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137화 (137/441)

# 137

힐통령 137화

54장 엘프의 마을 (2)

예고 없이 숲을 찾아든 정적!

카이는 무대를 마친 가수가 여운을 즐기는 것처럼 그 침묵을 즐겼다.

동시에 엘프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쳐가는 카이.

“뭐, 뭐라……?”

“사실이라고!?”

“이게 대체 무슨…….”

그와 눈을 마주친 엘프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내비췄다.

카이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인지한 것!

“당황스럽군, 인간.”

카이에게 질문을 던졌던,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엘프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대의 말은 모두 옳다. 루나.”

“……치잇.”

카이의 뒷덜미를 잡고 있던 여인은 순식간에 단검을 꺼내 그를 구속하던 넝쿨을 잘라냈다.

“사도의 방문은 수백 년만이군. 숲을 찾아온 목적이 뭔가.”

“엘프들이 거주하는 마을을 방문하기 위함입니다. 선대가 맡긴 물건이 있다 들었습니다.”

“으음…… 성물을 회수해 가기 위함인가.”

자신이 사도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조차 표정의 변화가 없던 그는,

성물 이야기가 나오자 울적한 표정을 드러냈다.

“본래의 주인이 왔으니…… 어쩔 수 없나.”

중얼거리던 그는 카이에게 손을 뻗었다.

“내 이름은 엘두인. 가지. 마을까지 호위해 주겠다. 푸른 역병의 힘에 물어볼 것도 있고.”

“예. 그럼 감사히…….”

“이익, 전사장이시여!”

루나라 불린 여성이 황급히 엘두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그를 불러 세웠다.

“이자가 사도인 것이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안 됩니다. 성물은 지금 저희의…….”

“루나.”

짐짓 엄한 표정을 지은 엘두인이 그녀를 나무랐다.

“엘프는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남이 우리의 숲을 탐할 때 순수하게 분노할 수 있는 것이다. 잊지 말거라.”

“하지만…….”

“더 이상의 말은 듣지 않겠다. 일어나시오.”

“예에…….”

엘두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카이는 그들과 함께 이동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대체 무슨 일이지? 성물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안색이 굳어졌어.’

한결같이 무뚝뚝하던 엘두인조차 울적한 표정을 지었을 정도니 다른 이들은 어떨까.

‘뭐, 가보면 알게 되겠지.’

카이는 엘프들의 호위를 받으며 숲의 중앙 부근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나가던 중, 돌연 무리가 자리에 멈춰섰다.

‘마을의 입구…… 라기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그저 커다란 공터가 자리하고 있을 뿐.

카이가 멀뚱멀뚱 눈만 깜빡일 때, 엘두인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내가 밟는 발자국을 그대로 밟으며 따라오시오. 자칫 실수하면 환영의 미아가 될지도 모르니, 조심하기를.”

“예.”

이어서 엘두인이 신기한 발걸음을 선보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현역 모델들조차 하지 않을 기괴한 워킹!

발자국을 따라가기 급급하던 카이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주변 풍경이 바뀐 것을 인지했다.

“아…….”

저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 어떤 미사여구도 없는 순수한 감탄!

‘세상에 이런 장소가 있었다니!’

수십 마리의 반딧불이가 사이좋게 떠다니며 마을을 밝혀주고 있었고,

마을의 중앙에는 수천 년은 되어 보이는 거목이 엄청난 굵기의 가지를 뻗어내며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인간의 건축물과는 다른, 지구의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엘프들만의 독특한 집도 눈에 들어왔다.

‘나무와 넝쿨을 이용해서 집을 만든 건가? 묘하게 들어가서 자보고 싶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이었다.

수백의 선남 선녀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친환경적 주거 공간!

카이는 어째서 유저들이 엘프의 마을을 찾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이런 미지의 풍경을 자신의 망막에 담고 싶기 때문이리라.

