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힐통령 131화
52장 천적(1)
“…….”
보이드와의 대련 후, 길을 걸어가던 카이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그는 설은영과 보이드가 시야에 잡히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참아왔던 숨을 뱉어냈다.
“후아, 위험했다.”
이어서 제 옆구리를 문지르는 그는 조금 전의 대련을 떠올렸다.
‘역시 게임에서는 레벨을 무시할 수 없구나. 완전 깡패잖아?’
현재 카이의 마법 방어력은 매우 높았다.
빈말이 아니라, 미드 온라인에서 최소 백 명 안에는 들어갈 자신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비정상적인 마법 방어력마저도 마법사 랭킹 14위인 보이드의 마법을 완벽하게 막아낼 수는 없었다.
‘이런 기회는 흔치않으니 가능하면 조금 더 오랫동안 대련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더 흐르면 버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문에 신성 폭발까지 사용하며 그의 허를 찔렀고, 단숨에 대련을 끝내 버린 것이다.
‘아마 보이드에게 조금의 시간만 더 내줬으면, 신성 폭발의 속도에 적응했을 거야.’
그랬다면 지는 쪽은 카이였을 것이다.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였다.
아무리 카이의 스탯이 말도 안 되게 높다지만, 보이드와 그의 레벨 차이는 100이 넘었으니까.
‘……내가 졌으면 난리날 뻔했어.’
용병으로 천화와 계약한 카이의 입장에선 매우 좋지 못한 일이었다.
그 어떤 고용주도 자신이 거금을 들여 구매한 용병이 무능하다는 것을 반기지 않을 테니까.
카이는 답답한 마음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쩝. 보이드를 상대로 이렇게 고전한다는 말은…….”
검은 벌에 소속된 마법사 랭커들을 상대로도 마찬가지라는 소리다.
‘그 중에서도 스팅이라면 더더욱 힘들겠지.’
검은 벌의 마스터인 스팅은 인성 문제로 자주 구설수에 오르지만 실력만큼은 확실하다.
‘누가 뭐라해도 마법사 랭킹 3위의 자리는 딱지치기로 얻을 수 있는게 아니지.’
카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민했다.
‘지금 스팅과 싸우면 질 가능성이 훨씬 높아.’
카이는 그 사실을 담담하게 인정했다.
동시에 자신에게 대련을 신청한 보이드에게 고마운 감정을 느꼈다.
‘그의 말이 맞아. 나는 마도사와의 대련 경험이 부족했어.’
보이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에 대한 경고를 해주기 위해 대련을 신청한 것이다.
마도사를 우습게보지 말라고.
그리 쉬운 존재들이 아니라고.
‘내가 지닌 마법 방어력이면 마법사 상대로는 지극히 유리한 게 맞아.’
하지만 200레벨 이상의 마도사들.
그중에서도 상위 랭커들을 상대로는 아직 부족했다.
“그럼 뭐, 준비해야지.”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철두철미하게.
카이는 엘프의 숲 안쪽으로 들어가 검은 벌을 상대하는 대신, 발걸음을 돌렸다.
그의 신형은 순식간에 엘프의 숲을 떠나갔다.
***
엘프의 숲 사건이 터진 후, 검은 벌은 잠정적으로 모든 대외 활동을 중지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굉장한 결단이었고, 손해였다.
다른 10대 길드가 계속해서 나아갈 때 그들은 제자리 걸음을 해야 했으니까.
뿌드득.
그것이 스팅의 기분을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지금 그가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기분 더러운 사람처럼 보이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 빚은 아주 톡톡히 받아내겠다. 이번 일에 연관된 놈들, 싹 다 박살 내주지.”
게다가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뭐? 천화?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언더의 찌끄레기가…… 감히 나에게 도전을 해?’
자신은 신경조차 쓰지않건만, 이미 커뮤니티의 유저들은 둘의 전력을 열심히 비교하는 중이었다.
거기서 스팅은 더더욱 열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비교 분석표가 말도 안 되었기 때문!
“이 멍청한 새끼들! 검은 벌을 뭘로 보고! 이쪽의 정예 전투원이 나서면 천화 따위는 하루 만에 모두 쓸어버릴 수 있다!”
신경질적으로 인터넷 창을 꺼트린 그는 길드 채팅을 통해 명령했다.
[검은 벌을 적대하는 모든 길드, 유저, 랭커. 구분하지 말고 모두 짓밟아라!]
아주 단순한 명령!
하지만 그 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기본 원칙은 결투 신청이라고 했지?”
