움직이겠나. 당연히 태양신의 교리에 따라 자비를 베푸는 것이지.”
“거 이해할 수는 없지만 대단한 양반이군 그래.”
“자네는 죽어서 지옥 가겠군.”
“닥치고 술이나 주게.”
카이에 대한 소문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퍼져나갔다.
‘이제 밑밥은 충분히 깔아놨어. 슬슬 입질이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그 뒤로 사흘이라는 시간이 더 흐르자 마침내 카이가 기다리던 손님이 그를 방문했다.
“카이 신관님? 영주님께서 카이 님을 저녁 식사에 초청하셨습니다. 부디 거절치 말아주시기를.”
“거절이라뇨? 그럴 리가요. 오히려 영광입니다.”
카이가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