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힐통령 143화
56장 한 편의 영화처럼(2)
“……언노운, 정말이지 어디로 튈지를 모르겠군.”
언노운이 올린 동영상을 보던 워리어스의 마스터, 발칸은 씁쓸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너무 절묘하게 치고 들어왔어.’
실시간으로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언노운의 영상.
고작 20분짜리의 예고편임에도 불구하고 그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심지어 각종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에는 언노운과 관련된 키워드가 도배될 정도.
그 뜨거운 관심을 지켜보던 발칸은 돌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은 알까? 언노운의 이 영상은 단순한 홍보가 아니라 일종의 메시지라는 것을.”
그의 말대로다.
일반 유저들이 보는 시점과 10대 길드의 마스터들이 보는 시점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평범한 유저들이 엘프와 언노운의 활약을 주시할 때,
10대 길드의 마스터들은 다른 부분을 주시했다.
“아니, 오히려 언노운이 대놓고 보여줬지.”
언노운과 엘프들의 맹습에 기가 질려 도망치는 다크엘프들.
그들 중에는 뮬딘 교의 암흑 사제들이 섞여있었다.
한 마디로 지금 언노운이 수행 중인 퀘스트는 뮬딘 교가 연관되어 있다는 뜻!
‘요즘은 어둠 추적자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 이유로 임무조차 잘 내려오질 않아.’
한 마디로 뮬딘 교, 메인 에피소드와 관련된 퀘스트를 진행할 연결 고리가 끊어졌다는 소리.
그런 상황에서 뮬딘 교의 꼬리를 잡을 수 있는 이 전쟁은 가뭄 속의 단비와도 같다.
즉, 언노운이 이 영상을 올린 이유는 간단했다.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해. 하지만 그 속내는…….’
영상을 보고 있는 이들 중 뮬딘 교를 알고 있는 자들.
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힘을 보태라고.
이건 뮬딘 교의 흔적을 쫓을 둘도 없는 기회라고.
“…….”
잠시 눈을 감고 고민을 이어가던 발칸은 결국 채팅방을 띄웠다.
그곳에선 이미 활발한 대화가 이뤄지는 도중이었다.
[미네르바 : 이 전쟁은 10대 길드 차원에서 주도해야 해요.]
[요시아츠 : 이미 늦었다. 우리가 어떤 활약을 하더라도 주목은 언노운이 받고 있어.]
[레너드 : 전쟁에서 승리를 해도 모든 공은 언노운이 독차지하겠지.]
[골리앗 : 차라리 지원을 하지 않는게 나아. 언노운이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이 베스트고.]
[캐서린 : 지랄하네. 뮬딘 교의 뒤를 쫓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차버리겠다고? 난 갈 거야.]
[골리앗 : ……예전에 목구멍에 검을 한 번 박아줬더니, 입 대신 손가락만 살았나 보군.]
[캐서린 : 아하, 네 눈깔 두 쪽에 단검 박혔을 때 말하는 거지?]
서로 라이벌이나 다름없는 10대 길드 마스터들 중에서도 견원지간은 존재하게 마련.
채팅방을 가만히 쳐다보던 발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발칸 : 워리어스는 참가하겠다.]
[골리앗 : 곰 같은 여우 녀석. 당장의 이익만 중요하다는 건가?]
[발칸 : 그럼 무엇이 더 중요하지? 굳이 참가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캐서린 : 있잖아 골리앗. 그렇게 불만이라면 아예 깽판을 쳐보는 건 어때?]
[골리앗 : 내가 그런 조잡한 도발에 넘어갈 것이라 생각하나?]
[캐서린 : 아, 진짜 아쉽다. 훅 보내 버릴 수 있었는데.]
짙은 아쉬움을 내뱉는 캐서린.
하지만 골리앗은 물론이고 채팅방의 그 어떤 마스터도 이번 전쟁에 훼방을 놓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 정도 규모의 전쟁이라면 한, 두 명 가지고는 훼방을 놓을 수도 없어.’
‘최소 공격대 하나는 파견해야 해. 그래야 하는데…….’
‘젠장. 비밀리에 공격대 하나 정도는 키워놨어야 하는데.’
‘게다가 이 판은 언노운이 만들어놨다. 우리가 훼방을 놓는다면, 그 이유가 어떻든 거대 세력이 가엾은 개인을 핍박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10대 길드의 전력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길드 단위로 레이드를 하고, 그 영상을 판매하는 이들이니까.
공격대에 속한 이들은 스크린샷만 올라와도 5분 안에 정체가 탄로날 것이 분명했다.