“어, 이미지 때문이지. 하지만 그 중에서 끝까지 발악하는 놈이 있다면…….”
“그냥 PK하라 이거지? 오케이,”
“그리고 천화 쪽 애들이랑 엘프의 숲에있던 놈들은 같이 다니는 파티원까지 모조리 척살.”
“쉬워서 좋네.”
말 한마디로 인해 검은 벌 500마리가 세상에 풀려났으니까.
***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검은 벌 문제로 떠들썩하던 커뮤니티는 생각보다 잠잠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결과였다.
‘……꿀꺽, 미친 놈들. 자기네들 말 안 들으면 PK까지 저지르잖아?’
‘이럴 땐 쥐 죽은 듯 지내는게 제일이지.’
‘다른 10대 길드에서는 끼어들지 않는 건가?’
‘이 새끼들, 뭔가 받아 쳐먹었네. 쳐먹었어.’
‘엘프의 숲 해방군 녀석들만 불쌍하게 되었군.’
검은 벌의 압도적인 힘.
그리고 그 힘이 휘두르는 폭력!
그 앞에 모두 숨을 죽이고 몸을 바짝 낮춘 것이었다.
그만큼 검은 벌이 행한 일은 파격적이었고, 충격적이었다.
서른 개의 일반 길드가 그들에게 해체당했으며, 두 개의 언더 길드가 그들에게 무릎 꿇었다.
그 과정에서 죽어나간 랭커와 유저들의 수는 헤아리는 것이 무의미할 지경!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자, 사람들은 생각했다.
‘쩝. 결국 10대 길드 자리는 검은 벌 놈들이 사수하겠네.’
‘천화 녀석들은 초반에는 잘 싸우는 것 같더니, 요즘 계속 밀리는데?’
‘소식을 들어보니 아예 엘프의 숲에 포위된 것 같던데…….’
‘언노운을 영입했다더니, 어째 이 상황이 될 때까지 코빼기도 안 보이지?’
천화 길드는 엘프의 숲 해방군과 함께 손을 잡고, 검은 벌에 대항했다.
하지만 확실히 검은 벌의 전력은 천화보다 강력했다.
여태까지는 설은영의 지휘와 전술로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한계였다.
“아카시아 2팀, 검은 벌 파티와 조우했습니다!”
“젠장! 마법사 랭킹 11위, 돌풍의 키라엘 발견!”
“검은 벌 새끼들, 아예 작정하고 포위망을 형성했어.”
“여기도, 저기도 전부 벌 새끼들 천지라고!”
위기를 기회로.
스팅은 그 말을 본인의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더러운 성질머리 아래에 숨겨져있던 그의 놀라운 지휘 능력이 세상에 드러낸 것이다.
[와, 이걸 스팅이?]
[단순히 성질 더러운 새끼인 줄 알았는데, 지휘도 잘하는 성질 더러운 새끼였네.]
[설은영이랑 지휘 스타일 상당히 다르긴 한데, 이것도 나쁘진 않은 듯.]
그의 평가가 다시 한 번 상승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만큼 스팅은 평소 자신을 고깝게 보던 이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휘를 보여주었다.
“크크큭. 멍청한 새끼들. 애초에 머리가 나쁜데 마법사 랭킹 3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역시 마스터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여태까지 설은영을 최고의 지휘관이라 부르는걸 보고 심기가 불편했는데, 이번 기회에 마스터의 능력이 공개되어서 기쁩니다.”
검은 벌의 수뇌부는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건 현재 상황을 읽을 수 있는 이라면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 한 번 볼까…….”
엘프의 숲 서쪽 구역.
검은 벌의 작전 지휘 본부.
숲과 어울리지 않는 호화스러운 소파에 앉아 있는 스팅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도를 훑었다.
“녀석들을 숲의 중앙으로 모는 것은 성공했고. 포위망은 명령대로 단단히 형성했겠지?”
“예. 천화와 해방군 놈들은 이제 단체로 로그아웃을 하거나 마을 귀환 주문서를 사용해서 도망치지 않는 한,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크큭. 오히려 도망쳐 주면 고맙지.”
“그러게 말입니다. 겁쟁이라는 칭호와 함께 저희의 승리를 공고히 다질 수 있을 겁니다.”
“후후.”
스팅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 검은 벌의 위상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그의 지도에는 치열한 전투 끝에 살아남은 200마리의 벌들이 떠올라있었다.
‘천화 놈들. 그래도 언더 중에서는 그나마 쓸 만하다더니, 이름값은 하는군.’
