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128화 (128/441)

# 128

힐통령 128화

51장 충돌(3)

“뭐야.”

“저 녀석은……?”

벌처를 비롯한 검은 벌 파티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에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한 인물이 나무 뒤에서 걸어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친절히 잘 가르쳐 줬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배우는 사람 머리가 문제인가 보군.”

헛웃음을 흘린 벌처는 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눈앞의 유저, 퓨리마를 쳐다봤다.

불과 30분 전에 엘프의 숲 캠프에서 자신이 공격했던 녀석이다.

물론 그를 공격한데에 사적인 감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단순히 본보기가 필요했지. 따지고 보면 거기 있던 녀석들 전부 서쪽 구역을 침범했으니까.’

벌처는 퓨리마 파티 하나를 박살내면서 다른 유저들에게도 경고한 것이다.

서쪽 구역으로는 넘어오지 말라고, 이곳은 검은 벌의 영역이라고.

‘마스터는 항상 옳아. 그 분의 교육법이 말했지. 인간을 지배하는 건 공포라고.’

물론 유저들이 정말 검은 벌 길드를 무서워해서 벌벌 떨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게임이니까.

‘하지만 돌려 말하면 게임이기에 더욱 두려운 것도 있는 법이지.’

월급을 털어서 산 장비.

금쪽같은 시간을 들여서 열심히 육성한 캐릭터.

이것들에 집착을 하는 순간, 일반 유저들은 절대로 세계 10대 길드에게 덤벼들지 못한다.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을 일방적으로 강탈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

“뭐, 그런데도 다시 찾아온 용기는 제법 높게 평가…… 음?”

인상을 살짝 찌푸린 벌처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나무 뒤에 숨어있던 이들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퓨리마 파티가 전부가 아니라고?”

“……서른하나, 서른둘.”

“저 숫자면 아까 베이스 캠프에 있던 녀석들 대부분이잖아?”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여긴 우리 검은 벌 길드의 구역이라고 말했을 텐데!”

검은 벌 파티원들이 소리를 지르며 겁을 줬지만, 유저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곧 다가올 전투를 대비할 뿐.

“……야단났군.”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하는 이들과는 달리, 벌처의 인상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

우뚝.

그로부터 30분 전.

엘프 숲의 서쪽으로 향하던 카이가 돌연 몸을 멈추었다.

‘……과연 내가 모든 걸 해결하는 게 옳은 일일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이유는 이와 같은 일을 경험해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나.’

그 때 같은 반의 친구 하나가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카이는 이를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다.

‘선생님에게 신고를 하고, 가해자 녀석들에게도 주의를 줬지.’

그만두라고.

이미 선생님에게는 신고를 했고, 계속해서 괴롭힘이 이어지면 경찰에게도 신고할 것이라고.

아직 어렸던 그는 그것으로 모든 일이 잘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오히려 괴롭힘은 더욱 잦아지고, 심해지고, 교묘해졌다.

결국 몇 주가 지나지않아 따돌림을 당하던 친구는 전학을 가버렸다.

당황한 카이가 그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해줬다.

‘내가 신고를 하고 난 뒤부터는, 학교가 끝난 뒤에도 괴롭힘을 당했다고 했지.’

카이가 그를 도와준 건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이 현재 카이가 행동을 망설이는 이유였다.

스르륵.

결국 검집 위에 올려져있던 카이의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내가 지금 검은 벌 녀석들을 처치해도 변하는 건 없겠지.”

언노운과 검은 벌이 붙는다는 건 흥미로운 주제다.

오크 로드 토벌대에서 붙었던 적이 있으니, 이에 대한 관심은 뜨거울 수밖에 없다.

아마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유저들은 모두 이번 일을 관심 있게 지켜볼 터.

‘하지만 나는 좀 더 근본적인 부분을 바꾸고 싶어.’

만약 언노운의 탈을 쓰고 검은 벌과 싸우면, 근본적인 부분을 바꿀 수 없다.

대중들의 시선에는 검은 벌과 언노운의 2차전으로밖에 안 보일 테니까.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카이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어설프게 건드리면 이 사건은 유야무야 묻혀.’

세계 10대 길드는 서로를 라이벌이라 지칭하며 밤낮도 안 가리고 싸운다.

하지만 그들이 유일하게 힘을 합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이해관계가 일치할 때, 그리고 서로의 밥그릇이 작아질 것 같은 경우.’

사냥터를 통제하면서 갑질을 하는 건 비단 검은 벌만의 행동이 아니다.

덩치 있고 힘이 있는 길드라면 어느 곳이나 하는 것.

