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힐통령 148화
58장 전쟁이 끝나고
승리를 많이 겪어본 자들.
각종 스포츠의 황제로 군림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마약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승리일 것이라고.
평소에 그게 뭔 개소리냐고 생각하던 카이는, 지금 이 순간 그들의 심정을 백분 이해했다.
띠링!
[전쟁에서 승리하셨습니다.]
[훌륭한 지휘로 아군의 피해가 미비한 대승을 이끌어내셨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총 12,000의 전쟁 공적치를 획득하셨습니다.]
[아인종들을 위해 태양교의 이름으로 뮬딘교를 무찌른 이 일화는 전 대륙에 널리 퍼질 것입니다.]
[명성이 10,000 상승합니다.]
[위엄이 20 상승합니다.]
[당신의 전투를 모두 지켜본 태양신 헬릭이 엄지를 치켜듭니다.]
[선행 스탯이 10 상승합니다.]
[1,500명 이상의 NPC를 통솔하셨습니다. 스페셜 칭호, ‘최초의 지휘관’을 획득하셨습니다.]
승리하셨습니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맥이 탁하니 풀렸다.
“괜찮나?”
쓰러지는 카이를 부축하는 바체.
잠시 그의 어깨를 빌리던 카이는 피곤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네요.”
“전쟁은 처음인가보군.”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인 바체가 카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피할 수 없다면 익숙해지는 것이 좋을 거야.”
“글쎄요. 제가 이런 전쟁을 언제 또 하게 될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눈을 깜빡이던 바체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한 번 더 두드렸다.
“이번에 우리가 무찌른 적은 뮬딘교일세. 앞으로 조금 피곤해질 거야.”
“저, 저만요?”
“물론이지. 자네가 지휘관이니까.”
“…….”
권리만 쏙 받는 줄 알았더니, 쫄래쫄래 따라온 의무와 책임!
하지만 그런 것들은 제쳐두더라도, 보상의 물결은 카이를 기쁘게 만들었다.
‘위엄, 명성, 선행 골고루 올랐고, 스페셜 칭호 하나에. 레벨도…….’
즐거운 표정으로 레벨을 확인하던 카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레, 레벨이 32개나 올랐다고?’
말 그대로 기겁할 만한 수치.
아군이 적들을 잡으며 누적된 경험치와 승리 보상 경험치가 한 번에 들어온 것이다.
이로써 카이의 레벨은 285.
‘잠깐만, 랭킹 1위인 유하린의 레벨이 분명…….’
랭킹 표를 띄운 카이는 기절할 것 같은 심정에 황급히 이를 꺼버렸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랭킹 1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던 이름은 다름 아닌 카이.
‘……나잖아.’
안 그래도 근래에 버그 플레이어로 악명이 자자하던 이름이다.
헌데 이번에 레벨이 32개나 오르며 미드 온라인 레벨 랭킹 1위의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바보 머저리가 아닌 이상 카이의 정체를 유추해 낼 수 있을 터.
‘비르 평야의 전투가 끝남과 동시에 폭업을 해버렸으니…… 이건 눈치챌 수밖에.’
실제로 등 쪽에서 느껴지는 유저들의 시선은 따갑다 못해 아플 정도였다.
‘아쉽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후의 일을 생각해야돼.’
자신이 사제라는 점을 숨긴 가장 큰 이유는 힘 있는 자들에게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제 누군가에게 휘둘릴만큼 나약하지는 않아.’
오히려 자신을 건드리는 순간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날카로운 이빨을 갖추었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당당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
카이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런 비밀이 어차피 공개될 거라면…….’
소문이 퍼져서 모두가 알기보다는, 자신의 입으로 공개하는 것이 훨씬 더 파격적이다.
게다가 생각해 보니 나쁜 부분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카이의 이름으로 나쁜 짓을 하고 다닌 건 아니잖아?’
오히려 그 반대.
착한 일만 주구장창 하고 다녔다.
디스패치의 기자가 따라다녔어도 할 말이 없을 수준의 청렴결백함!
결과적으로 언노운의 이름에 득이 되면 되었지, 실이 될 이유는 하등 없었다.
‘아리스라고 했나.’
