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109화 (109/441)

# 109

힐통령 109화

109화. 저주받은 마녀의 진료소(3)

같은 남작가의 저택이지만, 화이트홀 영주의 저택은 아르센 남작의 것보다 훨씬 화려했다.

게다가 길다란 식탁을 가득 채운 음식들의 가짓수를 세는 건 힘이 들 정도!

“자네인가? 최근 빈민가의 성자라고 불리는 것이.”

동생이 염소라면 형은 돼지처럼 생겼다.

사람의 목살이 다섯 겹으로 접힐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 카이가 빙긋 웃었다.

“과분하게도 그리 불리고 있지요.”

“크흠. 내 오늘 자네를 부른 건 별다른 용무가 있어서는 아니고…….”

용무 있다는 소리다.

별 이유도 없는데 바쁜 사람을 왜 부르겠는가.

카이는 느긋하게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스마일 진료소와 어떤 관계냐, 뭐 대충 그런 걸 캐묻겠지.’

“자네와 스마일 진료소가 어떤 관계인지 궁금해서 말일세. 치료 활동을 할 때 그 진료소의 이름을 내세우고 있다고 들었네.”

‘빙고.’

카이의 예상을 손톱만큼도 벗어나지 못하는 돼지 영주!

당연히 이에 대한 답안도 준비해 둔 상태였다.

“별다른 관계는 없습니다. 우연히 방문한 곳인데,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소녀가 있어서 조그마한 도움을 주고 있는 중이지요.”

“흐음.”

안 그래도 작은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 카이의 표정을 살피던 영주가 말을 이었다.

“혹시 명성을 추구하는 거라면 이런 시골 도시보다는 더 큰 곳으로 가는 것이 나을 텐데.”

“태양신께서는 자비와 베품, 친절을 추구하되 명성을 경계하란 말을 하셨습니다. 게다가 눈에 안 보였다면 모를까, 저리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제된 몸으로 어찌 이를 지나치겠습니까.”

“고통? 아아. 며칠 전부터 유행한다던 그 병을 말하는 건가.”

돼지 영주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스테이크를 썰면서 중얼거렸다.

자신의 영지민들이 고통스러워함에도 불구하고 하등 신경을 안 쓰는 듯한 태도.

“영주님께서는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저리 고통받고 있습니다만.”

“그들은 세금도 적게 내는 빈민가의 주민들 아닌가. 죄다 더러운 몰골을 하고 다니니 병도 생기고 그러는 거니 씻고 다니라고 하게. 가만, 그런데 이것들이 제법 오랫동안 아픈 것 같은데 혹시 전염병은 아니겠지? 맞다면 이것들을 싹 다 도시에서 내쫓아야 할 텐데…….”

말문이 막힌 카이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드러내며 물었다.

“……곧 겨울이 다가옵니다. 지금 쫓겨나면 저들은 대체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그걸 왜 나에게 묻나? 세상에 태어났으면 몸 뉘일 자리 정도는 스스로 찾아야 하는 법일세.”

돼지 영주는 자신의 말이 제법 멋지다고 생각했는지, 흐뭇하게 웃으며 크게 썬 스테이크를 입 안에 틀어넣고 우물거렸다.

“저렇게 쳐먹으니 살이 찌지…….”

“지금 뭐라고 했나?”

“아니요,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만.”

능청스레 고개를 저은 카이는 품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돼지 영주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거, 식사하는 자리에서 밥맛 떨어지게…… 이건 또 뭔가?”

“한 번 읽어보시지요.”

의심스런 눈초리를 띄우며 종이를 낚아챈 영주는 내용을 단숨에 읽어내렸다.

종이의 내용을 모두 읽은 그는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를 흔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이지?”

“쓰여 있는 그대로입니다. 제가 영주님에게 드리는 제안서이지요.”

“제안이라고? 하! 내가 보기엔 천 골드를 뜯어내려는 수작질로밖에 안 보인다만?”

“뭔가 잘못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거기 제안서의 내용대로 이행해도 저에겐 한 푼도 안 떨어집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럼 병에 걸린 주민들을 치료하고 병이 퍼지는 걸 예방하는 비용이 1천 골드나 된다는 소리인가?”

