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힐통령 110화
46장. 푸른 역병의 아오사(1)
[1,000 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협상 스킬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협상 스킬이 초급 4레벨이 되었습니다.]
인벤토리로 들어온 대금은 카이의 입가에 미소를 그려냈다.
물론 돼지 영주는 단단히 경고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혹시라도 도망갈 생각은 말게. 내가 자네에게 선금을 주는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물론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있었던 모든 일은 무덤까지 가져갈 것이며, 이 사건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영주님이 기획하신 일이 될 겁니다.”
“크흐흐, 좋군. 그럼 살펴 가게나.”
저택을 나온 카이가 슬쩍 뒤를 쳐다봤다.
만약 자신이 NPC였다면 모든 일이 끝나고 반드시 살해를 당했을 것이다.
‘이 세상에 비밀을 없애는 방법은 비밀을 알고 있는 자들을 죽이는 방법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에게는 불행하게도 카이는 계속해서 부활하는 모험가!
‘그래서 선금을 준 거겠지. 아예 당근을 줘서 배신할 생각을 못하게 하려고.’
물론 계약이 성립된 자리에서 바로 천 골드를 건네줄 것이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어지간히 해먹은 돈이 많나 봐.’
천 골드는 한화로 무려 1억이나 되는 큰돈이다.
하지만 성수를 산다면 고작 천 병밖에 살 수 없는 애매한 돈!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가 이 정도 금액을 받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성수? 굳이 그걸 살 필요는 없지. 나에겐 아야나의 약이 있으니까.’
근거 없는 믿음이 아니었다.
실제로 지난 일주일 간 카이는 빈민가들을 돌면서 아야나의 약을 사용해 봤기 때문이다.
‘아이템 감정을 통해 증명이 끝난 약들이었지만, 확신이 필요했었어.’
그녀의 약이 아오사의 영향을 받아 전염병에 걸린 이들을 치료할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결국 일주일 동안 환자들을 치료한 카이는 마침내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아야나의 약은 통해. 일주일간 지켜봤지만 재발율도 0%야.’
그녀의 타고난 재능이 불러온 축복!
그것이 카이가 거리낌 없이 돼지 영주에게서 돈을 뜯어온 이유였다.
‘천 골드가 뭐야? 아야나의 약에 들어가는 재료비는 병당 3실버밖에 안 해.’
단순 계산으로 따져도 약을 3만 3천 병이나 만들 수 있는 액수!
하지만 카이는 그 정도 양의 약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푸른 반점이 떠오르는 걸 발견하는 즉시 아오사를 잡으러 가면 돼.’
녀석이 뿌리고 다니는 역병은 스스로의 부산물이나 다름없었다.
즉, 아오사를 처치하면 환자들이 앓던 병도 사라진다는 뜻!
‘말 몇 마디 하고 1억이라…… 괜찮은 거래였어.’
돼지 영주는 이번 거래를 크게 만족했지만, 카이만큼은 아닐 것이다.
“자, 그럼 아오사가 언제쯤 오려나…….”
스마일 진료소로 되돌아가는 카이의 발걸음은 유례없이 가벼워 보였다.
***
딸깍.
“이 정도면 되었나.”
아야나가 만든 특제 정화 포션을 작은 병에 담은 카이는 그것을 진열대에 꽂아 넣었다.
그는 오늘 오전에 사놓았던 아이스크림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수고했어. 이 정도면 나 없이도 마을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겠네.”
“그,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어디가시면 안 돼요…….”
칭찬을 받아 부끄럽다는 감정과 카이가 어디론가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감정.
그리고 한입 떠먹은 아이스크림이 끝내준다는 감정이 혼합된 복잡한 기분!
그녀가 간식을 먹는 걸 지켜보던 카이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제 빈민가 주민들도 절반 정도는 치료한 건가.’
영주와의 거래 이후로 사흘이 더 지났다.
한마디로 처음 치료를 하던 때부터 꼬박 열흘이라는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카이와 아야나가 치료한 빈민가 주민들의 숫자는 무려 4천 명 이상!
하루에 최소 400명 이상씩 치료를 한 꼴이었다.
‘오랜만에 예전 생각도 나고 좋네.’
어렸을 적 기름이 바다에 유출되던 사건이라던지, 홍수로 인해 집이 사라져 버린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자주 봉사를 갔던 카이.
그때도 몸은 고되고 시간은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지만, 그곳에 간 걸 후회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
당장은 힘들지라도 훗날의 어느 때인가 지금을 떠올리면 이 또한 추억이 될 터였다.