“엘프의 마을, 루테리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예.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다려라. 위에 보고를 하고 올 테니.”

엘두인이 몇 명의 전사와 함께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자, 카이는 동물원 원숭이 신세가 되었다.

“저게 인간이야?”

“신기하게 생겼어!”

“귀가 작고 둥글둥글하군. 저래서야 소리나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

“신체 비율도 조금 어긋나 있는 것 같아요.”

“…….”

때로는 순수함이 그 무엇보다 치명적인 공격이 되는 법!

카이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여왕님이시다!”

“모두 물러서!”

웅성거림과 함께 카이를 구경하던 엘프들이 한 발자국 뒤로 떨어졌다.

동시에 그를 향해 다가오는 일련의 무리!

‘우와, 자애롭게 생겼어.’

생판 남인데도 문득 어머니가 떠오르는 자애로운 얼굴!

그러면서도 엘프 본연의 아름다움을 잃지는 않았다.

카이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여왕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4대 태양의 사제가 엘프 족의 여왕께 인사를 올립니다.”

“일어서세요. 사도와 엘프는 맹약을 나눈 친우. 이런 수직적인 인사는 옳지 못하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카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왕은 카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제 이름은 엘라니아. 엘프 족을 이끄는 유일한 여왕이자 세계수 루테리아의 자녀예요. 당신의 이름은?”

“카이라고 합니다.”

“좋아요 카이. 잠시 몇 가지 질문에 답해줄 수 있나요?”

“기꺼이.”

“우선 앉으세요.”

엘라니아가 가볍게 손짓하자, 땅에서 바위로 만들어진 의자가 솟아올랐다.

‘여, 여기서 대화하자고?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무슨 청문회도 아니고!

하지만 카이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자리에 앉자 엘라니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우선 카이. 당신이 어떻게 태양의 사도가 되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시시한 이야기입니다.”

카이는 자신이 태양의 사도가 되었던 신전에 대해서 꼼꼼하게 이야기했다.

“사실이군요. 당신은 정말로 헬릭의 사랑을 받는 지상의 대리인, 사도였어요.”

“아니, 뭐 사랑까지는…… 아무튼 이것으로 제 정체에 대한 증명은 끝난 겁니까?”

“예. 하지만 아직 질문할 것은 남아있어요.”

엘라니아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용기를 내어 질문했다.

“카이. 당신은 며칠 전 숲의 서쪽 공터에서 푸른 역병의 힘을 사용했어요. 맞나요?”

“맞습니다.”

어차피 엘프를 상대로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

카이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주변의 엘프들이 동요했다.

“푸, 푸른 역병의 힘이라면…….”

“뮬딘 교의 저주받은 악몽!”

“히이이익!”

“그 힘을 어째서 태양신의 대리인이?”

그들이 동요하자 엘라니아가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다들 진정하세요. 아직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어서 그녀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카이는 태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푸른 역병의 아오사. 녀석을 제 손으로 처치했습니다. 덕분에 녀석의 힘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게 되었고요.”

“……그 아오사를?”

“그렇다면 푸른 악몽은 이제 세상에 없다는 말인가.”

“허어, 대단하군.”

시시각각 다양한 반응을 보여주는 엘프들!

‘뭐, 사실 이런 식으로 공개적인 질문을 해주면 나야 고맙지.’

엘프들은 거짓이 통하지 않는 자들이다.

즉, 자신은 꿇릴 것이 없으니 진실만 말하면 된다는 소리!

“……잘 알겠어요. 그렇군요.”

엘라니아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손짓했다.

“마을을 방문한 건 성물을 받아가기 위함이지요?”

“맞습니다. 엘프들이 보관하고 있는 성물은…….”

“성의(聖衣) 니케. 시미즈 님이 즐겨 입으시던 사제복이에요.”

“아, 그럼 지금 받아볼 수 있겠습니까?”

“그게…….”

