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133화 (133/441)

# 133

힐통령 133화

52장 천적(3)

카이가 미믹과 블리자드를 데리고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한 줄기의 음성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거기 서요.”

“……?”

고개를 돌린 카이는 한기가 풀풀 날리는 설은영을 마주할 수 있었다.

‘왜, 왜 이래?’

마치 어머니가 진심으로 화가 났을 때를 보는 듯한 기분!

이에 살짝 겁을 먹은 카이가 질문했다.

“……왜 그러십니까?”

저벅 저벅.

카이의 코앞까지 다가온 설은영은 도도한 표정으로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나름 무섭게 보이려고 지은 표정이 분명할진데, 안타깝게도 미모에 묻혀서 그냥 예뻐 보였다.

“지금 저희보고 용병에게 모든 걸 맡긴 뒤, 얌전히 구경만 하라는 소리인가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알아요. 나름 배려해 줬다는거.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배려받을 정도로 약하지 않아요.”

“으음…….”

카이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기 위해 그녀의 뒷편을 쳐다봤지만,

보이드는 자신은 빠지겠다는 듯이 두 손을 내저으며 어깨를 으쓱거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결국 카이는 두 손을 들어올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좋아요. 함께 갑시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 약속합시다.”

“뭐죠?”

“제가 도망치라고 하면, 이유를 불문하고 도망칠 것.”

“…….”

설은영은 잠시 카이의 의도를 읽으려는 듯 그를 빤히 쳐다봤지만, 용의 형상을 본딴 투구는 그의 눈빛을 철저하게 감췄다.

“딱히 저희를 걱정해서 해주는 말은 아닌 것 같고…… 뭔가가 있나 보네요.”

“예. 말씀드리기는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만.”

“좋아요.”

설은영은 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딱 한 번. 이유를 묻지않고 후퇴 명령에 따라줄게요. 제 이름을 걸고 약속하죠. 됐나요?”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북쪽으로 우회해서 검은 벌의 뒤를 치는 방향으로 작전을 진행할게요. 아! 그러면 진형도 완전 새롭게 짜야…….”

설은영이 혼자 중얼거리며 멀어지자, 카이는 블리자드를 쳐다보며 울상을 지었다.

“블리자드, 어떻게 해. 우리 집안 여자들만 무서운 게 아닌가 봐.”

“크륵.”

블리자드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마치 이제 알았냐는 듯이.

***

“하드록, 50미터 앞에서 어스 월 전개.”

“적들은 우측으로 빠질 수밖에 없어. 2조는 13초 후 바닥에 아이스 필드를 전개.”

“지금이다! 공격해!”

검은 벌에 항상 밀리며 소극적인 전략만을 취하던 천화의 설은영은,

언노운의 합류와 함께 자신감을 되찾으며 검은 벌의 북쪽 포위망을 압박해 나갔다.

“다리문 통신 두절, 사망입니다!”

“남쪽, 서쪽에서 적군이 계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어서 지시를!”

“스팅…….”

물론 스팅이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는 곧장 남쪽과 서쪽의 길드원들을 북쪽으로 진격시켜 천화의 뒤를 잡으려 노력했다.

‘이게 전쟁인가?’

스팅과 설은영.

두 사람의 지휘를 몸소 겪은 카이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마치 서로를 눈앞에 두고 체스라도 두는 것처럼 한 수, 한 수를 과감하게 펼쳤다.

그 수들은 모두 상대의 목줄기를 물어뜯을 살초들뿐!

‘하지만 이것도 슬슬 한계겠지.’

검은 벌의 본대가 너무 가까이 온 것이다.

이제 곧 전면전이 시작되면 전략이 빛을 바래는 시기가 온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설은영은 카이를 따로 불러냈다.

“매복이라고요?”

“그래요. 곧 전면전이 시작될 거예요. 적들의 수도 많이 줄여놨으니 크게 밀릴 리는 없어요. 그 와중에 당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적들은 계속해서 주변을 신경써야하죠. 집중력이 약간이나마 흐트러질 거예요.”