누군가의 강요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행이기 때문이다.
“으으음.”
찌뿌둥한 몸을 스트레칭으로 풀어버린 카이는 아야나가 간식을 먹고 꾸벅꾸벅 졸자,
아이스크림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그녀를 침대에 데려가 눕혔다.
“자고 있어.”
“어, 어디가시면…….”
“안 가니까 걱정하지 말고.”
“네에…… 그럼 30분만…… 잘게요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방 안은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로 가득 찼다.
카이는 그녀의 목 부근까지 이불을 덮어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모님도 조만간 만나게 해주마.’
한국에서의 열세 살이라면 초등학교 5학년일 나이다.
요즘 아이들이 성숙하기에 알 건 모두 안다고 하지만, 여전히 보호자의 손길이 필요한 시기.
그녀와 부모님의 재회를 하루라도 빨리 앞당기고 싶은 카이는 그녀의 방을 나섰다.
“크르륵.”
그때, 복도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블리자드가 대뜸 으르렁거리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야?”
처음보는 블리자드의 모습에 덩달아 심각해진 카이가 되물었다.
하지만 블리자드는 그런 카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북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연신 몸을 움찔거렸다.
‘블리자드가…… 겁을 먹었다고?’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은 카이가 눈을 깜빡였다.
블리자드는 비록 자신에게 패배하여 펫이 되었다지만, 일족 최고의 전사였던 그 기질이 어디가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는 언제나 사냥감을 추구했고, 전투를 즐겼으며, 강자를 찾아다녔다.
‘그런 블리자드를 압박할 수 있는 존재라면…… 설마?’
정신이 번쩍 든 카이가 빠르게 진료소를 달려 나갔다.
타다다닥.
사제의 움직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시내에 도착한 그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어엇! 주, 중독됐어! 사제! 어디 사제 없어?!”
“푸른 역병이라고? 이게 무슨 미친 도트 데미지…….”
“성수 삽니다! 빨리 사요!”
“끄으윽…….”
“커헉, 쿠허억…….”
푸른색의 운무가 넓게 퍼져 있는 길거리는 이미 죽음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중이었다.
‘확인, 우선은 확인이 먼저야.’
주위를 휙휙 둘러보던 카이는 재빨리 기절한 남자의 소매를 걷어붙였다.
동시에 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푸른 반점이다.”
그것은 푸른 역병의 아오사가 나타났음을 알려주는 확실한 증거!
‘하지만 대체 어디서? 어떻게?’
카이의 머릿속이 복잡한 실타래처럼 엉켜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느긋하게 진료를 하고 있다보면 아오사가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라는 타르달의 설명과 현실은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젠장…… 내가 너무 안일했나?’
카이가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은 것이 첫 번째 실수였다.
타르달도 아오사를 실제로 본 적은 없다.
모든 건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과 하비에르에서 발견된 아오사의 흔적을 읽었을 뿐이라는 걸 감안했어야 했다.
‘한 마디로 지금 이 상황은 타르달조차 상정하지 못한 거야.’
아오사가 퍼트리는 역병의 진행 속도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푸른 반점이 돋아날 때부터 일주일이라고? 절대 아니다.’
역사서에 기록된 아오사의 능력은 그랬을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아오사는 그 때보다 훨씬 강력해지고, 지독해져서 돌아왔다.
뮬딘 교가 제대로 칼을 갈았다는 것이 저릿저릿하게 느껴질 정도!
도시를 뒤덮은 푸른색 운무는 NPC와 모험가를 가리지 않았다.
그건 카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푸른 역병에 중독당했습니다.]
[생명력이 초당 1,000씩 감소합니다.]
[스킬의 효과가 20% 감소합니다.]
[움직임이 15% 느려집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스킬이!'
그야말로 치명적인 푸른 역병의 효과!
하지만 카이에게는 햇살의 따스함이 있었기에 중독되는 즉시 해독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전혀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이 사달을 끝내려면 결국 아오사를 처치해야 돼.’
카이의 고개가 한 쪽으로 휙 돌아갔다.
푸른색 운무가 가장 짙은 곳.
만월의 월광조차 스며들지 못하는, 도시에서 가장 어두운 장소.
‘광장이다.’
그곳에 놈이 있다!
주변을 휙휙 돌아보던 카이가 근처의 뒷골목으로 달려들어 갔다.
***
콰드드드드득!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거리를 가득 채웠다.