오크 로드 토벌대에서 인터뷰를 요청한 유저.
카이는 그녀에게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등을 돌렸다.
“카리우스 님. 저희를 위해 직접 군대를 끌고 와주셨군요.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음!? 자네 설마 엘두인인가? 아주 어렸을 때 본 것 같은데, 벌써 다 컸군그래.”
“크, 크흠. 지금은 숲의 전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뭐라? 바닥을 기어다니며 흙을 퍼먹던 그 꼬마가 전사장이라고? 껄껄껄! 세월 참 빠르군!”
“카, 카리우스 님…….”
엘프와 인어들은 정말 오랜만의 해후를 나누며 서로의 소식과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래, 지하의 꼬마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있나?”
“그게…… 저희도 뮬딘교와 다크엘프들 때문에 바빠서 교류가 끊긴지 제법 됩니다.”
“으음. 그쪽도 마찬가지인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카리우스는 드워프들을 걱정했다.
“나도 잉가르트를 떠난 드워프들이라면 몇 알고 있지만, 왕국에 대한 소식을 들은 지는 오래되었군.”
“하지만 저희가 동시에 뮬딘교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을 미루어볼 때…….”
안색이 어두워지는 엘두인과 카리우스.
그들의 곁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카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잉가르트의 위치를 알려주시면 제가 한 번 찾아가보겠습니다.”
“정말인가?”
“그래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겠습니다.”
두 사람에게 잉가르트의 위치를 전해 들은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마지막이다.’
사도의 마지막 성물인 성검 프리우스가 잠들어 있는 곳.
카이가 최대한 빨리 잉가르트로 찾아가봐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카리우스가 걱정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걱정이군. 뮬딘교의 공세가 이토록 강력할 줄이야.”
“저희 엘프들도 사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큰 화를 입었을 것입니다.”
“끄응. 차라리 서로의 거리라도 가깝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을 텐데…….”
‘……거리?’
두 사람의 푸념을 주워듣던 카이가 눈을 반짝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거리가 문제라면 모여서 살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음? 우리와 엘프가 말인가?”
“예. 안 됩니까?”
“안 될 건 없지만…… 엘프들은 숲에서 살아야 하지 않나. 우리에겐 바다가 있어야 하고.”
“그렇게 입에 딱 맞는 지형은 많이 없을 겁니다. 만약 있다고 해도, 인간들이 자신의 땅을 그리 쉽게 내줄 리는 없겠지요.”
결국 중요한 건 땅이다.
현실에서나, 게임에서나 부동산만큼 중요한 건 없다는 뜻!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카이가 말을 이었다.
“그럼 만약 그런 땅이 있다면, 두 분 모두 마을을 옮길 마음은 있으시고요?”
“나는 상관 없네. 어차피 타루타루에게 이동을 요청하면 끝이니까.”
“저는 세계수와 여왕님에게 여쭤봐야 할 문제 같습니다. 저 혼자서 결정하기엔 사인이 너무 커다란지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찬성입니다. 저희만으로 뮬딘교의 공세를 막는 건 역부족입니다.”
두 사람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카이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단 한 가지.
‘이들에게 선물할 땅. 그것이 필요해.’
아인종들의 생존을 위해서 땅을 구할 필요를 느낀 카이.
그런 그에게 바체가 다가왔다.
“카이. 전쟁이 끝났으니 수도로 돌아가 보고를 하고 뒷수습을 준비해야 한다.”
“수도…….”
눈을 반짝인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가지요.”
***
전쟁은 지휘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병사들이 존재해야 비로소 지휘관 또한 존재할 수 있는 것.
그 말은 수도에 초청된 이가 카이 혼자만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이곳이 왕궁인가.”
“난 라시온 왕국민도 아닌데, 긴장되는군.”
“말실수하면 안 되는데.”
왕궁에 입장한 길드 마스터들은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자유분방하던 캐서린조차 조용해질 정도로 왕궁의 분위기는 위압적이었다.
‘난 지난번에 한 번 와봤기에 그럭저럭…….’
문지기조차 레벨 250이 넘어가는 왕궁의 압도적인 위엄.
바체를 따라 복도를 걷고 알현실에 들어간 일행은 곧장 무릎을 꿇었다.