엘라니아의 얼굴에 먹구름과도 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성물을 회수하시는 시기를 조금만 더 늦춰주시면 안 될까요?”

“……예?”

그녀의 간곡한 표정에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성물 얘기가 나올 때마다 엘프들의 표정이 영 수상했어.’

마치 온 세상의 근심과 걱정을 얼굴 위에 때려 박은 표정!

“이유를 듣고 판단하겠습니다.”

“으음……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희 엘프 족은 세계수 루테리아 님의 자녀들이에요.”

“아, 마을의 이름과 같군요.”

“예. 세계수가 없다면 엘프라는 종족도 존재할 수 없어요. 대부분의 엘프는 세계수의 열매에서 태어나는 존재이니까요."

‘그럼…… 엘프는 일종의 동충하초 같은 건가?’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열매를 통해 태어난다는 말씀은…… 후천적으로 그,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소리입니까?”

“생물학적으로 가능은 하지만, 저희는 성욕이 없기 때문에 보통 루테리아 님에게 기도를 올리지요. 그러면 아이를 내려주신답니다.”

“헐…….”

너무나도 건전한 종족!

“그런데 지금 루테리아 님의 상태가 영 좋지 못하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모든 건 다크엘프, 그들 때문이에요.”

엘라니아가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크엘프도 한때는 저희 부족이었던 엘프들이에요. 하지만 천 년 전부터 대륙에 마왕이 강림하고, 뮬딘 교가 도래하는 악몽이 주기적으로 일어나면서 저희 부족은 분열되었어요.”

“분열이라하면?”

“엘프도 더욱 강한 힘을 손에 넣어야 한다는 과격파가 등장하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의 엘프들도 강하지 않습니까?”

아인종들의 힘은 대체로 강했다.

카이가 만났던 인어족만 하더라도, 천적인 나가를 상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뿐.

지나가는 동네 인어들의 레벨만 해도 최소 200을 넘겼으니까.

심지어 인어 족의 왕이었던 카리우스는 레벨만 400이 넘는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그리고…… 이 중에서 가장 강해 보이는 엘두인과 여왕도 크게 밀리는 것 같지는 않아.’

한마디로 엘프 족은 지금도 충분히 강하다는 뜻!

하지만 엘라이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대륙을 물들인 어둠의 힘은 항상 저희의 예상을 뛰어넘었어요. 이 정도 힘으로는 그저 발버둥치는 게 고작이었죠.”

“그럴 수가…….”

대체 얼마나 레벨이 높은 몬스터들이길래?

카이가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짓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과격파들은 강력한 힘을 원했어요.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한 그들은 세계수와의 관계를 끊었고, 그 대가로 저주받은 피부와 함께 강력한 힘을 손에 넣었지요.”

“아, 그래서 피부색이 달랐던 거군요.”

“하지만 그들은 저희 온건파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결국 엘프의 숲에서 계속해서 대립을 하던 도중, 다크엘프들이 저희 마을로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뮬딘 교에서 건네받은 독을 세계수의 밑동에 뿌렸어요. 덕분에 현재 루테리아 님께서는 모든 활동을 중지한 채 회복에 전념하고 계시지요.”

엘라니아의 목소리가 유난히 구슬프게 들렸다.

“지금은 성물의 힘이 그나마 마을의 모습을 감춰주는 결계를 유지해 주는 중이지만, 만약 카이 님께서 지금 성물을 회수해 가신다면…….”

“결계가 풀린다는 소리로군요.”

“이해해 주실 수 있나요?”

톡치면 툭하고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커다란 눈망울!

카이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루테리아를 한 번 봐야겠습니다. 태양의 사제가 지닌 힘이라면 루테리아 님을 치료할 방도가 생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위험해요. 현재 루테리아 님은 강력한 독을 뿜고 계시기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아,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카이는 어깨와 허리를 쫙 펴며 당당하게 말했다.

“독이라면 제 전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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