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130화 (130/441)

# 130

힐통령 130화

51장 충돌(5)

카이가 설은영의 메시지 주소를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그의 커뮤니티 계정에는 천화 길드의 스카웃 메시지가 몇 개나 도착한 상태였으니까.

‘……설마 3천만 원을 후원했던 사람이 설은영이였을 줄이야.’

나름 충격.

분명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묵묵히 응원하는 은퇴한 60대 할아버지라고 생각했거늘!

‘뭐, 오히려 잘된 건가.’

지금부터 나눠야 할 대화는 천화 쪽에서 자신에게 관심이 없으면 성사될 리가 없으니까.

띠링!

카이가 메시지를 보낸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채팅방에 들어왔다.

[설은영 님이 채팅방에 입장하였습니다.]

설은영이었다.

[언노운 : 반갑습니다.]

[설은영 : 네.]

카이는 말을 돌리지 않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언노운 : 연락을 드린 건 다름이 아니고, 이번 사건에 대해 제안할 게 있어서입니다.]

[설은영 : 이번 사건? 혹시 검은 벌에 관한 이야기인가요?]

[언노운 : 예. 천화 정도의 길드라면 이 사건을 관심 있게 지켜볼 것 같은데, 아닙니까?]

그녀는 잠시 생각 중인지 대답은 10초 정도가 지난 뒤에야 흘러나왔다.

[설은영 : 관심은 있지만, 지켜만 볼 생각이에요.]

“음?”

채팅을 읽던 카이가 순간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천화 정도라면 검은 벌에게 충분히 도전할만한데…… 왜지?’

카이의 질문은 고스란히 채팅방 위에 올라갔다.

[언노운 : 의외군요. 천화 정도라면 검은 벌과 자웅을 겨뤄도 손색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은영 : 천화는 강해요. 하지만…… 검은 벌도 강하죠.]

사실이다.

인성이 어떠니, 이미지가 어떠니 백날을 떠들어봤자, 검은 벌은 스팅을 포함한 마법사 랭커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길드다.

[설은영 : 확실히 검은 벌을 뒤흔들려면 지금이 제격이예요. 길드를 대표해서 그들을 압도적으로 박살내 줄 사람이 있다면요.]

“역시 인재 부족인가.”

카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화 길드는 항상 최고만을 고집해왔다.

당연히 길드에 가입한 대다수의 길드원들은 레벨과 실력이 상당한 수준.

‘하지만 상당하다는 건…… 때에 따라선 애매해지지.’

결국 게임에서의 실력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천화 길드원들의 수준도 결코 낮지는 않았지만, 10대 길드 중 한 곳인 검은 벌의 마법사들과 비교하면 약간 모자란 것이 사실이다.

‘자, 그럼 슬슬 배팅을 걸어볼까.’

눈을 빛낸 카이의 손이 빠르게 가상 키보드를 두드렸다.

[언노운 : 그렇군요. 사실 이쪽의 제안도 그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설은영 : 용병인가요?]

눈치빠른 그녀는 단번에 카이의 용무를 파악했다.

‘역시 설은영…… 아니, 유하린이라는 선례가 있어서인가.’

천화의 용병이 되어 검은 벌을 박살 낸다!

사실 카이가 이와 같은 방법을 떠올린 것은 모두 유하린 덕분이었다.

‘그녀도 천화의 용병이 되어 베이거스를 처치했지.’

레이드 후 유하린과 천화는 쿨하게 갈라섰다.

그 부분이 카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귀찮고 끈질기게 하는 건 사양이었으니까.

[언노운 : 예. 용병 제안입니다.]

[설은영 : 기간은?]

[언노운 : 검은 벌을 10대 길드에서 끌어내리는 순간까지.]

[설은영 : …….]

잠시 말이 없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설은영 : 이런 제안이라면 저야 언제든지 환영이지만…… 이유가 궁금하네요.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거죠?]

[언노운 : 검은 벌과 제 사이가 안 좋은 건 유명한 것 아닙니까?]

[설은영 : 오크 로드 때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거라면, 솔직히 검은 벌은 그에 관해선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사실 검은 벌 입장에서는 아무리 자신들이 키우는 루키라고 해도, 고작 80레벨의 파티가 전멸한 것이 전부인 사소한 해프닝이다.

‘나한테 본격적으로 척살령을 내리지 않은 이유도 그것 때문이겠지.’

그저 사냥터에서 마주치면 죽일 만한 녀석.

검은 벌은 자신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자신은 개인, 그들은 단체라는 크나큰 갭이 존재하니까.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 알려주는거지?’

카이는 문득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채팅 로그를 쳐다봤다.

설은영의 입장에서는 그냥 모르는 척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그 편이 상황을 더 수월하게 풀어갈 수 있는 방법이 되었을 터.

타다다닥.

