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힐통령 127화
51장 충돌(2)
“엘프와 인어, 드워프 모두가 한때는 세계연합군의 일원이었다는 걸 알고 있나?”
“예. 연이 닿아 패트릭 님이 남긴 사념의 파편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 알고 있습니다.”
“허어, 전설의 그 ‘광휘’와 직접 대화를 나누다니…… 솔직히 부럽군.”
진심으로 부럽다는 표정을 내비친 타르달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이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군. 자네가 태양의 사제라면 꼭 좀 부탁할 게 있네.”
“부탁입니까?”
카이가 확실하게 물었다.
임무나 의뢰.
모두 명령이나 다름없는 퀘스트들이 아닌, 카이의 판단에 따라 거절이 가능한 종류인지를.
이에 타르달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운을 띄웠다.
“이건 간절한 부탁이니 들어보고 대답해 주게. 세계 연합군에 의해 뮬딘 교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이후 연합군도 자연스럽게 갈라졌네. 잠시나마 하나였던 인간군은 세 개의 왕국과 두 개의 제국으로 나뉘었지. 이후 엘프는 숲으로, 인어들과 드워프들은 각각 심해와 지하로 떠났다네. 그 뒤로 수백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
말을 하던 타르달이 돌연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인간은 탐욕스러운 동물이라네. 더군다나 수백 년이라는 시간은 인간에게는 너무나 긴 시간이지.”
과거를 망각한 인간의 무서움에 대해서.
“아름다운 엘프와 인어들을 노예로 삼으려는 인간도 있었으며, 드워프의 지식과 손재주를 훔치고자 했던 인간도 있었네.”
그리고 인간들 스스로가 끝내 버린 이종족과의 교류에 대한 말이었다.
“이제 이종족들은 우리 인간을 믿지 않네. 아니, 어쩌면 천 년 전 세계 연합군이 결성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르겠네. 그들이 믿는건 태양신 헬릭의 전인인 태양의 사도뿐이었을지도 몰라. 사도와 그들의 결속은 그만큼 단단했으니까.”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물의 관리를 인간이 아닌 그들에게 맡겼다는 점만 생각해도 그렇다.
그리고 카이는 타르달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주제를 빙빙 돌리는지를 깨달았다.
“혹시 뮬딘 교가 돌아온 것을 그들에게 알리고, 어둠 추적자에 합류하기를 원하시는 겁니까.”
“부정하지 않겠네. 현재 대륙을 감도는 전운은 인간은 물론, 그들조차 뒤덮고도 남아. 당했을 때는 너무 늦은 상태일 거야. 서로의 힘을 모아야 할 때일세.”
띠링!
[세계 연합군을 재건하라]
난이도 : A
인간과 엘프, 드워프와 인어는 한 때 같은 깃발 아래에서 싸웠던 동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망각하는 동물인 인간은 시간이 흐를 수록, 세대가 바뀔 수록 기록에 불과한 과거를 잊어버리고 이종족들을 제멋대로 주무르기를 원했습니다.
결국 수백 년 동안 감정의 골이 깊어질대로 깊어진 지금, 그 어떤 이종족도 인간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태양의 사제인 당신이라면 그들 모두의 뜻을 하나로 모을 수 있습니다. 엘프와 드워프, 인어들을 세계 연합군에 끌어들여 다가올 대륙의 어둠에 맞서십시오.
퀘스트 보상 : 스페셜 칭호, 인도하는 자 획득.
실패 패널티 : 타르달의 호감도 하락. 엘프와 드워프, 인어족의 호감도 하락.
‘A급 퀘스트……!’
태양의 사제로 전직을 하기 전 자신의 뒷통수를 쳤던 흑마법사 지르칸.
그때 받았던 퀘스트를 제외하면, 카이가 여태 진행했던 퀘스트 중 난이도가 가장 높았다.
‘세계 연합군의 재건이라…….’
아무리 봐도 하루, 이틀 걸려서 깰 수 있는 퀘스트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급하게 깰 필요는 없는 퀘스트지.’
게다가 이건 어디까지나 타르달의 부탁.
주도권은 자신이 쥐고 있었다.
“……우선 전 타르달님의 이 ‘부탁’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흐음.
이후 카이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뜸을 들였다.
1분, 2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결국 타르달이 먼저 물었다.
“그들을 세계 연합군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지원을 아끼지 않겠네.”
“정말이십니까?”
카이는 마치 기다렸다는 사람처럼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물론일세. 적어도 우리 라시온만큼은 그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을…….”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좋습니다. 부탁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빙긋 웃어 보인 카이는 망설임 없이 퀘스트를 수락했다.
“대신 오늘 나눈 대화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그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겠다고 하신 말이요.”
