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힐통령 126화
51장 충돌(1)
“방법은 세 개.”
코로나가 가냘픈 손가락 세 개를 피면서 말했다.
“이중에서 가장 추천하는건, 암흑 문신을 새기는 거.”
“으음.”
흑탑이 자랑하는 고유 기술 중 하나이다.
신체의 부위에 마법 술식을 새겨놓고, 원할 때 발동하는 기술.
마도사가 직접 시술을 해야하기에 가격이 비싸다는 점을 제외하면 단점조차 없다.
‘하지만 커뮤니티에서는…… 사제가 문신을 새기면 명성이랑 신성력이 떨어진다고 하던데.’
아니나 다를까, 반응은 곧장 찾아왔다.
[헬릭은 자신의 사도가 몸에 그림을 그려넣는 것에 반대합니다.]
[태양교의 교리 중에는, 몸과 마음을 항상 정갈하게 유지하라는 항목이 존재합니다.]
[신체에 암흑 문신을 새길 시, 신성력과 명성이 대폭 하락합니다.]
‘아, 그러시구나.’
말 잘 듣는 어린 양, 카이는 곧장 고개를 흔들었다.
“암흑 문신을 그리는 건 조금 힘들 것 같네요. 교리에 어긋나서요.”
“그, 그럼 두 번째로 추천하는 걸로 해. 네크로맨서 혹은 흑마법사로 전직하면 돼.”
“…….”
이번에는 예상외로 메시지 창이 조용했다.
하지만 그건 헬릭이 직업을 바꾸는 걸 허용해 줬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 양반도 나름 눈치가 빠르다니까.’
카이가 절대 직업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경고를 하지 않는 것뿐!
실제로 카이는 웬만한 히든 클래스를 준다고 해도 직업을 바꿀 의향이 없었다.
“그것도 좀…….”
카이의 입에서 연달아 거절의 의사가 흘러나오자, 코로나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마지막 방법은 정말 추천하지 않는 건데…… 그래도 들을 거야?”
“한 번 들어나 보죠.”
“……세 번째. 내가 맞춤형 마법 아이템을 만들어준다.”
“세 번째로 하겠습니다!”
일말의 망설임도없이 소리친 카이!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코로나를 쳐다봤다.
‘아니, 왜 제일 좋은 방법을 마지막에서야 말해주는…… 아. 설마?’
코로나를 빤히 쳐다보던 카이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탑주나 되는 인물이, 설마 마법 아이템 하나를 만드는 게 귀찮아서 그런 짓을 했겠는가.
“후우.”
하지만 노골적으로 귀찮고, 피곤하다는 기색을 풀풀 풍기던 코로나가 입을 열었다.
“아, 정말 귀찮은데…….”
“…….”
이 얼마나 글러먹은 인간인지!
마탑의 탑주는 이제 겨우 둘을 만나봤지만, 하나같이 정상적인 사람은 없다.
‘정말이지 마법계의 앞날이 걱정…….’
진지하게 마법사 유저들의 미래를 걱정하던 카이에게, 코로나가 질문했다.
“스켈레톤 나이트 소환, 요구사항은 그게 끝이지?”
“예, 그 정도만 되어도…….”
“쯧쯧.”
카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 옆에서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파사낙스가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그는 대번에 인상을 찡그리더니 카이를 노려봤다.
“네 놈, 아무래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 내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예?”
“흑탑의 꼬맹이가 지금 나에게 쩔쩔매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
“그야…… 파사낙스 님은 적탑의 탑주시고, 나이도 많으시니까?”
“끌끌끌, 저 게으름뱅이 꼬맹이가 노인 공경을 할 녀석처럼 보이나.”
입 꼬리를 올린 파사낙스가 말을 이었다.
“7년 전, 저 꼬맹이가 죽을 뻔한 적이 있다. 당시 내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
“아아, 처음에 대화 나누셨던 죽음의 평야 어쩌고 하셨던 게?”
“맞다. 그 때 나는 저 꼬맹이를 살려줬고, 마나의 맹세를 받았지.”
“마나의 맹세!”
카이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마나의 맹세는 NPC 마법사들이 절대적인 신뢰 관계를 구축할 때 사용하는 계약 방법이다.