설마 자신의 길드원들을 300명이나 로그아웃 시킬 줄이야.
적이지만 설은영의 지휘와 전술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명성도 오늘부로 끝이다.”
길드 채팅을 활성화시킨 스팅이 느긋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포위망을 좁혀라. 발견하는 적들을 모조리 처치하고, 설은영은 살려서 데려오도록.]
패장에게 걸맞는 죽음을 직접 내려줄 생각이었다.
명령이 떨어진 순간 지도 상의 모든 길드원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팅은 그 모습을 보며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손짓 하나로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다니. 역시 나의 길드는 최고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놓은 검은 벌은 세계에서 10손가락 안에 드는 세력이 되었다.
덕분에 이제 그는 길드원들이 적을 해치우는 것을 지도상으로 확인만 할 수 있었다.
스팅은 그 사실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런 여유야말로 지배자가 갖춰야 할 소양이라고, 그는 평소부터 생각해 왔으니까.
‘나 정도 되는 인물이 먼지를 묻혀가며 잔챙이들을 상대해 줄 필요는 없지.’
지도 상의 길드원들이 점점 서로간의 거리를 좁힌다.
그것은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다는 증거!
‘저들 사이의 틈이 없어지는 순간, 이번 사건도 막을 내리겠군.’
스팅의 얼굴에 깃든 것은 승리한 지휘관의 기쁨이나 희열이 아니었다.
여유로움.
마치 당연히 이래야 한다는 것처럼 한껏 여유롭고 느긋한 표정이 그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음?”
그런 그의 얼굴에 아주 자그마한 균열이 발생했다.
눈매를 살짝 찡그린 스팅은 지도의 어느 부분을 노려보더니 부마스터에게 손짓했다.
“마스터, 부르셨습니까?”
랭킹 6위의 마법사.
빙제(氷帝) 라우스였다.
스팅은 곧장 그에게 질문했다.
“라우스. 26조의 멜턴과 슈메른의 신호가 끊겼다. 어떻게 된 거지?”
“예? 그럴 리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고개를 갸웃거리며 길드 창을 떠올린 라우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엇! 정말이군요. 복병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포위망의 바깥 부분을 맡고 있는 저들의 신호가 끊길 리가 없…….”
그때였다.
검은 벌의 전투조가 아닌, 지휘부와 정보부의 길드원들이 하나둘 보고를 올리기 시작했다.
“슈르르. 로그아웃! 사망입니다!”
“24조의 키미키미 통신 두절!”
“27조의 가드론의 상태가 전투 상태로 변했습니다! 앗, 지금 막 로그아웃되었습니다!”
“…….”
속속들이 들려오는 비보(悲報)에 라우스와 스팅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무래도 복병…….”
“이제 와서 복병이라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포위망을 형성하기 위해 엘프의 숲 외곽에서부터 일부러 놈들을 중앙 쪽으로 몰아가면서 싸워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양동작전이라고?”
설마 자신의 전술이 설은영에게 읽혔다는 걸까?
스팅의 손톱이 고급 소파의 손잡이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팅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조용히 물었다.
“……복병의 수는?”
외곽 지역을 이렇게 빠르게 정리할 정도라면, 못해도 2개 파티 이상이다.
‘최소 8명. 많으면 20명까지는 생각해야하는 건가.’
전술을 읽혔다는 것에 잠시 흥분했을 뿐, 마음을 가라앉히자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아무리 복병이 존재한다고 해도 이 상황을 뒤집을 수는 없다.’
아무리 전쟁의 판도를 뒤집는 것이 전술이라지만, 그 전술도 압도적으로 강력한 상대와 머릿 수를 당해내지는 못하는 법이다.
“그, 그게…….”
무언가를 확인한 후 급히 사색이 된 라우스.
이에 뭔가 이상함을 느낀 스팅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 반응은 뭐지? 몇 명인데 그러냐.”
그의 재촉에 천천히 고개를 든 라우스의 오똑한 코 위로, 한 줄기의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사, 사망한 녀석들에게 문자가 왔는데…….”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라!”
“한 명! 적은 단 한 명입니다!”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스팅이 소리쳤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은 라우스는 잔뜩 울상을 지은 표정으로 꿋꿋하게 자신의 말을 마쳤다.
“……언노운. 그놈입니다. 외곽에서부터 저희 길드원들을 사냥하고 다니는 건, 언노운입니다!”
천화 길드에 용병으로 가담한 언노운이, 처음으로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