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힐통령 119화
48장. 달빛과 함께 춤을 (1)
“……이게 뭐야?”
카이가 제 눈을 비비면서 중얼거리자, 그의 품에 안긴 아야나가 냉큼 대답했다.
“아야나예요.”
“아니, 그건 아는데…….”
어색한 미소를 띄운 카이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시스템 로그로 향했다.
‘화이트홀의 성자 칭호를 받은 것과 선행 스탯이 오른 건 이해가 가.’
글렌데일에서도 페르메를 처치하고 주민들을 구했을 때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
하지만 카이가 놀란 것은 그다음으로 떠오른 메시지였다.
‘권선징악이라니? 이건 대체…….’
권선징악 효과로 상승한 선행 스탯만 무려 25개!
잠시 계산을 하던 카이는 입을 쩌억 벌렸다.
‘그, 그럼 이번에 얻은 선행 스탯만 무려 40개라고?’
그는 허둥지둥 스탯 창을 열어보았다.
[카이]
직업 : 태양의 사제
레벨 : 123
칭호 : 신의 대리자
생명력 : 33,700
신성력 : 40,100
능력치
힘 : 457 체력 : 337
지능 : 278 민첩 : 252
신성 : 401 위엄 : 249
선행 : 158
남은 스탯 : 105
독 저항력 +30
마법 방어력 +70%
모든 공격력 6% 증가
모든 속도 6% 증가
“허어…….”
정말이다.
정말로 선행 스탯이 40개나 올라간 것이 두 눈으로 똑똑히 들어왔다.
‘그런데 위엄은 왜 또 249야?’
자신의 기억이 온전하다면 아오사를 잡기 전에는 179였을 터.
‘아오사를 처치한 자 칭호로 모든 스탯이 15개 올랐고, 선행 스탯으로 40개 올랐으니…….’
219가 되어야 정상!
하지만 30개가 더 오른 이 상황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에 대해 잠시 고민하던 카이는 짧은 탄성을 터뜨리며 칭호 도감을 펼쳤다.
[화이트홀의 성자]
등급 : 스페셜
내용 : 투철한 정의로 도시의 주민들을 구원한 자에게 주는 칭호.
효과 :
위엄 +30
신성력을 소모하는 모든 스킬의 효과 +15%(이 효과는 칭호를 착용하지 않아도 적용됩니다.)
“역시. 이게 있었구나.”
같은 성자 칭호라서 그런지 효과는 글렌데일의 성자 칭호와 매우 흡사했다.
‘성자 칭호가 하나만 있으면 모르겠는데, 두 개나 모이니 이것도 무시 못 하겠는걸.’
주력 스킬들의 효율이 10% 상승하는 것과, 25% 상승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신성 폭발의 스탯 상승량만 봐도 전과 비교가 안 돼.’
기존의 30에서 38이 되는 마법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 외에도 버프와 힐, 신성 사슬 같은 스킬들까지 생각하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효과!
인파에 둘러싸여 스탯 창을 바라보는 카이에게 바체가 다가왔다.
“그럼 난 이쯤에서 돌아가겠다.”
“어? 벌써 가십니까?”
“맡은 바 임무는 끝났으니까.”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을 하는 바체.
카이는 폐허가 된 시가지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럼 이 도시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새로운 영주가 부임되겠지. 그리고 조만간 도시 재건 공사도 시작될 것이다.”
“이번에는 좋은 영주가 왔으면 좋겠네요.”
“폐하께서는 신중한 분이시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정말로 충성심이 대단한 자다.
카이는 잠시 바체를 쳐다보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아마 저 혼자였다면 영주를 이렇게 쉽게 몰아내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건 겸손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었다.
현재 카이의 수준으로는 서른 명이 넘는 기사들을 상대하기가 벅차다.
그건 탈진과 탈력감 디버프로 모든 능력치가 바닥을 기어 다니는 지금은 더더욱 그러했다.
“폐하의 명을 따랐을 뿐, 감사는 그분에게 하도록.”
“물론 그렇지만, 바체 님에게도 감사하죠. 아! 그리고 아까 보여주신 검 말이에요. 제 수준이 낮아서 단번에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큰 공부가 된 것 같아요. 그 부분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그것도 폐하의 명이었을 뿐.”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내뱉는 폐하보이 바체.
그런 그에게도 주민들이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감사해요, 잘생긴 기사님!”
“혼자서 화이트홀 기사들을 모두 때려눕히셨다면서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놈들이 매번 저희 가게에 와서 돈도 안 내고 빵 가져갔거든요!”
“저랑 결혼해 주세요!”
“오빠아아!”
“무, 무슨…… 나, 나는…….”
귀까지 붉게 물든 바체는 서른 명의 기사를 눈앞에 뒀을 때보다도 크게 당황했다.
곤혹스러워하는 그 모습에 카이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소리쳤다.