‘약속을 어기면 체내의 마나가 증발되는 무서운 계약 방법!’
현실의 보증이나, 사채 등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계약인 것이다.
“계약의 내용은 간단하다. 단 한 번, 내 부탁을 들어주는 것.”
“설마?”
“끌끌, 머리가 참 나쁜 녀석이군. 이제야 이해한 건가.”
“저에게 보상으로 주신다는 게 그것이군요.”
“그래. 솔직히 아깝지만…… 저 꼬맹이의 협조가 없으면 난 네가 원하는 걸 주지 못하니까.”
“파사낙스 님…….”
카이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단순한 다혈질 노인인 줄 알았는데…… 이런 면이 있을 줄이야!’
누군가는 그를 자존심에 죽고 못 사는 괴짜라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키려는 그의 자세는 분명 존경받을 자격이 있었다.
‘설마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엄청난 기회를 내놓을 줄이야.’
파사낙스는 자신을 초롱초롱하게 쳐다보는 카이의 눈빛이 영 거슬렸는지, 턱을 까딱였다.
“눈빛이 소름끼치는군. 돌아가는 상황을 알았으면 꼬맹이와 처음부터 다시 협상해라.”
“예, 알겠습니다.”
카이는 마치 전장에 나가는 병사처럼 결연한 표정을 내비쳤다.
“……난 이제 망했어.”
그런 카이를 쳐다보는 코로나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
“예? 아이템이 완성되는데 두 달이나 걸립니까?”
“……너, 자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는지 조금은 생각해보고 말하는 게 어때?”
“하하.”
카이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해요. 제가 마법은 잘 몰라서…… 그냥 아이템 만들 때 마법 술식도 같이 집어넣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으, 으아아아…….”
뒷목을 붙잡은 코로나가 게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순간!
파사낙스가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저 꼬맹이 정도의 실력이 있으니 두 달 만에 끝나는 거다.”
“마법 아이템 제작이 그렇게 어려운가요?”
“물론. 아이템에 주입할 스킬들의 술식이 충돌하면 그걸 해결할 때까지는 수백 번이나 같은 작업을 반복하면서 해결법을 찾아야하니까.”
“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계속해서 발견되는 버그를 고치는 프로그래머를 떠올리니 이해가 쉽게 되었다.
‘그럼 기간은 더 줄일 수 없다는 소리인데…… 두 달이면 아슬아슬하겠는걸.’
강민구 지부장이 사전에 귀띔해줬던 침공 이벤트도 바짝 코앞으로 다가왔다.
현실에서 20일 정도 후에 이벤트가 시작되니, 게임의 두 달과 시기상으로는 얼추 비슷하다.
‘뭐,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이미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
남은 건 정화수를 떠놓고, 코로나가 열심히 좋은 아이템을 만들어주기를 기도할 뿐!
“네 놈, 수고했다. 난 강의가 있어서 먼저 가보지.”
기절한 코로나를 그대로 놔둔 파사낙스는 곧장 텔레포트 스킬을 사용하여 돌아갔다.
그의 성정만큼이나 갑작스러운 작별!
‘그럼 나도 돌아갈까.’
마찬가지로 기절한 코로나를 쳐다보던 카이는 곧장 흑탑을 나섰다.
당연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타르달의 저택.
“음?”
카이가 생각보다 일찍 돌아오자, 타르달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네, 설마 파사낙스에게 쫓겨난건가?”
“아니요. 맡겨주신 의뢰는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파사낙스와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말해주자, 타르달이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 녀석, 코로나에게 한 몫 단단히 뜯어낼 생각을 하더니 안타깝게 됐군.”
“솔직히 놀랐습니다. 그런 엄청난 기회를 보상으로 건네줄 줄은 몰랐거든요.”
“마법사들은 대체적으로 자존심이 높네. 그리고 파사낙스는 예전부터 유독 자존심이 높았지. 성정이 불같은 게 단점이지만, 자신의 사람은 끔찍하게 잘 챙기고 내뱉은 말을 어긴 적은 한 번도 없어.”
“확실히 그런 부분은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타르달이 싱긋 웃었다.