한 마디로 검은 벌의 갑질을 어설프게 찌른다면, 세계 10대 길드도 함께 상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싸움은 제법 힘겨워질 것이다.

‘언론 플레이.’

그들은 본인들이 가장 잘하고, 즐겨하는 방식으로 싸움에 임할 테니까.

‘좀 더 길게 보자.’

카이는 눈을 감고 턱을 어루만졌다.

당장 눈앞의 벌처 파티를 응징하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그 이후에 움직일 검은 벌과 세계 10대 길드의 대처까지.

모든 계산을 끝내고 움직여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카이는 피식 웃었다.

‘나도 많이 컸네.’

고등학교 때의 자신이었으면 앞,뒤 가리지않고 녀석들을 응징하겠다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세상의 쓴맛을 본 뒤 혼자서 분을 삭혔겠지.

‘하지만 이제는 달라.’

훌륭한 판단은 경험에서 비롯되지만, 그 경험은 실수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그는 이미 중학생 때 비슷한 경험을 한 번 해본 적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훌륭한 판단을 보여줄 차례겠지.’

눈을 빛낸 카이는 걸음을 옮겼다.

***

카이는 곧장 엘프의 숲 베이스 캠프로 돌아갔다.

이곳을 떠날 때처럼, 사제복의 후드 모자를 그대로 눌러쓴 상태였다.

“어이, 퓨리마. 오늘은 사냥 못 할 것 같은데, 좀 쉬고 올래? 대신 퀘스트 아이템 모자란 거 있으면 말해. 우리 파티 쪽에서 몇 개 구해줄 테니까.”

“그런 일을 당했는데 사냥할 정신이 있겠냐? 우리도 도와줄 테니 오늘은 푹 쉬어.”

‘다들 착하네.’

퓨리마 파티를 둘러싼 유저들은 연신 위로를 건네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유저 하나가 카이를 발견했다.

“아, 저 사제다. 아까 너희 파티 치료해 준 사람.”

그 소식을 들은 퓨리마는 곧장 파티원들을 이끌고 카이에게 다가왔다.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좀 더 일찍 인사를 드렸어야하는데…….”

“아까는 너무 화가나서…… 하늘이 노랗더라고요. 인사가 늦어서 죄송해요.”

“답례로 별 건 아니지만 트리바고의 재료라도…….

“아뇨, 답례는요. 대신 뭐 하나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예, 뭐. 저희가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거라면 성심성의껏 해드리겠습니다.”

퓨리마가 눈을 껌뻑이며 대꾸하자, 카이는 직구를 던졌다.

“만약 오늘 같은 일이 다시 한 번 벌어진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예? 그야…….”

퓨리마는 결국 뒷말을 내뱉지 못했다.

아마 같은 상황이 반복되어도, 오늘처럼 가만히 있을 것임을 스스로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됐습니다. 대답 안 하셔도 돼요.”

카이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퓨리마에게서 등을 돌려, 이번에는 주변의 유저들을 둘러봤다.

‘저들은 착한 사람들이야.’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시간을 쪼개서라도 퓨리마 파티를 도와주고, 위로해 줬을 것이다.

‘아마 퓨리마 파티가 상처 입는 걸 원하지 않았겠지.’

그들이 앞으로도 이 게임을 사랑해 주기를, 캠프의 모닥불에서 함께 수다 떨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 착해. 착하긴 한데…….’

위로나 충고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일종의 훈수와도 같은 거야.’

한 걸음 물러서서 조언을 해주고, 손수건을 건네주는 것이 전부일 뿐.

위로와 충고는 문제 자체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혼자서 무턱대고 행동하는 것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자신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을 통해서 최대한 정답에 가까운 행동을 도출해 낸다.

카이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여러분. 검은 벌 길드가 무섭습니까?”

“그야……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우리 같은 소규모 파티는 정신병이 생길 때까지 괴롭힐 수 있으니까.”

“실력과 자금, 인력, 세력. 모든 걸 갖추고 있는 곳이니 안 무서울 리 없지.”

검은 벌이 지닌 힘을 재차 실감한 유저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럼 앞으로도 쭉 당하면서 살겠다는 겁니까?”

카이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높은 위엄 스탯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는 호소력과 카리스마를 똘똘 뭉쳐 놓은 것처럼 들렸다.

“모든 일은 결국 처음 한 번이 어려운 법이죠. 생각해 보세요.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쉽고, 세 번째가 되면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할 수 있잖아요. 검은 벌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음?”