“죄송합니다만 잠시 길 좀 비켜주시겠어요? 이분이 이래 뵈도 바쁘신 분이라서 돌아가셔야 합니다!”
“음? 하긴…….”
“능력이 저렇게 출중하면 어딜 가서 뭘 해도 먹고 살긴 할 거야.”
“게다가 기사님이잖아? 바쁘시겠지.”
“그리고 사제님이 저렇게 부탁을 하기도 하고…….”
술렁술렁.
절대 뚫리지 않을 것 같던 인파는 카이가 웃는 낯으로 부탁을 하자 거짓말처럼 갈라졌다.
마치 모세의 기적이 재림한 듯한 모습!
인파를 빠져나와 골목길에 들어서자, 바체는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구해줘서 고맙다.”
“……아니, 구해주다뇨? 다들 바체 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뿐이잖아요.”
“이런 건 아무래도 익숙치가 않아서…….”
바체의 귀여운 일면을 본 카이가 피식 웃었다.
“조금 의외네요. 바체 님처럼 강한 분이라면 약점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충고 하나 하지. 이 세상에 약점이 없는 사람이란 없다. 이 점을 항상 명심하도록.”
“예에…… 이제 잊고 싶어도 못 잊을 것 같네요.”
카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자, 바체는 뻘쭘한 표정으로 텔레포트 스크롤을 꺼냈다.
그는 그것을 찢기 전, 카이를 한 차례 스윽 쳐다봤다.
“……훗날 본인의 실력에 자신이 붙으면 나를 찾아와라. 대련이라면 한 번 정도는 해주지.”
“어? 정말요? 그럼 저야 영광이죠!”
“또 보지.”
바체는 도망치듯이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어버렸다.
“……부끄러워하기는.”
바늘 하나 들어갈 구석도 없어 보이던 바체였지만 칭찬과 감사 인사에는 약한 모양!
그의 빈자리를 쳐다보던 카이는 두 주먹을 꽈악 쥐었다.
‘아무튼 검술의 달인과 일대일 대련을 할 수 있다는 건 대박이야.’
다른 검사 유저들에게는 억만금을 주더라도 갖고 싶은 기회인 것이다.
‘하지만 검술을 최소 고급 레벨 이상으로 올려서 가는 게 좋겠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플레이어의 수준과 능력에 따라 같은 상황에서도 얻을 수 있는 보상은 천차만별!
잠시 고민을 이어가던 카이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
타아악!
최고의 영상 편집자 중 하나로 꼽히는 마이클 레이놀드.
그는 오늘만 벌써 세 캔째인 레드불을 책상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으으으…… 하나 끝났다…… 그런데 끝이 안 난다…… 일감이 줄어들지를 않아…….”
눈밑으로 진한 다크써클을 그려놓은 그는 막 작업 하나를 끝내고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죄다 똑같은 컨셉, 똑같은 영상, 똑같은 구도, 똑같은 BGM…… 이제 슬슬 고객들도 가려서 받아야 하나?’
요즘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는 회의감이었다.
물론 프리랜서에게 일거리가 넘쳐난다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마이클은, 이제는 단순하게 반복되는 작업에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
“아…… 모아놓은 돈 좀 쓰고 싶다…… 그런데 스케줄 펑크 내면 위약금 뱉어내야 해서 그럴 수가 없어…….”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미드 온라인 커뮤니티에 접속하여 동영상 카테고리를 살펴봤다.
‘후우, 그래도 역시 내가 실력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랭킹 10위 이내의 인기 동영상 중에, 자신의 손을 거친 녀석들만 무려 다섯 개!
이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마이클의 귀로 익숙한 알림음이 들렸다.
삐로리!
[메일이 도착하였습니다.]
“윽…… 일이 또 쌓였어?”
대놓고 인상을 찌푸린 그는 메일함을 클릭하면서 기도했다.
‘제발 스팸 메일이길, 제발 스팸 메일이길, 제발 스팸 메일이길…….’
안타깝게도 그 메일은 매우 건전한 일감 요청 메일이었다.
다만, 메일의 내용을 확인한 마이클의 표정에 점점 생기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와, 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마이클이 주먹을 꽉 쥐면서 환호했다.
‘한동안 영상을 안 보내오길래 혹시 다른 놈한테 간 건 아닌가 했더니…… 그건 아니었군.’
마이클은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언노운의 동영상을 즉시 다운 받았다.
“어디 보자, 요청 사항은…… 쿡, 으하하하하!”
메일의 본문에 기재되어 있는 문장을 읽는 순간, 마이클은 빵 터졌다.
As fast as you can. Awesome Please(최대한 빠르게. 끝내주는 걸로 부탁).
“크크큭, 장담하는데 언노운은 영어를 못할 게 분명해.”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낸 마이클이 또렷한 눈동자로 모니터를 쳐다봤다.
“자, 그럼 어디 내 상상력을 다시 한 번 발휘해 볼까?”