“그럼 언제 나오면 됩니까?”

“타이밍은 제가 잡을게요. 그런데…….”

설은영이 카이의 펫들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검은색 갑옷을 입은 소환수는 아오사를 잡을 때도 봤지만, 다른 아이는 처음이네요. 정말 전력이 되는 건가요?”

“아아, 이 녀석이 이래뵈도 제 비장의 패 같은 녀석입니다.”

미믹을 바라보는 카이의 눈빛에는 믿음으로 가득했다.

***

엘프의 숲에 위치한 제법 널찍한 공터.

그곳에는 물경 200여명의 유저들이 두 패로 나뉜 채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쯧, 자존심 상하게…….”

등 뒤에 검은 벌의 마법사들을 도열시킨 스팅이 혀를 차며 앞으로 한 발자국을 걸어 나왔다.

그는 빠르게 천화 진영의 유저들을 훑었다.

‘언노운이 없다?’

매복이라는 뜻인가.

지금 상황에선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전략이다.

‘상대방을 짜증나게 할 줄 아는 여자로군.’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드는 여자였다.

스팅은 곧장 설은영에게 시비를 걸듯 입을 열었다.

“명줄도 끈질긴 계집. 언노운의 도움으로 운 좋게 포위망을 벗어났군.”

“말벌이 아니라 꿀벌들이 꼬이길래 찢어버렸어.”

“언노운은 어디 있지?”

“지금 그를 신경 쓸 상황이 아닐 텐데?”

“뭐? 큭…… 크하하하!”

배를 잡고 한참이나 웃던 스팅은 돌연 웃음을 뚝 그치며 설은영을 노려봤다.

“……언노운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뒤졌을 놈들이, 입만 살았군.”

“그를 영입한 것도 우리의 능력이야.”

“아아, 그 반반한 얼굴로 미인계라도 펼쳤나 보지?”

“감히! 아가씨에게 더러운 소리를 한 번만 더 지껄이면…….”

피잉!

울컥한 보이드가 앞으로 나온 순간, 무언가가 보이드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자신이 공격당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윈드 커터에 1,427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뒤늦게 올라오는 시스템 메시지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의 존재를 깨닫기 전까지는.

‘……이 거리에서 윈드 커터라고?’

보이드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윈드 커터는 절대 고위 마법이 아니다.

20레벨의 마법사도 쓸 수 있는 바람 계열의 하위 공격 마법.

‘하지만 이렇게 먼 거리를, 이 정도의 속도로, 이렇게 정확하게 명중시키는 건…….’

마법에 대한 웬만한 이해도가 아니라면 절대 불가능한 수준!

실제로 보이드조차 자신이 같은 일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을 못 할 정도였다.

스팅은 벙찐 표정의 보이드를 쳐다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주인들이 대화하는데 개가 입을 열다니? 간수 좀 잘해야겠군.”

“…….”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못한 설은영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전군, 전투 준비.”

“무르군. 너무 무르다.”

자신의 도발이 성공적으로 먹혔다는 것을 깨달은 스팅이 입꼬리를 올렸다.

‘언노운의 매복은 좋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매복이란 건 상대방이 모를 때 가장 빛을 발하는 전략이다.

지금은 자신을 비롯해 검은 벌의 모두가 그의 존재를 신경 쓰고 있는 상태.

‘집중력은 다소 흐트러지겠지만…… 그게 이 전장의 판도를 뒤엎지는 못할 거다.’

스팅이 여유롭게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기억해 둬라. 이것이 10대 길드의 힘이다.”

딱!

스팅의 중지와 엄지가 부딪히는 순간, 사전에 준비되어 있던 온갖 마법이 숲의 지면과 상공을 뒤덮었다.

직접 보지 않는다면 말로 설명을 할 수 없을 듯한 압도적인 광경!

‘배, 백 명이 마법을 사용하는데 딜로스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고?’