그가 역정 내는 것을 가만히 듣던 카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화이트홀의 주민은 30,000명이나 됩니다. 그들 중 병에 걸린 빈민가의 이들만 무려 8,000명이지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들 모두에게 성수를 먹이고 땅을 정화시키는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선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아시겠죠?”

“내가 산수도 못하는 사람처럼 보이나? 성수의 가격은 병당 1골드이니 3만 골드고 땅을 정화하는 데에는 비용이 더 들어가겠지. 하지만 자네의 계산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네.”

“그게 뭡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돈을 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지!”

“…….”

어떻게 저런 쓰레기 같은 말을 세상에서 가장 떳떳하다는 표정으로 지껄일 수 있는지!

카이는 진심으로 당황해서 입만 멍하니 벌렸다.

그 모습을 바라본 돼지 영주는 자신이 크게 한 방 먹였다고 생각했는지 턱살을 푸들거리며 웃었다.

“푸흐흐흐. 멍청한 얼굴 좀 보게. 이래서 모험가들은 안 된다는 것이네. 탁상공론에만 능하지 않나.”

“……절 위해서도 아니고, 영주님과 영주님 도시의 주민들을 위한 돈입니다.”

“걱정해 줘서 고맙네만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네. 자네는 신경 쓸 필요 없어.”

손을 휘휘 저어 보인 채 다시 식사를 시작하는 돼지 영주!

카이는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꾹 억누르며 그를 설득했다.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치료비용을 천 골드까지 줄여드리겠습니다.”

“단순 계산만으로도 주민들에게 성수를 먹이고 땅을 정화하는데 5만 골드 정도가 들어가네. 그걸 천 골드에 해주겠다? 날 너무 쉽게 보는군.”

자신의 생각을 확고히 다진 영주는 시종일관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러면 곤란한데…….’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카이는 식당 내부를 빠르게 관찰했다.

‘벽에 걸려 있는 화려한 검과 조각품, 그리고 그림들…… 사치를 무척 좋아하는 인간.’

카이는 친근한 형제 스킬을 사용해야 할지 말지를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그의 고개는 좌우로 흔들렸다.

‘여기서 이걸 사용하면 안 돼.’

친근한 형제는 NPC의 호감도를 절대적으로 50만큼 상승시켜주는 엄청난 효과를 지닌 스킬!

하지만 한 번의 대상에게 한 번 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이 수는 조금 아껴야 해.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이용해야…….’

카이의 머리가 평소보다 두 배, 세 배 가까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엿 먹이고 싶을 때만큼은 압도적인 성능을 자랑하는 두뇌!

잠깐의 고민을 끝낸 카이가 슬며시 식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만약 영주님이 주민들의 치료에 천 골드만 지원해 주신다면, 영지민들의 칭송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거리를 울릴 것입니다. 그 소식은 어쩌면 국왕 폐하의 귀에까지 들어갈지도 모르지요.”

“국왕 폐하라고? 아니, 이런 사소한 일이 어떻게 폐하의 귀에까지…….”

“후우……. 사실 이건 말씀드리면 안 되는 건데…… 어쩔 수 없군요.”

순식간에 수척한 표정을 지은 카이의 입술 사이로 근심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 지금 화이트홀을 뒤덮은 병은 일반적인 병마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혹시 최근 하비에르 왕국의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그야…….”

영주가 눈을 껌뻑거리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무래도 나의 영지가 국경 지대 근처에 있다 보니, 상인들의 입을 통해 들리는 소문이 없지는 않지. 그쪽 지역은 지금 초상이 났다고 들었네만?”

“예. 그 이유는 바로 병마 때문이지요. 온몸에 푸른 반점이 돋아나고 일주일 안에 사망하는 끔찍한 전염병입니다.”

“……설마?”

돼지 영주의 눈알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맞습니다. 왜 저에게 이런 조그마한 도시에서 치료를 하고 다니냐고 물으셨지요? 저는 태양교에서 모종의 임무를 맡고 파견된 사제입니다.”

“모종의 임무라면…….”