뼈나 방어구 따위가 무너지는 가벼운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훨씬 더 육중한 무언가, 마치 건물이라도 무너지는 듯한 소리.
“쓰러진다!”
“피해!”
콰아아아아앙!
실제로 3층짜리 저택 하나가 그대로 쓸려나가자 플레이어들은 기겁을 하며 잔해들을 피했다.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피어오르는 먼지를 걷어낸 그들의 눈가에는 절망과 분노가 어려 있었다.
“이런 젠장! 엿 같은 페가수스 녀석들!”
“저거 대체 뭔데? 혹시 오늘 무슨 이벤트 공지라도 있었어?”
“이벤트 공지는 개뿔!”
“그럼 저 녀석은 대체 뭔데? 왜 세이프존인 도시를 공격하는 거냐고?”
“여관방에서 자다가 꿈나라 대신 황천 갈 뻔했네.”
마치 지방 방송이 켜지듯, 여기저기서 욕설과 투정이 질서 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 자리에서 숨을 쉴 수 있고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바로 높은 마법 저항력과 레벨을 지닌 플레이어라는 뜻!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도 눈앞의 대상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방도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 새끼를 뭐 어떻게 잡으라고?’
‘내 검이 안 통해. 아니, 데미지가 들어가긴 하는데…… 최소 60% 정도 경감되는 것 같아.’
‘물리 데미지 감소인 주제에 마법 데미지 감소도 있어? 대체 어떻게 잡으라는 거야?’
‘혹시 다 같이 손잡고 기도라도 해야 되나? 그럼 우주의 기운이 도와주려나?’
난공불락(難攻不落).
항상 정복자의 입장에 서 있던 모험가들은, 정복을 장담할 수 없는 존재를 마주치자 슬금슬금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이건…….”
“불가능하겠지?”
“물러서는 편이 나아.”
“레벨 다운, 스킬 레벨 다운, 아이템 드랍. 엿 같은 삼위일체를 겪고 싶지 않다면 튀어야지.”
그 자리에 서있던 플레이어 40여 명의 생각이 일치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들의 의사 따위가 아니었다.
화아아아악!
“또 온다!”
“숙여! 아니, 피해!”
“저 빌어먹을 끈끈이!”
수십 갈래로 나뉘어진 검푸른색의 촉수가 마치 채찍처럼 그들에게 날아들었다.
플레이어들은 각자의 스타일대로 움직이며 공격을 막아내거나, 몸을 던져 그것을 피해냈다.
[…….]
공격을 행한 존재는 두려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이들을 조용히 내려다봤다.
자신의 공격 한 번에 개미 떼처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꼴사납게 움직이는 하등한 모습들.
[뮬딘 님의…… 말씀을…….]
녀석이 천천히 자신의 두 다리를 앞으로 옮겼다.
그때마다 녀석의 몸에서 무언가가 툭툭 떨어졌다.
끈적끈적.
젤리처럼 물컹한 슬라임이 사람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 슬라임보다는 조금 더 액체에 가까운 존재였다.
마치 비가 온 다음 날의 진흙처럼 자신의 몸을 뚝뚝 흘려대는 칠칠맞은 존재.
[푸른 역병의 아오사. LV. 175]
녀석이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동시에 바닥에 누워있던 수십 갈래의 촉수는 바닷속의 미역처럼 나풀거리기 시작했다.
[성전을…… 준비하라.]
화악!
아오사의 오른손이 전방을 가리키자, 촉수들은 일제히 회전하며 뾰족한 창의 형상을 취했다.
“어?”
“응?”
“엥?”
하지만 그것을 쳐다보는 플레이어들은 피할 생각은커녕, 오히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촉수들의 창…… 아니, 그보다 한참 위에 위치한 검은색의 존재였다.
“……저거 뭐냐?”
“별똥별……이라기에는 색상이 많이 까맣고.”
“가만, 저거 사람 아니야?”
“뭐지? 저 갑옷 되게 낯익고 친근한데…… 마치 명절날 친가에 방문한 느낌이야.”
“되도않는 비유 집어치우고, 저거 언노운 아니냐?”
“어!? 마, 맞는 것 같기도?”
모험가들의 호들갑에 아오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아오사가 몸을 움찔거렸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마치 다이빙 선수가 스프링보드를 박차고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아래로 떨어지듯,
허공에서 벼락처럼 떨어진 두 자루의 곡도는 아오사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촤아아아아악!
바닥을 미끄러지며 아오사와의 거리를 벌린 그는 천천히 일어났다.
“크르륵.”
언노운(?)이 으르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