“내 육신이 땅에 묻혀 망각의 강을 건너지 않는 이상, 내뱉은 말을 번복하는 일은 없을 걸세.”
카이는 그가 내미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악수와 함께 만족스러운 거래가 끝을 맺었다.
***
푸른 잎이 무성한 숲속의 베이스캠프.
평상시라면 엘프의 숲으로 들어가기 전에 유저들이 휴식을 취하는 안락한 장소다.
하지만 오늘 입구의 분위기는 납덩이라도 끼얹은 듯 무거웠다.
그 무거운 분위기를 생성하는 무리는 두 개였다.
“사과해라.”
“사과? 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엘프의 숲 서쪽 구역은 검은 벌 길드가 통제하고 있다. 그곳에 멋대로 들어와 사냥을 했으니, 돈을 토해내고 사과하는 게 마땅하겠지.”
“하, 미친 소리 좀 작작 해. 엘프의 숲이 얼마나 큰데 여길 통제하겠다는 거야?”
흑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마법사 무리가 하나.
그리고 그들을 상대로도 위축되지 않는 무리가 하나 더 있었다.
‘하여튼 검은 벌 녀석들, 여기서 문제 일으키는 새끼들 보면 맨날 얘네야.’
‘미드 온라인에 마법사들은 저들밖에 없는 줄 아는 머저리들.’
‘퓨리마 파티만 불쌍하게 됐네.’
‘검은 벌, 저 새끼들은 꼭 길드는 안 건드리고 치졸하게 파티만 건드리더라.’
유저들은 검은 벌 길드에게 일방적으로 핍박받고 있는 퓨리마 파티에게는 동정의 눈길을,
검은 벌 길드를 향해서는 언짢은 눈빛을 노골적으로 보냈다.
물론 그 정도 무언의 압박에 위축될 검은 벌이 아니었다.
“…….”
천천히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본 검은 벌 파티의 리더, 벌처는 돌연 몸을 휙 돌렸다.
파지지지직!
순식간에 손아귀로 모인 번개의 창!
그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투창처럼 던졌고, 번개의 창은 퓨리마의 가슴을 꿰뚫었다.
“커억!”
“꺄악! 오빠!”
“이 새끼가 다짜고짜 무슨 짓……!”
퓨리마 파티원들이 무기를 빼들고 항변하려고 했지만.
서걱! 서걱!
벌처의 손에서 윈드 커터는 그들의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은 채 그들을 유린했다.
싸가지는 밥이나 스프에 말아먹었을지 몰라도, 실력만큼은 최상급.
“……크으윽.”
순식간에 빈사 상태에 빠진 퓨리마 파티의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흥.”
시시하다는 표정을 드러낸 벌처가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하여튼 이 벌레 같은 것들은 꼭 매를 맞아야 주제를 알아요.’
엘프의 숲은 거대한 나무 몬스터인 트리바고가 주로 나오는 곳이었다.
덩치가 있는 만큼 체력 또한 높았고, 때문에 마리당 경험치 수급도 좋은 편.
때문에 벌처는 길드의 수뇌로부터 임무를 하나 전달 받았다.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엘프의 숲 서쪽 구역을 검은 벌의 소유로 만들어라.
쉽게 말하자면, 사냥터 통제다.
지난 몇 주간 작업한 결과, 이제 유저들은 엘프의 숲 서쪽으로는 잘 접근하지 않았다.
‘물론 오늘처럼 여전히 주제를 모르는 놈들이 하나, 둘씩은 꾸준히 나오지만.’
하지만 그때마다 이렇게 압도적인 무력 차이를 보여주면 결국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검은 벌은 여태까지 그런 식으로 통제하는 사냥터의 수를 늘려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가자.”
벌처는 찍소리도 못하는 일반 유저들을 비웃으며 캠프를 떠나갔다.
그가 자리를 떠나고 나서야 유저들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젠장! 저 싸가지 없는 새끼들, 진짜 누가 안 잡아가나.”
“하여튼 타이탄이랑 검은 벌, 이 두 길드는 정도가 좀 심하잖아.”
“어이, 여기 누구 사제 없어? 퓨리마 애들 치료 좀 해달라고.”
“일단 이 포션이라도 좀 써봐.”
순식간에 퓨리마 파티 주변에 모여들어 그들을 도와주는 유저들.
차마 검은 벌과 척을 질 용기는 없지만, 그들의 부당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이들이었다.
“제가 한 번 봐드릴게요.”
인파를 헤치고 사제 하나가 튀어나왔다.
하얀색 사제복을 입은 채, 후드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는 유저.
그는 고작 힐을 몇 번 사용한 것만으로 퓨리마 파티를 순식간에 치료했다.
이를 보고 있던 유저들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잠깐만, 힐 몇 번에 풀피를 채운다고?’
‘대체 신성력이 얼마나 높은 거야?’