딱 자신이 맡은 적에게 자신이 줘야할 만큼의 데미지만 준다.

단 1의 데미지 손실도 발생하지 않게 만드는, 환상의 컨트롤!

그 모습은 왜 검은 벌이 10대 길드 중에서도 공격력만큼은 최상위 1~2위를 다투었는지.

왜 마법사들로만 이루어진 이들이 에피소드 진행률만큼은 다른 길드를 가볍게 따돌렸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크아아아악!”

“태, 탱커진, 치료 요청 속출합니다!”

“힐러들! 탱커 위주로 치료 돌리고 리저렉션으로 일선부터 살려!”

“사, 살리고 치료하는 속도보다…… 죽는 속도가 더 빨라요!”

꽈악.

설은영이 꽉 깨물린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이렇게나 차이가 난다고?’

엘프의 숲에서 포위망을 걷어내며 200명의 검은 벌들을 죽였다.

충분히 할 만하다고 여겼고, 천화의 전력이 조금만 더 강하면 10대 길드의 자리도 오를 수 있다 생각했다.

‘아아, 멍청해. 너무 멍청하다고, 설은영.’

온갖 똑똑한 척은 다 했으면서, 왜 이렇게 간단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까.

마법사는 게릴라전에 능숙한 클래스가 아니다.

오히려 전장의 꽃이라 불리는 그들은 그 어떤 클래스보다 전면전에 특화된 직업이다.

‘그런 이들을 상대로 전면전을 생각하다니…….’

검은 벌의 북쪽 포위망을 가볍게 무너트리면서 자신감이 너무 차오른 것이 화근이었다.

‘잠깐, 설마 스팅은 이것을 위해 일부러 북쪽의 길드원들을…… 내준 거야? 우리가 시간을 끌며 소모전에 돌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설은영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스팅이 낮은 웃음을 흘려댔다.

“크큭. 그러니까 무르다는 소리를 듣는 거다.”

그는 전장을 지배하는 자신의 부하들을 쳐다봤다.

‘어차피 길드원들은 소모품.’

자신의, 절대자의 위치를 공고히 만들어줄 장기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나의 승리를 위해 그들을 희생하는 전략 정도는 과감하게 실행해야 하지.’

하지만 설은영은 그러질 못했다.

매스컴에서야 온갖 차가운 척을 다하지만, 그녀는 고립된 아군을 위해 원군을 보내고, 한 명이라도 더 살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해 왔다.

“그것이 너와 나의 차이. 영원히 넘을 수 없는 언더와 오버의 차이이다.”

스팅의 그 말은 마치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그와 설은영의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의 비웃음이 귓가에 울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어지러워…….’

설은영은 핑 돌아가는 시야에 몸을 비틀거렸다.

“젠장, 아가씨!”

황급히 매직 실드를 시전하며 그녀를 부축한 보이드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기며 소리쳤다.

“아가씨 성격에 거절하리라는 것은 알지만, 빌어먹게도 잘 알지만! 한 번 물어나 보겠습니다. 작전상 후퇴는 어때요?”

“……나 혼자?”

“아가씨가 잡히지 않으면, 천화는 언제고 재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길드 마스터가 잡히는 순간…….”

우두머리를 잡는 것과 잡지 못한 것.

그것은 재도전의 빌미를 주냐, 주지 않느냐의 차이였다.

스팅이 기를 써서라도 천화를 쓸어버리고 설은영을 제 손으로 죽이려는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못해. 알잖아.”

언제나 그랬다.

항상 최고가 되고자 노력했지만, 항상 최고만 곁에 두고자 노력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노력은 번번이 실패했다.

‘이번에도 나는…….’

미드 온라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으로 기회.

만약 이곳에서도 실적을 내지 못한다면, 결국 자신의 인생은 아버지의 뜻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설은영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그녀를 보챘다.

[저기요. 지금 엄청 밀리고 있는데, 타이밍 제대로 잡고 있는 것 맞습니까?]

‘언노운……?’

그가 없었다면 지금 이 상황까지 오지도 못했다.