처음에는 카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던 유저들이 하나둘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검은 벌 길드에게는 머리를 납작 숙였다지만 이 자리에 있는 건 모두 200레벨 이상의 유저들.

‘기본적으로 머리가 없으면 지금 이 시점에서 200레벨을 넘길 수가 없지.’

빠른 사냥 동선, 더 효율이 좋은 스킬과 장비 세트, 몬스터의 약점이나 패턴 분석 능력.

그것들을 스스로 계산하고, 판단할 정도의 능력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이렇게 촘촘한 가시가 박힌 말을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딱 한 번의 용기. 그걸 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검은 벌의 횡포도 멈출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검은 벌에 비해 세력이나 레벨도 부족한데.”

“검은 벌은 마법사들 중에서도 실력자만 뽑는 집단이야. 실력과 재능 차이도 상당해.”

“결국 우리의 저항은 아무 의미도 없는 행동일 뿐이지.”

“의미도 없는 행동이다? 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합니까?”

중학교 3학년 시절.

따돌림을 당하던 친구가 전학을 떠나고, 카이도 저렇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내가 과연 그 친구를 도와준 게 옳은 행동이었을까? 그냥 가만히 있었다면, 괴롭힘도 더 심해지지는 않고 그 아이도 전학가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 후회는 친구가 며칠 뒤 보내준 편지를 읽자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 때를 떠올린 카이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모든 걸 뒤바꿀 힘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게 없더라도 마음만큼은 확실히 전달되니까요.”

누군가가 나를 생각해주고, 응원해 주고 있다는 사실.

그것은 부당함 앞에 놓인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큰 버팀목이 된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 나는…….”

카이의 질문에 퓨리마는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던 유저들은 저마다 느끼는 바가 있는지 입을 꾹 닫았다.

“물론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검은 벌, 녀석들에게도 따끔한 경고가 될 겁니다.”

궁쥐에 몰린 쥐는 고양이조차 문다는 경고가 확실히 전해질 것이다.

카이는 숙연해진 주변을 한 차례 돌아보며 외쳤다.

“확실하게 말하지만, 이번에 당한 것이 자신이 아니라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검은 벌을 멈추지 않으면, 그들은 이 게임이 끝날 때까지 같은 일을 반복할 겁니다. 지금 우리가 나서지 않는다면, 더욱 강력해진 검은 벌을 상대로 누가 나서겠습니까? 아마 그때가 되면…….”

우리를 위해 나서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카이는 뒷말을 삼켰지만, 말을 하지 않아도 유저들은 그 뜻을 알아차렸다.

“자,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처음부터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

원래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다.

물론 미드 온라인에는 이 말을 전적으로 부정하며 자신의 실력을 내뿜는 괴물들도 있다.

하지만 벌처는 아직 그런 실력을 갖춘 괴물이 아니었다.

‘머릿수가 너무 많아……!’

적의 수는 무려 서른둘!

두 명, 아니. 하다못해 세 명까지는 혼자 싸워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달라붙은 여덟 명은 죽었다 깨어나도 무리였다.

퍼어엉!

“크허억!”

눈앞에서 에어로 붐이 터지자 벌처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끄으으윽…….”

손톱으로 나뭇잎과 흙을 벅벅 긁은 벌처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동시에 붉게 충혈된 그의 두 눈은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빠르게 전장을 훑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이 일은 절대 유저들 스스로 벌인 일이 아니었다.

‘이 빌어먹을 상황을 일으킨 주동자가 있다. 정체는 둘 중 하나겠지.’

하나는 같은 10대 길드에 속한 랭커이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일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제 살을 깎아먹는 이런 짓을 할 리는 없어.’

그렇다면 남는 것은 하나뿐이다.

“……언더(Under).”

1위부터 10위까지.

소위 천상계라 불리는 10대 길드는 당연히 열 개의 길드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그 밑의 길드들은 어떻게 될까?

‘죽은 것처럼 조용히 지내던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오버(Over).

세계 10대 길드를 향하고 있을 때, 그들은 조용히 잔잔한 수면 아래에서 때를 기다려 왔다.

10대 길드 중 한 곳이 자멸하거나, 빈틈을 보이기를.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커어억!”

“검은 벌 녀석들. 너희는 세계 10대 길드 중에서도 유독 심했어.”

“누가 사주했냐고? 그런건 없어. 우리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행동한거다.”

“다만 이 시간부로 확실하게 선언한다. 엘프의 숲 사냥터는 누구에게도 통제되지 않는다!”

철옹성 같던 검은 벌의 몸집에, 자그마한 틈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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