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힐통령 118화
47장. 권선징악(4)
알현실을 나온 카이를 기다리는 인물이 있었다.
다름 아닌 그를 이곳까지 데려온 금발의 미청년.
제복 차림의 옷을 갑옷으로 바꾼 그는 투구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아직 성함도 모르네요.”
“바체. 바체 댄 블랙이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바체 님, 그 차림은……?”
“폐하에게 듣지 못했나?”
바체의 질문에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듣다니요……?”
“기사를 지원해 줄 테니 직접 화이트홀의 영주에게 심판을 내리라고 명하셨을 텐데?”
“예, 그야 그렇지만…….”
말끝을 흐린 카이는 주변을 스윽 둘러보더니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지원해 준다는 기사가 하나뿐이라고? 화이트홀의 기사와 병사의 수가 그리 적지는 않은데…….’
화이트홀이 시골이라고 너무 무시하는 게 아닐까?
카이의 얼굴 위로 걱정이 떠올랐지만, 바체는 이를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출발하지.”
“예에…….”
올 때도 그랬지만, 갈 때도 마찬가지.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자 곧장 화이트홀의 시가지로 이동되었다.
“바체 님.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상한 걸 묻는군. 영주의 저택으로 가서 그의 책임을 묻는다.”
“…….”
계획의 중요성을 전혀 모르는 듯한 태도!
카이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를 설득했다.
“하지만 바체 님. 저희는 고작 두 명이고, 저쪽은 기사들만 수십 명일 겁니다. 아무리 대의가 이쪽에 있다지만 인원수에서 너무 불리…….”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바체는 카이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오사를 혼자서 잡은 녀석이 인원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것인가?”
“하지만 아오사와 기사들은 다르지 않습니까.”
“뭐가 다르지?”
“그야…… 레벨부터 차이가 나죠? 실례지만 기사들의 레벨은 최소 100 이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것도 아카데미를 갓 수료한 신병의 경우가 레벨 100 이상이다.
당연히 기사 생활을 하면 할수록 기사들의 레벨은 더더욱 높아져 간다.
‘화이트홀은 국경에 가까운 만큼 산이 많은 곳이야. 당연히 몬스터들의 침공도 잦았겠지.’
그 말은 일 년 열두 달 사냥할 조건이 마련되어 있다는 뜻!
자연스럽게 영지 기사들의 레벨도 높아졌을 것이다.
“요컨대…… 내 실력을 의심하고 있다는 소리로군.”
바체의 서늘한 눈빛에 카이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아,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아니라면 잠자코 따라와라.”
반론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차가운 말투와 함께, 바체는 영주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건가?’
불안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 카이가 영주의 저택 앞에 도착했을 때, 병사 두 명이 그들을 제지했다.
“그쪽의 치료사님은 저번에 봐서 알겠는데…… 그쪽은 누구지?”
“장비만 보면 무슨 전쟁터로 향하는 사람 같군.”
대번에 경계심을 피어올리는 병사들.
바체는 특유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비키면 다칠 것이다.”
“……?”
병사들이 그의 말뜻을 헤아리기도 전에, 바체의 검집이 번개를 흩뿌렸다.
“어어어!”
“거, 검을 뽑았다!”
병사들은 번개처럼 휘둘러진 바체의 검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다만 그가 검을 검집에 넣는 장면을 보고, 검을 뽑았다고 유추할 뿐.
“바, 바체 님, 다짜고짜 공격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국왕 폐하께서는 대화를 나누라고 나를 보내지 않으셨다. 실력을 행사하라 하셨지.”
짤막한 대꾸를 남긴 바체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병사들은 창을 뻗어 그를 제지하고 싶었지만, 그의 서늘한 눈빛을 마주보자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우, 우리의 상대가 아니다.’
‘창을 휘두르면 반드시 죽는다.’
바체는 꽁꽁 얼어버린 병사들을 지나쳐, 2미터 높이의 담벼락을 스윽 밀었다.
그러자 뒤로 넘어가는 담벼락.
이를 목격한 카이는 입을 쩌억 벌리며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설마 아까 검을 뽑았던 이유가?’
담벼락을 이렇게 두부처럼 깔끔하게 잘라낼 줄이야!
“무슨 일이냐!”
“정문 쪽에서 굉음이 울렸다!”
“집합하라!”
담벼락이 무너지는 소리에 기사들이 순식간에 정원으로 몰려들었다.
잠시 그들의 수를 헤아리던 바체가 중얼거렸다.
“서른둘.”
“많네요.”
카이가 한숨을 내쉬고 있자, 저 멀리서 돼지 영주가 씩씩 거리며 다가왔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짓……!”
“죄인, 피기니아 티번은 들어라.”
바체의 근엄한 목소리가 피기니아의 말을 끊으며 정원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반드시 들어야만 할 것 같은 그 매혹적인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바체에게 향했다.
