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힐통령 132화
52장 천적(2)
설은영은 지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상황은?”
“어…… 선의의 거짓말과 묵직한 팩트. 어느 쪽으로 해드릴까요?”
보이드가 난감한 표정으로 묻자, 그녀는 칼같이 대꾸했다.
“묵직한 걸로.”
“하아…… 아무래도 이번 전투, 많이 힘들어 보입니다.”
말을 꺼내는 보이드도 기분이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이곳저곳이 그을려 있고 먼지가 뒤덮인 로브를 보면 그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그의 겉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설은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언노운은?”
“아가씨 연락도 안 받는데 제 연락을 받겠어요? 거, 사람 참 그렇게 안 봤는데…….”
보이드가 설은영의 눈치를 살피며 뒷말을 삼키자, 그녀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걸까?’
언노운의 느닷없는 연락 두절은 그녀와 천화에게 제법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사실 검은 벌이 천화를 대하기 시작한 건, 그들이 언노운을 영입한 순간부터였으니까.
‘물론 계약서상에는 본인이 원할 때 사냥을 해도 된다고 써놨지만…….’
설마 본진이 다 털릴 때까지 나서지 않을 줄이야!
설은영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을 때, 해방군 쪽의 유저들이 다가오며 소리쳤다.
“검은 벌 놈들이 갑자기 포위망을 빠른 속도로 좁히고 있습니다!”
“갈 곳은 없습니다! 놈들에게 완전히 포위당할 때까지의 예상 시간은 15분 정도!”
“이대로라면 여기서 다 죽게 생겼어요!”
“어서 지시를!”
“…….”
꽈악.
설은영은 자신을 어미새 바라보듯 쳐다보는 이들의 시선에 아랫입술만 질끈 깨물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기가 막히게 지휘를 하고, 전술로 검은 벌 녀석들의 옆구리와 뒷통수를 몇 번이고 때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본적인 스펙 자체가 차이 났다.
‘세계 10대 길드의 저력, 역시 대단해.’
나름 최고의 인재들만 모아놨다는 천화의 정예 공격대도 검은 벌의 정예 앞에선 한 수 접어줘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죽을 수는 없는 일.
눈을 날카롭게 치켜뜬 설은영이 입을 크게 벌렸다.
“이대로 왼쪽을 뚫는다! 그곳에 위치한 숲의 폭포 지형을 끼고 마지막 방어전을…….”
[오른쪽으로.]
“뭐?”
설은영은 갑작스럽게 제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황급히 보이스톡 프로그램을 확인했다.
‘언노운?!’
쪽지로 자신의 보이스톡 주소를 보내놨지만, 일주일째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그가 지금 막 통화를 건 것이었다.
[뭐예요? 지금 일주일 만에 나타나서 갑자기 한다는 소리가…….]
[시간 없습니다. 지금 당장 모든 사람 데리고 지도상의 동쪽 방향으로 달리세요. 좌표는 쪽지를 확인하세요.]
[이유는?]
[그곳의 포위망, 제가 뚫어놓겠습니다.]
[……동쪽에서 만나죠.]
뚝.
통화는 끊어졌고 여전히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설은영의 눈빛으로 아주 희미한 희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대로 동쪽을 뚫는다! 따라와!”
“예? 동쪽이라고요? 하지만 그곳은…….”
“그곳을 뚫으면 숲의 중앙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기에 포위망이 가장 두텁습니다. 검은 벌은 절대 저희가 그곳을 뚫는 걸 허락해 주지 않을 거예요. 다시 한 번 재고를…….”
“아니, 우린 동쪽으로 간다.”
설은영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끝맺었다.
‘내 눈이 틀렸다면, 결국 난 여기까지겠지.’
그녀는 항상 과감한 결정을 좋아했고, 한 번 뜻을 세우면 굽히지 않고 끝까지 밀고나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언노운이 만약 나를 속이거나, 처음부터 뒷통수를 때릴 생각이었다면…… 그를 믿은 내 안목이 잘못된 거야.’
딱히 언노운을 믿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보아왔고, 그를 선택한 자신의 안목을 굳게 믿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
나무와 덩굴 줄기가 배경이 되어 빠르게 뒤로 사라졌다.
숲을 말 그대로 질주하던 카이는 또다시 새로운 목표를 포착했다.
‘둘.’
전방의 적을 발견한 즉시, 카이의 눈이 견적을 뽑기 시작했다.
‘블루마린으로 장식한 롱 스태프, 학자 브리드만의 로브, 자줏빛이 감도는 월계관…….’