‘이 주변에서는 처음 보는 유저인데, 어느 파티 소속이지?’
궁금증을 채 풀기도 전에, 치료를 마친 사제는 무엇이 그리 급한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
엘프의 숲.
인적이 드문 장소에 도착한 사제는 후드를 뒤로 넘겼다.
안쪽에서 드러난 것은 카이의 얼굴이었다.
“역시 검은 벌 녀석들이 싸가지가 없는 거였어.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니까.”
카이는 조금 전 베이스캠프에서 일어난 일방적인 폭력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서 놈들을 모두 썰어버리고 싶은 심정.
‘하지만 아직은 안 돼.’
엘프의 숲에 대한 자료 조사는 모두 마쳤다.
준비해야할 물건들도 모두 준비했고, 자기 전에는 ASMR을 들으면서 잤기에 컨디션도 최고다.
‘그러니까 계획을 조금 바꾸자.’
다른 유저들을 무시한 채, 아야나의 어머니가 준 지도를 찾아 곧장 엘프 마을로 찾아가는 것.
그것이 카이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베이스 캠프에서의 참상을 본 이상, 이대로 지나치기는 힘들다.
‘불의를 보면 지나칠 수조차 없다니! 난 이래서 매번 손해만 보는구나.’
물론 정의감에 솟구치는 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검은 벌 녀석들. 슬슬 끌어내리고 싶은데 말이지…….’
세계 10대 길드.
그 자리에 녀석들 같은 양아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절로 불쾌해진다.
‘원래는 두 달 후 침공 이벤트에서 엿 먹이려고 했지만…….’
검은 벌 녀석들의 양아치 근성이 일을 앞당겼다.
카이는 검집에 손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엘프의 숲 서쪽 구역이라고 했나?”
카이의 몸이 서쪽으로 돌아갔다.
***
“아까 정말 멋졌습니다. 윈드 커터 시전 속도와 명중률이 날이 갈수록 빨라지시네요.”
“그 녀석들 표정 봤습니까? 분통은 터지는데, 아무 말도 못하는 그 억울한 표정! 크흐흐.”
“뭐, 너희들도 언젠가 할 수 있겠지. 잘 보고 배우라고.”
벌처는 그가 이끄는 파티에서는 왕이었고, 신이었다.
마치 황제처럼 떠받들어지는 그는 이 게임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실력만큼 대우 받는다. 참 좋은 세상이야.’
게임을 잘한다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직장인들보다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니.
벌처는 과거에 태어난 천재들을 동정하면서, 이 시대에 태어난 자신을 축복했다.
“저…… 그런데 요즘 유저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분위기?”
“예. 지역 채팅창을 보면 심심찮게 저희 길드의 뒷담화도 올라오고, 커뮤니티에서도 여론이 안 좋아요.”
“쯧쯧쯧.”
벌처는 제 부하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혀를 찼다.
“너, 고금을 통틀어서 절대 바뀌지 않는 진리가 뭔지 알아?”
“뭡니까?”
“약자들은 아무리 모여 봐야 약자라는 거야. 그들은 절대 강자를 이기지 못해.”
“어…… 하지만 역사적으로 약자들이 반란에 성공한 사례들도 있지 않습니까? 푸가초프의 난이라거나, 세포이 항쟁 같은 거요.”
“그렇네. 약자들이 모여서 강자를 이긴 사례가 있긴 있네. 하지만 명심해. 이건 게임이다.”
벌처의 손아귀에 다시 한 번 번개의 창이 쥐어졌다.
파지지지직! 쿠웅!
흩뿌린 번개는 거목을 그대로 쓰러트렸고, 벌처가 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현실에서 아무리 싸움을 잘한다고 해도, 한 명이 백 명을 맨손으로 때려잡을 수 있나? 없어. 하지만 게임에서는? 레벨과 아이템 등급이 압도적으로 차이나고, 게임에 대한 재능이 차이나면 초보자 백 명, 이백 명 정도는 껌이지. 당장 너만 해도 30레벨짜리 마법사 100명이랑 싸우면 질 것 같아?”
“그거야…… 제가 이기죠.”
“큭, 그게 내가 이 게임을 사랑하는 이유지. 실력지상주의.”
벌처는 킥킥거리며 웃더니 턱을 까딱였다.
“알았으면 열심히 레벨 올리고, 아이템 맞출 생각이나 해. 저기 앞에 트리바고나 잡자고.”
검은 벌 길드원들은 트리바고에게 항시 치명타 판정이 뜨는 화속성 마법을 캐스팅했다.
“자, 깔끔하게 일점사로 가자고.”
그들이 가만히 서있는 트리바고를 향해 공격을 날리기 직전.
가려진 나무 뒤에서 누군가가 아주 천천히 걸어 나와 그 앞을 막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