최근 다른 영상들을 편집할 때는 느껴보지 못한 설레임이 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마이클은 일류 셰프가 오늘은 어떤 요리를 할지 고민하듯, 언노운이 선물한 신선한 재료를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으렴. 두 번 저으렴.
부모님이 한정우의 귀에 딱지가 앉을 때까지 해주셨던 말이었다.
“영상 요청은 이미 보내뒀고…….”
샤워도 했고, 밥도 먹었다.
할 일을 모두 끝낸 그는 곧장 미드 온라인의 공략 사이트를 구경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커뮤니티는 이미 아오사의 이야기로 뜨겁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내 이름도 언급되네? 하긴, 무리는 아니지.’
전투 당시에는 이미 블리자드에게 칠흑의 원한 세트를 물려준 후였다.
그런데 블리자드와 아오사가 싸우는 장면을 찍은 스크린샷이 커뮤니티에 게재된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커뮤니티에서는 또 싸움이 붙었다.
‘이놈들은 밥 먹고 할 짓도 없나, 여기서 맨날 싸우고 있어. 맨날.’
피식 웃은 한정우는 커뮤니티의 댓글을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언노운이 아오사를 해치웠다고? 지나가는 개도 안 믿을 소리하고 있네.
└나 지나가는 개인데 내가 믿음. 멍멍!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돼? 언노운 레벨이 지금 몇일 것 같아? 잘해봐야 105 정도겠지.
-아니, 님들아. 이미 증거 스크린샷이 떴는데 왜 자꾸 개소리세요.
└증거가 어딨는데? 언노운이 아오사 잡고 시체 위에서 하나, 둘, 셋 치즈하고 사진이라도 찍었냐?
└아오사랑 언노운이 싸우는 스크린샷 있잖아.
└응, 다음 합성~
└너 근데 아까부터 말이 짧다? 너 레벨 몇이냐?
-그런데 현장에 있는 사람들 말 들어보면 언노운은 개맞듯이 얻어맞고 광탈했다는데?
└나도 그 소문 들었어. 무슨 용갑주 같은 거 입은 유저가 아오사 처치했다던데.
“흐음. 소문이 생각보다 구체적이잖아?”
한정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화이트홀은 프리카 같은 시골 마을도 아니고 NPC만 3만 명이 거주하는 대도시이다.
그 말은 당연히 퀘스트의 숫자도 많고, 그곳을 거점으로 삼은 유저들도 많다는 소리다.
‘그리고 내가 아오사 처치할 때 구경하던 유저들도 제법 있었으니까.’
이 정도의 소문이 퍼지는 건 그의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았다.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인 셈이니까.
‘이거, 의도하진 않았지만 상황이 재미있게 됐는데?’
자신과 블리자드를 비교하면서 서로 싸우는 유저들을 보니,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올 지경!
한정우는 슬쩍 시계를 쳐다봤다.
“이제 게임에서도 아침이 밝았으니까…… 슬슬 여관에서 로그아웃했던 유저들도 일어나겠지.”
그리고 그들은 목격할 것이다.
도시의 광장을 포함한 시가지가 하룻밤 만에 무너진 처참한 광경을.
그것을 보는 그들이 과연 어떤 생각을 할지는 안 봐도 뻔했다.
“후후. 아마 궁금해서 미칠 거다.”
과연 어떤 식으로 싸워야 일개 개인이 보스 몬스터를 레이드할 수 있는지.
그리고 도시를 그렇게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싸울 수 있는지.
이미 수많은 언노운의 팬들은 그가 영상을 공개하여 자신이 잡은 것이 맞다는 것을 인증해 주기를 기다렸다.
‘역시 노이즈 마케팅은 돈이 된다니까.’
커뮤니티의 후원금 목록을 쳐다보던 한정우가 자조 섞인 미소를 흘렸다.
하루라도, 아니 한 시간이라도 빨리 영상을 올려달라고 후원금이 다발로 쏟아졌기 때문이다.
‘아직 언노운이 잡았다고 확정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돈을 뿌려대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다.
역시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으며, 돈 많은 사람도 많은 법!
‘이 현상이 오래 유지될수록 나야 좋지.’
물론 너무 오래 끌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한 마디로 밀고 당기는 과정의 조율을 정말 잘 해야 된다는 소리.
“아무쪼록 빨리 좀 만들어줬으면 좋겠네. 힘내라 마이클.”
기지개를 펴면서 태평한 소리를 내뱉은 한정우는 곧장 침대로 직행했다.
아오사와의 전투에서 쌓인 피로도를 풀 사이도 없이, 국왕 베오르크를 만나고 돼지 영주까지 몰아내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난 쉴 자격이 있어. 으으음…….’
고로롱, 고로롱.
청담동의 어느 한 오피스텔.
세계인이 주목하기 시작한 플레이어는 그곳에서 곤히 잠들었다.
그로부터 일곱 시간 후,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영상 편집자 한 명이 필생의 역작을 완성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