카이라고 미드 온라인에 존재하는 모든 아이템을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포이즌 마스터 스킬로 적탑에서 뺑뺑이를 돌며 올린 안목은 현재 중급 9레벨!
웬만한 아이템의 착용 제한 정도는 단번에 파악이 가능한 상태였다.
‘각각 215레벨, 220레벨 정도겠어.’
견적을 뽑는 순간, 카이의 신형이 바닥을 미끄러지듯 달려 나갔다.
“음? 무슨 소리가…….”
마법사 하나가 고개를 돌린 순간, 그의 목덜미에 날카로운 검이 박혔다.
“꾸르륵……!”
“데이먼!?”
동료 마법사가 당황했지만, 그 또한 녹록치 않은 실력의 소유자!
순식간에 땅을 박차고 뒤로 물러서면서, 마법을 캐스팅한다!
“언노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스 필드(Ice Field)!”
쩌저저적!
마법사의 손 끝에서 튀어나온 새하얀 서리는 순식간에 바닥을 얼리며 카이에게 쇄도했다.
대상의 발을 얼려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속박 스킬!
‘이 다음의 연계기로는 역시 그것들이겠지.’
파지직, 화르르륵!
가장 강력한 데미지를 자랑하는 화염, 전격 스킬을 동시에 캐스팅하는 마법사!
그것이야말로 몇 안 되는 마법사에게 내려진 축복, 더블 캐스팅이었다.
‘박살을 내주지.’
하지만 그러한 각오도 잠시 그는 제 눈을 의심했다.
“웃차.”
아이스 필드를 무시한 채 자신에게 걸어오는 언노운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
“뭐, 뭐라고? 어떻게?!”
“동료애가 그렇게 부족하면 쓰나.”
카이는 엄지손가락으로 등 뒤를 가리켰다.
그곳엔 카이의 검에 목을 꿰뚫린 마법사가 카이의 다리 대신 얼음에 묶인 상태였다.
‘이 자식, 설마 얼음이 뻗어나가는 그 짧은 시간에 데이먼을 방패로……?’
그야말로 소름 돋는 반사신경!
하지만 이에 감탄을 할 사이도 없이, 카이가 마법사에게 달려들었다.
“크윽! 비록 아이스 필드가 빗나갔다지만…….”
이 정도의 근거리에서는 다음 두 개의 공격 스킬이 빗나갈 리는 없다!
그렇게 확신한 마법사가 순식간에 파이어볼과 라이트닝 스피어를 쏘아냈다.
그리고 자신에게 날아드는 두 개의 스킬을 보는 순간, 카이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라이트닝 스피어의 속도는 파이어볼보다는 빨라. 그렇다면…….’
카이는 그 즉시 허리를 강제로 비틀어 몸의 궤적을 바꾸었다.
쐐애애액!
덕분에 그의 몸을 허무하게 빗겨나가는 라이트닝 스피어!
하지만 그와 같은 신들린 움직임을 두 번이나 연속해서 펼칠 수는 없었다.
‘굳이 모든 스킬을 피할 필요는 없지!’
동시에 시전되는 칼날 쇄도!
퍼어엉!
마법사가 시전한 화염의 구는 회전하는 검날 앞에 갈기갈기 찢어졌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마법사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라이트닝 스피어는 말 그대로 번개로 이루어져있다.
물론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기에 실제의 빛처럼 빠르지는 않으나, 저렇게 자연스럽게 피해낼 만한 속도 또한 아니다.
‘아니, 한 번은 요행이라고 볼 수도 있어. 하지만…….’
파이어볼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물론 주문의 속도와 정확도는 시전한 마법사의 수준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가 시전하는 파이어볼은 웬만한 메이저리거의 투수가 던지는 공처럼 재빨랐다.
못해도 최소 시속 120㎞를 넘어가는 강력한 주문!
‘그걸 검을 휘둘러서 정확히 베어버린다고?’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괴물이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마법사는 살기 위해 발악했다.
‘젠장, 여기서 죽으면 레벨과 아이템이 모두 위험…….’
곧 다가올 죽음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
그건 고레벨 유저의 본능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카이는 그 본능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고, 또 이용할 줄 알았다.
‘의욕을 잃었다. 블링크를 써서 도망치겠지.’
카이는 곧장 공격을 하기보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서 시야의 위치를 높였다.
동시에 왼쪽 손을 언제든지, 어느 방향으로 사출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건 지난 몇 시간 동안 마법사들을 잡으며 자연스럽게 녹아든 그의 경험이었다.
“블링크!”