한 마디로 10대 길드가 지닌 선택지는 단 두 가지!
‘언노운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고 뮬딘 교에 대한 단서를 얻느냐…….’
‘그 더러운 꼴을 보기 싫어서 막대한 이득을 포기하느냐.’
양자택일의 선택지.
현재 레이드를 준비 중인 길드 세 곳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길드는 참여 의사를 밝혔다.
[캐서린 : 우리는 결론이 이렇게 났는데. 여왕님은 어쩌시려나?]
캐서린의 의문에 조용히 대화만 읽던 여인이 가상 키보드를 두드렸다.
[설은영 : 참여합니다.]
***
“지금 당장 연락 넣어!”
“하지만 이미 전에도 몇 번이나…….”
“에잇! 지금 찬 물 더운 물 가릴 때야? 수십 통이라도 좋으니 쪽지 넣으라고!”
“어, 난데. 지금 당장 다음 주 방송 스케줄…… 아니, 이번 주 방송 스케줄 어떻게 되는지 확인해 봐.”
“언노운은 분명 영상에서 한국어로 말했다. 한국인이 분명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 쪽에서 계약 따내야 한다. 당분간 퇴근은 없다 생각하고 언노운이랑 접선 시도해!”
방송국들.
그중에서도 게임 콘텐츠를 주로 다루는 방송국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번에 언노운이 올린 동영상은 그들을 유혹하는 최고의 미끼가 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예전에 무명 파티의 필드 보스 레이드를 송출했을 때도 시청률이 11%는 넘었어.’
‘그런데 이건 무려 언노운이라고.’
‘게다가 레이드 따위가 아니야.’
‘전쟁이다. 과거 천화의 베이거스 레이드에 필적할 만한…… 아니, 그것조차 뛰어넘을 만한 결과물이 나올 거야.’
이미 흥행 보증수표나 다름 없는 언노운의 영상!
게다가 이번에 그가 올린 영상의 인트로는 그 스케일부터가 차원을 달리했다.
무려 전쟁.
NPC들을 이끌며 전쟁을 일으키는 언노운의 영상이라면 굳이 뚜껑을 열어보지 않아도 된다.
그 반증으로 각 방송국의 시청자 게시판은 이미 포화 상태가 된 상황이었으니까.
-혹시 언노운의 전쟁 영상이 TBC방송국과 계약되어 있나요?
-언노운 팬카페에서 나왔습니다. NET미디어에서 얼마전에 언노운 특집 방송 틀어주던데, 이번 영상이랑 관련 있습니까?
-영상을 보니 언노운이 한국말을 쓰던데, 한국인 맞죠?
-언노운 영상에 나온 엘프 참 잘 생겼던데, 혹시 그 분 이름이 뭔지 아시나요?
이곳이 정녕 시청자 게시판인지, 지식in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의 게시글들이 쏟아졌다.
본래 가열이란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위로 올라가는 것.
이번 사태 또한 금세 방송국 국장들의 귀로 흘러들어 갔다.
“음? 언노운이라고?”
“들어는 봤지. 뭐? 이번에 걔랑 계약하고 싶다고?”
“글쎄…… 영상이 재미있긴 하던데, 그걸 굳이 방송국에서…….”
“응? 언노운이 NPC들 이끌고 전쟁 벌여? 야 이 새끼야! 그걸 제일 먼저 말했어야지!”
“스케줄 최대한 맞춰준다. 계약금도 상관없어. 미드 온라인 부문 방송 영향력 1위인 우리 온게임즈에서 무조건 계약 따내야 된다. 못하면 시말서 쓸 각오해!”
각 방송국들의 눈치 싸움!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알고 있었다.
이번 계약을 따낸 방송국이 향후 미드 온라인 방송에서 얼마나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할지.
“첫 인상이 중요해요. 계약금을 20억 정도로 하면 언노운도 혹하겠죠?”
“야, 이 멍청아. 펫들에게도 세트 아이템을 끼워주는 녀석이야. 최소 금수저라고! 그 정도 돈으로는 어림도 없지.”
“어차피 국장님 허락 떨어졌다. 기왕 쓸 거 팍팍 쓰라고! 거기다가 추가 옵션도 걸어. 시청률에 따른 인센티브도 챙겨주고 미녀 랭커, 아이돌과 합동 프로그램까지 편성해 줘. 지원을 아끼지 마라!”
방송국 관계자들이 골머리를 썩고 있을 때,
카이의 군대는 이미 수베르 운하에 도착한 상태였다.