“성격이 그렇게 괴팍한데도 따르는 이들의 수가 많은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일세. 사람을 대하는 것이 조금 서투를 뿐, 나쁜 친구는 아니니 너무 미워하지 말게.”
짧은 대화를 나눈 타르달이 항상 그래왔듯, 서류철을 붙잡았다.
“곧장 돌아온 걸 보면 새로운 의뢰를 수행하고 싶은 건가?”
“아, 그거 말입니다만. 사실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흠?”
카이의 진중한 표정을 읽은 타르달이 서류철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게.”
“아무래도 당분간 어둠 추적자의 임무를 받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허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겐가? 혹시 아오사와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생각보다 심하다거나…….”
“아뇨, 그런 문제는 아닙니다. 후유증은 조만간 완치될 겁니다. 다만…… 그 이후에 엘프의 숲에 방문해 볼까 합니다.”
엘프의 숲.
카이의 입에서 그곳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엘프의 숲이라?”
타르달이 피식 웃었다.
“자네도 다른 모험가와 비슷한 구석이 있군. 엘프들의 마을을 찾아보고 싶은 겐가?”
당연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 정상이었다.
일반적인 모험가라면 엘프의 마을 위치를 알 수가 없을 테니까.
“아니요. 엘프들의 마을 위치는 알고 있습니다.”
“…….”
올라가있던 타르달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왔다.
“……모험가가 엘프 마을의 위치를 알고 있다? 믿기 힘든 이야기로군.”
“화이트홀에서 잠시 묵었던 진료소의 주인이 엘프였습니다.”
“엘프는 기본적으로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들을 좋아하지 않아. 특히 모험가에게는 더더욱 마을의 위치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을 텐데…… 어찌된 일이지?”
‘역시 타르달. 예리한 부분을 찌르는군.’
하지만 그가 간과하고 부분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카이가 일반적인 모험가와는 다르다는 부분이다.
“말씀하신대로 제가 일반적인 모험가였다면, 말해주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엘프들에게 전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요.”
“왜지?”
“물의 현자라 불리우는 타르달님이라면, 슬슬 눈치채셨을 것 같은데요.”
카이가 빙긋 웃어보이자, 타르달이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네. 자네가 하카스의 비늘을 가져왔을 때부터 말이지.”
하카스는 모험가들은 물론, 웬만한 NPC들도 갈 수 없는 심해에 서식하는 나가족의 왕자이다.
그래서 카이가 그의 비늘을 가져온 순간, 타르달은 정말 깜짝 놀랐었다.
“사제의 몸으로 인어족의 원수인 나가족 왕자를 사냥하고, 홀로 아오사를 처치했으며, 엘프에게 친구로 인정받고 마을의 위치까지 들었다?”
타르달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카이의 전신을 훑었다.
“내 얕은 지식으로는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는군.”
“그게 무엇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자네를 어둠 추적자에 가입시킬 때, 뮬딘 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준 것 기억하나?”
“물론입니다.”
그때 뮬딘 교에 대해 처음으로 들었고, 그들이 메인 퀘스트의 주목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태양교에 대해 짧게 설명을 해줘야겠군. 태양교의 역사는 세 개로 분류할 수 있네.”
손가락 세 개를 들어올린 타르달은, 천천히 하나씩을 접어나가며 말했다.
“수호와 안식, 그리고 광휘.”
“…….”
광휘에 대해선 카이도 들은 바가 있다.
‘패트릭을 지칭하는 단어겠지.’
태양교 역사상 최고, 최강의 성기사라고 불린, 3대째 사도.
그리고 지금 타르달의 입에서는 1대와 2대에 대한 정보가 흘러나왔다.
“수호의 시미즈, 안식의 체란티아. 그리고 광휘의 패트릭.”
‘역시.’
카이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타르달이 손을 내리며 물었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자신을 4대째라 주장하는 모험가가 앉아 있는 것 같군.”
“주장이 아닙니다.”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카이는 아무런 말 없이, 인벤토리를 열었다.
잠시 후 그의 손에 딸려 나온 건 정교한 태양이 조각되어있는 찬란한 반지였다.
“…….”
성환, 페트라가 뿜어대는 성스러운 기운에 타르달은 잠시 말을 잊지 못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는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