카이의 손이 빨라졌다.

[언노운 :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검은 벌의 양아치 짓이 마음에 안 들어서요. 그런데 이런 얘기를 저한테 해주시면 오히려 손해 아닙니까?]

[설은영 : 용병 계약을 해놓고 나중에 그 쪽에서 발을 빼면 내가 곤란해져요. 처음부터 확실하게, 끝까지 마무리 지어줄 사람 아니면 난 같이 일 안 해요.]

“호오.”

그녀의 똑 부러지는 태도에 카이는 살짝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대단한 여자야. 괜히 여왕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네.’

잠시 고민을 이어가던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노운 : 계약합시다.]

***

카이가 천화 길드와 맺은 계약은 실로 간단했다.

1. 이 계약은 검은 벌이 10대 길드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순간 해지된다.

2. 언노운은 검은 벌이 10대 길드의 자리에서 내려오기 전까지, 천화의 이름을 달고 그들과 대적한다.

3. 천화에서는 언노운이 처치한 검은 벌 길드원의 머릿수당 5골드를 지급한다.

4. 언노운이 처치한 검은 벌 길드원들이 드랍한 장비의 소유권은 온전히 언노운이 갖는다.

5. 언노운은 선금으로 1,500골드를 지급받으며, 천화가 10대 길드의 자리에 들어선다면 추가적으로 1,000골드의 보너스를 지급받는다.

카이의 입장에서는 의욕이 날 수밖에 없는 계약 내용이었다.

‘개인적인 복수도 하면서, 일만 잘 풀리면 2,500골드!’

그것도 처치한 적을 제외한 돈만 2,500골드다.

현재의 시세대로 계산을 하면 최소 2억 5천짜리 계약이라는 소리!

‘이걸 보면 확실히 내 몸값이 올랐다는 게 실감이 되네.’

아마 아오사와의 전투 이전에 계약을 맺었다면, 이 조건의 반에 반도 따내지 못했을 것이다.

카이는 그 부분에 대해 절대적인 확신을 가졌다.

‘설은영은 그날 화이트홀까지 와서 허탕을 쳤지.’

게다가 이미 죽었음에도 위엄을 뿜어내는 아오사의 거체를 확인했다.

당연히 녀석을 솔플로 해치운 자신에 대한 관심이 커졌을 수밖에 없다.

‘오케이. 내 인생 순항 중.’

설은영과의 구두계약이 끝나자 천화는 발 빠르게 유명한 게임 기자들을 매수했다.

그들은 마치 언노운의 천화 합류를 자신들이 알아낸 특종인 것마냥 커뮤니티에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

[특종! 언노운, 천화에 용병으로 가담하다.]

[검은 벌, 게 섯거라! 검은 벌의 턱밑까지 추격한 천 송이의 꽃.]

[유하린에 이어 언노운까지. 과연 천화의 영업력은 그 끝이 어디인가?]

[언노운의 용병 계약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검은 벌. 과연 그들의 대처는?]

[본격적으로 10대 길드 자리에 도전한 천화. 과연 그들의 전력은 어느 정도인가?]

커뮤니티는 다시 한 번 난리가 났지만, 카이는 그 반응을 보지 않고 인터넷 창을 종료했다.

약속 장소에 손님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저희가 늦었나요.”

“별로. 약속 시간은 아직 5분 남았으니까요.”

설은영은 워킹이라도 하듯 쭉 뻗은 다리를 시원하게 내딛으며 다가왔다.

평소처럼 시크한 표정이었지만, 그녀를 자주 보아온 사람이라면 지금 그녀가 얼마나 흥분한 상태인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아가씨, 오늘 되게 기분 좋아 보이시네.”

마침 이 자리에도 그녀의 상태를 꿰뚫어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카이를 쳐다보더니 길거리에서 연예인과 마주친 사람처럼 들뜬 표정을 지었다.

“우와, 진짜 언노운이잖아! 저 나중에 사인 하나 받아가도 돼요?”

카이는 목소리의 주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보이드.’

마법사 랭킹 14위의 플레이어임과 동시에 천화의 대표적인 인물.

에이스라고 불리기에는 다소 손색이 있었지만,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천화도 없었을 것이다.

카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인은 없지만, 원하신다면 해드리죠.”

“신난다, 아자!”

“시끄러워.”

한 차례 보이드를 흘긴 설은영은 가만히 언노운을 쳐다보더니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확인해봐요.”

“그럼 잠시 실례를.”

그녀가 카이에게 건넨 아이템은 두 개였다.

하나는 선금인 1,500골드가 들어있는 골드 주머니.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장비에 붙일 수 있는, 천화 길드의 엠블렘이었다.

“혹시나해서 여쭙는건데, 이거 한 번 붙이면…….”

“어느 도시, 어느 마을의 대장간에 가도 쉽게 제거할 수 있으니 걱정 말아요.”