***
카이는 폭 800미터의 인공 수로인 수베르 운하를 쳐다봤다.
이미 하나의 강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의 압도적인 폭과 길이를 지닌 수로.
그 거대한 수로를 끼고 있는 비르 평야는 겨울이 목전이었기에 황량했다.
추수할 곡식도 없으며, 인적이 드나들지도 않는 장소.
자신의 전장이 될 풍경을 눈에 담던 그는 생각에 잠겼다.
‘메시지. 잘 전해졌을까.’
오늘 커뮤니티에 올린 동영상을 굳이 1인칭으로 찍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래야 뮬딘 교의 암흑 사제 녀석들의 모습을 화면에 예쁘게 담을 수 있으니까.’
다름아닌 미끼를 뿌리기 위해서!
암흑 사제들을 잘 찍기 위해 고개를 휙휙 돌렸기 때문인지 목이 다 뻐근했다.
‘이벤트 냄새 맡고 찾아온 일반 유저들도 있네.’
엘프들의 행렬을 멀리서 쳐다보며 천천히 쫓아오는 일반 유저들.
카이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굳이 추가 영상은 안 올려도 되겠어.’
저들이 자신과 엘프들의 군대를 SNS에 올리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한 마디로 자신이 이곳, 비르 평야에 위치해있다는 걸 다른 유저들도 알게 된다는 뜻!
‘유저들도 아는걸 10대 길드 쪽에서 모를 리는 없겠지.’
카이는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처음에는 굳이 10대 길드를 전쟁에 끼울 생각이 없었다.
약간이지만 공과 명성을 나눠가져야 하니까.
하지만 그런 마음은 출정식을 치루면서 바뀌어버렸다.
“아저씨, 꼭 무사히 돌아와야 돼?”
“늙어서 함께 전장으로 가지 못하는 것이 한이로구나.”
“기다릴게. 몸 성히 돌아와야해.”
자랑스러운 숲의 전사들을 배웅하는 엘프들.
눈물을 쏟아내는 그들을 쳐다보며 카이는 자신의 크나큰 잘못을 깨달았다.
‘이들의 목숨은 단 하나뿐이야. 유저와는 달라.’
부활 스킬인 리저렉션을 사용해도 살릴 수가 없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하나라도 더 많은 생명을 살려서 기다리는 이에게 돌려보내겠다고.
카이는 영상을 찍으며 그리 다짐했다.
“카이님. 주변에서 모험가 세력들이 다가옵니다.”
“어디…….”
엘두인의 말에 고개를 돌린 카이는 다양한 깃발들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도 왔네. 워리어스, 타이탄, 블랙마켓, 프레이, 리미트리스. 그리고…….’
그 속에서 낯익은 문양을 발견한 카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천화?”
검은 벌의 영역을 흡수하며 관리하기 바쁜 천화에서 정예를 이끌고 전장을 방문한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설은영은 카이를 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은혜를 갚으러 왔어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어서 고개를 돌린 카이가 길드의 마스터들을 쳐다봤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불과 반 년 전만 해도 화면에서만 볼 수 있던 유명인사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만든 전장에 찾아왔다.
바로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서.
“어이, 분명히 말해두지만 난 네놈의 지시를 듣지 않겠다.”
물론 예외도 있는 모양이지만.
카이는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타이탄 길드의 골리앗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과도 제법 악연이 있지.’
예전이었다면 골리앗과 타이탄 길드라는 이름에 어깨부터 움츠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지금의 난 언노운이야.’
언노운.
피도 눈물도 없는 유저.
한 번 척을 지면 그 상대가 누가 되었건, 설령 10대 길드 중 한 곳일지라도 철저히 파괴해 버리는 난폭한 사냥개.
가면을 썼다면 그 가면의 배역에 걸맞는 행보를 보여줘야 하는 법.
척!
카이는 예고 없이 검을 뽑고 골리앗을 겨누었다.
그와 동시에 700여 명의 엘프들도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이게 무슨 뜻이지?”
“간단해. 내 지시를 받기 싫다면, 내 전장에서 꺼져.”
“지금 그 언사로 인해 네놈은 나는 물론, 타이탄 길드 전체를 적으로 돌릴 수도 있다.”
“벌은 작아서 손맛을 느낄 새도 없었는데, 거인이라면 다르겠지.”
“감히……!”
울컥한 골리앗이 주먹을 휘두르려는 순간.
한 줄기의 음성이 그의 움직임을 우뚝 멈춰 세웠다.
“지금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