비록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였지만, 설은영은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가 대단하다고 해도, 혼자서는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못하겠지.’

이 상황에 끼어들면 개죽음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설은영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기껏 천화를 선택해 줬는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그 말은?]

[이미 전투는 끝났어요. 패배했다고요. 그쪽이라도 살아서 도망쳐요. 계약금은…… 사죄의 의미로 성공 시 보수만큼 지급할 테니까.]

설은영은 길드 창을 활성화시켜 길드원들의 닉네임을 쳐다봤다.

하얗게 빛나는 그들의 닉네임은 초가 지날 때마다 수명이 다한 전구처럼 불이 꺼졌다.

모두 사망해서 로그아웃이 되었다는 증거.

‘이제 20명도 채 안 남았어.’

반면 검은 벌의 마법사들은 아직도 80명가량이 남았다.

누가봐도 완패에 가까운 성적.

[도망이라…….]

낮게 웃은 언노운이 말을 이었다.

[저희 집이 안 그럴 것 같은데 유난히 가정교육이 좀 스파르타예요. 아버지가 항상 제게 하시던 말씀이 있었죠. 우는 이를 도와줘라, 약자를 도와줘라,]

[……?]

[지금 그쪽은 둘 모두에 해당하네요. 우는 약자.]

‘지금 무슨 말을…… 울고 있다고? 내가?’

설은영은 제 손가락을 눈가에 가져가고 나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빠르게 현실을 부정했다.

“마, 말도 안…….”

“언노운이다!”

‘뭐?’

그녀가 눈물을 채 닦아내기도 전에, 공터 근처의 가장 높은 나뭇가지에서 언노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한 용병 관계인 줄 알았는데…… 이거 정말 미인계라도 펼쳤나?”

스팅이 농담을 지껄이며 낮게 웃자, 검은 벌들이 박장대소했다.

“크하하하! 그러고도 남지요.”

“사실 저 얼굴이면 안 넘어갈 남자가 별로 없잖습니까.”

“다 끝난 전장에 모습을 드러낼 정도라면,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은데요?”

“생각하는 것 하고는…….”

검은 벌들의 유치한 대화 소리를 듣던 카이는 그대로 나뭇가지를 박차고 전장의 한복판으로 뛰어내렸다.

“호오? 제법 자신 있…….”

쿠웅, 쿠웅!

이어서 그를 따라 뛰어내린 블리자드와 미믹.

도중에 말을 끊긴 스팅은 전투 시작 이래 처음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검은색 갑주야 아오사를 잡을 때도 봤지. 제법 빠른 몸놀림을 선보이는 전사. 하지만…….’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다른 쪽이었다.

“저건 대체 뭐지?”

“스켈레톤 아닙니까?”

“아니, 그러니까 저딴걸 왜 이런 전장에 있냔 말이다.”

“그래도 칼이랑 방패 들고 있는걸 보니 하급 스켈레톤은 아니군요.”

“맞아.”

검은 벌들의 추리에 카이는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소개하지. 이 녀석의 이름은 미믹이고, 지금은…….”

스켈레톤 나이트를 흉내내고 있는 자신의 펫이다.

반짝!

카이의 검지에 끼워진 타락한 성기사의 반지가 반짝거렸다.

“서임 스킬, 발동.”

[현재 듀라한으로 승격시킬 수 있는 스켈레톤 나이트는 총 1마리입니다.]

[서임 스킬이 정상적으로 발동되었습니다.]

[총 1마리의 스켈레톤 나이트가 듀라한으로 승격됩니다.]

콰드드드득!

미믹의 발치에서 어둠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은 곧장 스켈레톤 나이트가 된 녀석의 뼈 사이사이를 메꿔나갔다.

“그래. 이것이 지금의 미믹으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성능.”

칠흑 같은 어둠을 제 몸에 휘감은 채, 제 머리를 옆구리에 끼고 있는 미믹이 카이를 수호했다.

“나의 비밀 병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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