예상대로 마법사는 블링크를 사용해 저 멀리서 등장했다.
그와 동시에, 카이는 왼손을 흩뿌렸다.
“신성 사슬!”
촤르르르륵!
순식간에 뻗어나간 사슬은 한 번 노린 먹잇감을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카이의 괴물 같은 집중력과 반복된 노력이 만들어낸 압도적인 스킬 컨트롤!
“이, 이게 무슨!”
마법사는 자신의 발목에 감긴 사슬을 떨쳐내려고 온갖 스킬을 퍼부었지만, 소용없었다.
‘괜히 레어 등급 스킬이 아니란 말이지.’
다음 순간 카이는 사슬을 잡아당기더니 딸려온 마법사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동료까지.”
푸욱!
빙결 상태에 빠진 마법사까지 정리한 카이는 전리품을 챙기며 지도를 펼쳤다.
“후우, 이제 동쪽 포위망은 대충 정리가 끝났나.”
지난 두 시간 동안 열심히 뛰어다닌 결과, 50여 명의 마법사를 쓰러트릴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동쪽을 포함 동북, 동남쪽 포위망 전부를 혼자서 무너뜨렸다고 해도 될 수준!
‘제법 깜짝 놀랐던 때도 있었지만…….’
가끔씩은 검은 벌의 마법사들이 함정을 파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순간도 있었던 것이다.
‘뭐, 주문 저항의 피부와 바다의 폭군 덕분에 크게 위험하지는 않았네.’
지금 카이가 노리는 건 단 두 가지였다.
자신이 허물어놓은 이 동쪽 포위망으로 천화와 해방군을 모두 탈출시키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검은 벌을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것.’
주먹을 꽉 쥔 카이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일주일 전, 보이드와의 대련에서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즉시 카이는 엘프의 숲을 떠났다.
‘사냥을 하기 위해서였지.’
카이는 조용히 자신의 스탯 창을 활성화했다.
[카이]
직업 : 태양의 사제
레벨 : 151
칭호 : 신의 대리자
생명력 : 34,100
신성력 : 59,400
능력치
힘 : 600 체력 : 341
지능 : 248 민첩 : 256
신성 : 594 위엄 : 185
선행 : 163
독 저항력 +30
마법 저항력 +70%
모든 공격력 6% 증가
모든 속도 6% 증가
일주일 만에 무려 28레벨을 올린 뒤에 나타난 카이!
기존에 모아놨던 105개의 잔여 스탯과, 레벨을 올리고 새롭게 획득한 140개의 스탯.
그것은 모두 힘과 신성 스탯을 위한 투자에 소모되었다.
‘덕분에 힘 스탯이 드디어 600!’
돈이 재벌 수준으로 차고 넘쳐서 체력과 민첩 스탯을 장비로 커버하는 것이 아닌 이상, 보통의 전사들은 레벨 업을 할 때마다 올힘 대신 2~3정도의 스탯을 투자한다.
한 마디로 지금 카이의 힘 스탯은 200레벨 이상의 순수 전사와 비교해도 동등한 수준!
‘그리고 이번 사냥의 가장 큰 수확은 내 성장이 아니야.’
거기까지 생각이 마쳤을 때, 일련의 무리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오는 길 편안하셨는지?”
그들은 천화 길드와 해방군 쪽의 남은 인원들이었다.
그 수는 다 합쳐도 겨우 100명 남짓.
설은영이 그 말을 받았다.
“정신없었어요. 포위망이 너무 빠르게 좁혀져서…… 그나저나 동쪽 포위망은?”
“정리 끝났습니다. 안전해요.”
카이의 말에 설은영은 물론, 그 말을 들은 모두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동쪽 포위망을 혼자서 무너트렸다고?’
‘허세 부리는 거 아니야?’
‘하지만 실제로 이곳까지 올 동안 적은 한 명도 못 만났고…….’
‘언노운이 이 정도 수준의 실력자였나?’
다양한 눈빛들이 카이에게 날아들었다.
대부분이 존경과 감탄, 경악의 눈빛들!
“합류했으니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논의해 봐요.”
설은영의 말에 카이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아뇨. 천화와 해방군 여러분께서 지금까지 열심히 싸워주셨으니 마무리는 제가 짓겠습니다.”
“뭐라고요?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강화 소환.”
딱, 딱!
카이가 손가락을 두 번 튕기자, 그의 펫들이 소환되었다.
언제나처럼 늠름한 블리자드.
‘그리고…….’
카이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곱게 휘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이번 사냥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 중 하나.
바로 미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