“하비에르 왕국을 휩쓸었던 그 병이 화이트홀 쪽으로 번질지도 모른다는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콰앙!

식탁을 강하게 내려친 돼지 영주의 푸짐한 족발 한 쌍이 부르르 떨렸다.

“하, 하비에르에서 유행했던 병이 왜 이곳 화이트홀로 온단 말인가?”

“글쎄요. 저도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현재 환자들이 호소하는 증상은 그것과 똑같습니다.”

“으으…….”

자신의 영지에 전염병이 불어닥칠지도 모른다는 공포!

돼지 영주가 땀을 폭포수처럼 흘리기 시작했다.

“왜 그리 불안해하십니까?”

“자네라면 안 불안하겠나! 내 영지에 전염병이 퍼질지도 모른다는데!”

“그래서 제가 왔지 않습니까.”

카이는 마치 이것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싱긋 웃어보였다.

“천 골드에 그 고민을 싹 지워준다는 소리입니다. 아시겠지만 이렇게 싼 값에 해드리는 이유는, 태양교에서 어느 정도의 대금을 지원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 오오…… 헬릭이시여…….”

돼지 영주는 황급히 두 손을 부여잡으며 태양신을 찾았다.

“이 사안은 국왕 폐하께서도 관심 있게 다루고 계십니다. 그런데 만약 영주님께서 저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 도시의 병마를 깨끗하게 몰아내신다면?”

“모, 몰아낸다면?”

씨익.

카이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승작도 노려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스, 승작……!”

승작이라는 단어에 흥분한 돼지 영주가 콧구멍을 벌름벌름 거렸다.

그 안으로 만 원권 지폐 몇 장을 찔러놓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누른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하비에르 왕국조차 대응이 늦어 병을 사전에 차단하지 못했는데, 그걸 일개 도시인 화이트홀에서 자체적으로 해낸다? 국왕님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 그걸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화이트홀의 영주인 내가 잘났다고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짝! 카이가 박수를 쳤다.

“역시 똑똑하십니다. 영주님의 명석한 두뇌와 예리한 판단력, 그리고 검날처럼 신속한 실행력과 카리스마가 이를 해냈다고 믿겠지요.”

“흐으음…….”

그제야 눈알을 굴리며 계산기를 두드리는 돼지 영주!

카이는 그가 고민할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자,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모든 일이 끝난 뒤. 영주님은 폐하의 호출을 받고 수도로 상경하시는 겁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채 영주님의 이름을 연호하는 수도의 시민들, 해를 가릴 정도로 하늘을 뒤덮은 꽃다발들. 심지어 거리의 악사들은 영주님의 위업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겠지요. 그 행렬을 지나쳐 폐하에게 당도하면 그 분께서는 영주님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속삭이실 겁니다.”

툭툭.

카이는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부로 그대를 백작의 위(位)에 봉하노라.”

“배, 백작?!”

돼지 영주의 입이 당장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크게 벌어졌다.

“그, 그렇게 큰 건 바라지도 않네! 자작으로만 승작되어도 만족이야. 암, 만족이지!”

이미 승작은 기정사실화라도 된 것처럼, 그의 커다란 얼굴이 희열로 가득 찼다.

동시에 카이의 눈앞으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띠링!

[화려한 언변으로 화이트홀의 영주, 피기니아 티번을 훌륭하게 요리하셨습니다.]

[당신의 말솜씨는 타인을 유혹하는 재주를 지니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듣고싶은 말만 하는 건 그저 아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기분 좋게 만들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끌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화술이 추구하는 궁극의 경지입니다.]

[화술 스킬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화술 스킬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화술 스킬의 레벨이 초급 3레벨이 되었습니다.]

[이제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기분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웃는 낯으로 메시지 창을 빠르게 훑은 카이의 입에서 칭찬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카이는 그 날 처음 알 수 있었다.

“화이트홀 영주의 과거사는 파도 파도 미담만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직접 뵈니 그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아 기쁘군요.”

“거 사람 참, 사제라 그런지 맞는 말만 하고 사는군! 그렇게 살면 피곤하지 않나? 으허허!”

칭찬은 고래뿐만이 아니라, 돼지도 춤추게 만든다는 것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