“베오르크 폰 라시온 폐하의 명이다. 지금 이 시간 부로 피기니아 티번을 라시온의 남작 위에서 폐(廢)한다. 죄인과 그 가족 모두는 감옥에 수감될 것이며, 여태 쌓아올린 모든 부덕한 재산은 국고로 귀속시킨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돼지 영주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네, 네놈이 뭔데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냐!”
황급히 바체의 가슴팍을 쳐다본 돼지 영주는 그를 삿대질했다.
“이 새끼, 국왕 폐하의 명을 받았다는 녀석이 가슴팍에 라시온의 인장도 없느냐? 뭣들 하느냐! 저 사기꾼을 내 앞에 무릎 꿇려라!”
바체의 선언에 당황하던 기사들이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실제로 바체의 가슴에는 아무런 인장도 없었기 때문이다.
“뭐야, 그럼 결국 폐하의 명이라는 것도…….”
“모두 거짓이란 말이군.”
“허언증 환자였군.”
“입을 함부로 놀린 대가를 치르게 해야겠어.”
기사들은 분노한 표정으로 검을 뽑으며 각자의 스킬을 사용했다.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검들을 가만히 쳐다보던 바체가 카이를 향해 담담히 말했다.
“자네는 아까 나의 수준을 의심했었지?”
“제, 제가 그랬나요? 아니, 그것보다는 지금 날아오는 검들부터 걱정하셔야…….”
카이가 어색한 미소를 띠며 앞을 가리키자, 바체가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폐하의 명이다. 나의 검을 똑똑히 보아라. 두 번 이상 휘둘러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바체의 손이 천천히 손잡이를 향했다.
마침내 그의 손이 손잡이를 덮은 순간, 검집에 봉인되어 있던 번개가 일대를 찢어발겼다.
“……어?”
휘둘러지는 검을 보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검의 궤적은 부드러웠다.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검술의 달인이 휘두른 아득한 경지의 검술을 목도했습니다.]
[하지만 검술의 경지가 낮아, 그 검에 담긴 뜻과 묘리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술에 대한 이해도가 한층 더 높아졌습니다.]
[여명의 검법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여명의 검법이 중급 5레벨이 되었습니다.]
“어어…….”
카이의 입에서 멍청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걸 나무랄 만한 사람은 그 자리에 없었다.
“어, 어어어…….”
오직 돼지 영주, 피기니아만이 카이와 같이 멍청한 소리를 흘리며 온몸을 덜덜 떨어댔다.
그는 일검에 자신의 모든 기사들을 눕힌 바체를 괴물 보듯 바라봤다.
“네, 네놈은 대체 누, 누구냐?”
스릉.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바체는 돼지 영주에게 천천히 걸어가며 말했다.
“바체 댄 블랙. 철혈 기사단장.”
“처, 철혈 기사단의…… 단장? 히이이익!”
철혈과 수호.
라시온의 왕실에 존재하는 단 두 개의 기사단!
바체는 그중 하나를 이끌고 있는 검술의 달인이었다.
***
머엉.
카이는 화이트홀의 영주와 그 식솔들이 줄줄이 연행되는 장면을 보며 입을 헤 벌렸다.
‘그렇게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있던 돼지 영주가…… 진짜 돼지처럼 끌려가고 있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패배자의 몰골을 하곤 뒤뚱뒤뚱 걸어간다.
카이는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역시 힘이 필요해.’
현재 그가 지닌 힘도 충분히 강력하다.
비록 레벨은 낮지만, 선행 스탯으로 쌓인 무지막지한 스탯과 온갖 스페셜 칭호들, 마지막으로 신화 등급의 직업으로 인해 가히 200레벨 유저들과도 자웅을 겨뤄볼 정도였다.
‘하지만 부족해.’
카이는 멀리서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바체를 슬쩍 쳐다봤다.
만약 자신에게 바체처럼 모든 것을 무릎 꿇릴 수 있는 강대한 힘이 있다면?
‘……더 많은 잘못을, 더 큰 부정을 바로 잡을 수 있어.’
목표가 세워졌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함을 갖추자.
‘그 힘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돕자.’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개인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기업과 국가에 맞설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건 게임이야.’
플레이어가 무엇을 추구하던 그것은 본인의 자유일 뿐이다.
‘내가 바라는 건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야.’
무슨 지상의 낙원 같은 걸 건설하겠다는 오만한 생각 따위는 없다.
그저 자신의 눈에 들어온 잘못된 부분들을 조금씩 고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이 전부.
“어, 엄마! 아빠!”
카이는 고개를 돌려 한 가정이 재회하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두 달 가까이 보지 못했던 제 엄마와 아빠의 품에 안겨, 펑펑 눈물을 흘리는 아야나의 모습.
그녀의 부모님도 제 딸을 끌어안으며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우리 딸, 그동안 잘 지냈지?”