“다행이네요.”

카이가 이것은 계약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자 설은영이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카이가 엠블렘을 제 왼쪽 가슴에 붙이자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약간 감동마저 먹은 얼굴.

그녀가 잠시 손을 들어 카이를 멈춰 세웠다.

“잠시만요. 스크린 샷좀…….”

“…….”

찰칵, 찰칵.

기분 좋게 촬영을 마친 설은영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보기 좋네요.”

“예?”

“잘 어울려요.”

“아, 예…….”

카이는 뭐라고 쉽게 반응할 수 없는 그녀의 칭찬에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제 차례! 사인해 주세요!”

“…….”

사람을 정신없게 만드는 페어에게 시달린 카이는 적당히 사인을 해준 뒤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

“일은 언제부터 시작하면 됩니까?”

“계약은 선금을 지급한 순간부터 효력을 발휘해요. 그러니 지금부터 아무 때나 본인이 원하실 때 일을 하세요.”

“그거 좋네요.”

자신이 원하는 때 일을 한다.

이것보다 편한 것은 없는 법이다.

“그럼 이만.”

카이가 등을 돌려 떠나려 할 때, 보이드의 음성이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할 말이 있는데.”

“……?”

카이가 몸을 돌리며 쳐다보자 그는 방긋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검은 벌에 속한 마도사, 상대해 보신 적 있습니까?”

“……한 번은.”

사실은 두 번이다.

한 번은 오크 로드 토벌대에서,

두 번째는 불과 몇 시간 전, 언노운이 아닌 사제 카이의 모습으로 상대해봤다.

“아아. 클라드였나요. 확실히 끼가 보이는 친구였죠. 그래서 검은 벌에서도 작정하고 밀어주던 루키였고. 그런데…… 저는 마법사가 아니라, 마도사를 상대해 본 적 있냐고 질문했습니다만.”

마도사.

200레벨이 넘은 마법사가 공통적으로 획득하는 칭호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피차 말 질질 끌기 싫어하는 성격 같으니 직설적으로 말하죠. 당신한테 관심 있습니다.”

“……!”

카이는 전신에 닭살이 돋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뒤로 몇 발자국을 물러섰다.

심지어 보이드의 옆에 있던 설은영조차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보이드를 흘겼다.

“에, 엥? 아니 분위기가 왜 이래요?”

보이드는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당황하더니 이내 손사래를 쳤다.

“아니, 대체 무슨 오해들을 하는 겁니까! 그냥 마법사로서 흥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한 사람의 마법사이자 천화 길드의 마법병단 단장으로서 당신과 대련을 해보고 싶다는 뜻입니다.”

갑자기 게이가, 아니 보이드가 진중한 눈빛을 드러내며 말했다.

요컨데 자신의 실력을 시험해 보고 싶다는 뜻이다.

‘……하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

누구든 새로운 칼을 손에 넣으면 휘둘러보고 싶기 마련이니까.

그 마음은 설은영도 마찬가지인지, 그녀도 굳이 보이드의 무례를 말리지는 않았다.

“뭐, 이건 계약 내용에 없던 조건이지만…….”

카이가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시원시원하시네요.”

눈을 빛낸 보이드의 양손이 아주 자연스럽게 각기 다른 마법들을 캐스팅했다.

“그럼 가겠습니다.”

***

보이드와 카이의 대련은 예고조차 없이 이루어졌다.

물론 그건 카이의 입장에서였다.

보이드는 이 자리에 오던 순간부터 대련을 신청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

그렇기 때문에 보이드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준비도 없이 나랑 랭킹 14위의 마도사랑 붙었는데 이런 결과가 나오지……?’

결과는 언노운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보이드는 대련의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한 번의 치명타도 제대로 꽂아 넣지 못했다.

심지어 운 좋게 적중시킨 자신의 마법이 별다른 데미지를 못 입히는 것에는 충격마저 느꼈다.

‘마법사와 극상성인 존재다. 대체 마법 방어력이 얼마나 높은 거야?’

툭, 툭.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낸 보이드는 떠나가는 언노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설은영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아가씨. 몇 분 걸렸습니까?”

“4분.”

“……14분이요?”

“4분.”

“아! 혹시 대련이 너무 흥미진진해서 4분처럼 짧게 느껴졌다, 뭐 그런 소리인가요?”

“아니, 그냥 4분.”

“…….”

랭킹 14위의 마도사가 일방적인 패배를 당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4분!

보이드는 참담한 심정을 느꼈지만, 이내 헤실헤실 웃기 시작했다.

“미친 거야?”

“아뇨.”

“그런데 왜 웃어. 져놓고. 뭘 잘했다고.”

“그야 기대되니까요.”

보이드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씨익 웃었다.

“검은 벌 놈들. 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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