“밥도 꼬박꼬박 잘 챙겨 먹었고?”
“으, 응! 밥도 잘 먹고…… 공부도…… 흐윽, 열심히 하고…… 문단속도…… 제대로 했어요!”
“착하다. 엄마는 우리 딸이 너무 자랑스러워.”
“고맙다. 혼자 무사히 잘 지내줘서 정말 고마워.”
고작 열세 살짜리 딸아이를 혼자 버려둔 채, 감옥에 갇힌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미어졌겠지. 하루에 수십 번도 더 생각났을 거야.’
카이는 눈시울을 붉히며 코를 씰룩거렸다.
그 때, 수갑에 묶인 채 연행되던 돼지 영주가 카이의 앞을 지나치며 이를 갈았다.
“네, 네놈! 승작이 어쩌고 하면서 듣기 좋은 소리를 할 때 알아챘어야 하거늘!”
“……이봐, 꿀꿀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카이는 자신의 감동적인 기분을 순식간에 지워버린 돼지 영주를 차갑게 노려봤다.
“생각이 있으면 주변을 둘러봐라.”
“그게 무슨…….”
돼지 영주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와 식솔들이 연행되자, 영지민들이 모두 거리로 나와 웃고 떠들며 서로를 껴안는다.
제 잇속만 챙기기 바쁜 악덕 영주가 부과한 막대한 세금과, 신경도 쓰지 않던 치안에 고통받던 주민들은 국왕의 이름을 연신 연호하며 이 상황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말이 있다. 평소 아랫사람이라고 해도 저들을 조금만 더 생각해 주고 배려해 줬다면, 저들 중 슬퍼하는 이가 한 명쯤은 있었을지도 모르지.”
“이이익…….”
카이는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얼굴만 붉게 물들인 돼지 영주에게 다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네가 준 1,000골드는 내가 잘 쓸게.”
“뭐, 뭐? 그건 분명 치료비로 다 썼을 텐데…… 실제로 주민들의 병도 모두 치료가 되었…….”
“23골드.”
“……?”
“23골드 정도 썼다고. 주민들 치료하는 데.”
카이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돼지 영주가 입에 게거품을 물며 뒤로 쓰러지려고 했다.
“이, 이 도, 도둑놈의 새끼……!”
“아, 어디서 돼지가 꿀꿀거리네. 기사님들, 계속 연행해 주세요.”
“놔, 놔라! 이것들아! 놔라!”
카이는 기사들에게 끌려가는 돼지 영주를 향해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주민들이 하나둘 카이에게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치료사님, 감사드립니다.”
“카이 사제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진작 역병에 죽었을 겁니다.”
“아오사가 도시를 침공했던 날, 건물에 깔려 있던 절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만약 카이 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아니, 뭐 다들 이렇게 감사의 말씀을…….”
카이는 해일처럼 몰아치는 인파에 파묻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내, 내가 치료한 사람이 이렇게 많았던가?’
장장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치료를 했고, 아오사가 침공한 날 구한 NPC만 132명!
주민들에게 둘러싸여 당황하는 카이의 품으로, 갑자기 누군가가 달려와 안겼다.
“카이 님, 약속…… 지켜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아, 아야나!”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카이는,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활짝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짝, 짝짝. 짝짝.
주민들의 박수 세례가 이어졌다.
그것은 자신들을 구해준 영웅에게 보내는 답례이기도 했으며, 부패한 영주가 사라진 이 날을 기리는 그들만의 축배이기도 했다.
띠링!
[고통을 받는 원인, 그 자체를 없애주는 것이야말로 선행가가 나아가야 할 궁극의 경지입니다. 당신은 강대한 권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주민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악덕 영주를 끝내 자리에서 끌어내렸습니다. 상대가 지닌 압도적인 힘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자신만의 정의를 관철한 당신은 성자라고 불릴 자격이 있습니다.]
[7,472명의 NPC가 당신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보내고 있습니다.]
[스페셜 칭호, ‘화이트홀의 성자’를 획득하셨습니다.]
[위대한 선행가가 부패한 영주를 몰아낸 이 이야기는 이야기꾼들을 통해 대륙에 널리 퍼질 것입니다.]
[태양교의 공헌도가 5,000 상승했습니다.]
[태양교 세력의 전파속도가 25% 빨라집니다. 부패한 영주에게 탄압을 받는 주민들은, 태양교의 자비가 내려오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선행 스탯이 15 상승합니다.]
‘아, 역시 선행이 최고야…….’
마치 글렌데일의 주민들을 구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다만 그 때보다는 조금 더 스케일이 크다는 느낌.
모든 일이 끝났을 때의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던 카이에게, 예상치 못한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띠링!
[권선징악 효과가 발동합니다.]
[부패한 영주의 작위를 박탈시켰습니다.]
[박탈시킨 영주의 작위는 ‘남작’입니다.]
[선행 스탯이 25 증가합니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