“어째 전쟁의 주역들이 다들 죄인 같은 몰골을 하고 있군. 고개를 들어라.”
베오르크 폰 라시온.
두 번째 만남이지만 매의 눈매와 사자 갈기 같은 머리카락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역시, 왕이라면 무릇 이 정도 위압감은 있어야겠지.’
위엄 스탯만 최소 1,000이 넘을 것 같은 압도적인 위압감!
베오르크는 고개를 돌리며 길드 마스터들을 쳐다보더니, 마지막으로 카이를 쳐다봤다.
“그대가 이번 전쟁에서 군을 지휘했다고 들었다.”
“미약하나마 한 손을 거들었을 뿐입니다. 폐하.”
“……자네는 여전히 겸손하군.”
가볍게 코웃음을 친 베오르크가 말을 이었다.
“짧게 말하지. 원하는 것을 한 가지씩 말하라.”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에게 내리는 국왕의 선물!
카이와 베오르크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갖던 길드 마스터들은 주먹을 꽉 쥐었다.
‘됐다.’
‘이것으로 다른 길드들과 더욱 격차를 벌릴 수 있어.’
‘이 소원에서 쟁취해야 할 건, 다름 아닌…….’
“마을을 세울 수 있는 땅을 원합니다.”
“……!”
“……!”
카이의 솔직한 답변에 길드 마스터들의 시선이 그에게 돌아갔다.
물론 그들이 원하던 것도 땅이었다.
일반적으로는 퀘스트를 깨고 레벨을 올려도 절대 손에 넣을 수 없는 가치였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길드가 있으니 마을과 도시를 세울 여건이 된다.’
‘언노운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는 길드도 없는 단신…… 가만, 설마?’
눈치가 빠른 길드 마스터들은 눈을 반짝였다.
그들의 반응을 살펴보던 베오르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땅이라. 못 줄 것도 없지. 어떤 땅을 원하느냐.”
“엘프들이 살 수 있는 넓고 깨끗한 숲을 끼고 있으며, 인어들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바다도 붙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드워프들이 좋아할 만한 광석들도 매장된 곳이라면 바랄 것이 없겠군요.”
‘저, 저런 도둑놈 같은!’
‘나열한 조건 중 한 가지만 안겨줘도 대도시로 키울 수 있는 땅이다.’
‘그런 땅을 전쟁 한 번 승리했다고 달라는 건가?’
길드 마스터들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언노운의 미숙함을 탓했다.
당연히 그러한 땅을 쉽게 줄 수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을 이어가던 그들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졌다.
‘가만. 언노운이 강조한 건 숲과 바다, 광석이 아니야.’
‘언뜻 그것들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주체는 어디까지나 아인종이다.’
‘한마디로 아인종들을 위한 도시를 만들고 싶다는 뜻이니…….’
‘그들과의 교류가 끊겨버린 왕국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미치겠군.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아니, 오히려 높다.’
라시온 왕국의 입장에서는 아인종이 한곳에 모여 도시를 형성하면 교류하기도 편해진다.
한마디로 카이는 베오르크의 간지러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준 셈!
‘NPC들의 친분을 이런 식으로 이용해 먹다니.’
‘비겁하지만, 저런 부분은 배워야겠군.’
‘확실히 효과적이야. 상대방이 거절할 수 없는 듣기 좋은 조건만 말해준 셈이니까.’
길드 마스터들의 눈에는 카이가 아인종들을 인질로 삼아 좋은 땅을 요구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베오르크도 그런 느낌을 받았기에, 망설임 없이 물었다.
“그 요구는 그대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함인가. 아니면 아인종들의 편의와 생존을 지켜주길 위함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후자입니다.”
지체 없이 대답하는 카이.
그러자 베오르크의 두 눈동자가 카이를 직시했다.
[베오르크가 절대자의 시선을 사용합니다.]
[베오르크가 당신의 말에 대한 진위 여부를 파악합니다.]
[베오르크는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베오르크가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명령했다.
“라시온의 전국 지도를 가져오너라.”
이윽고 커다란 지도가 눈앞에 펼쳐지자 베오르크는 턱을 쓰다듬으며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그러기를 잠시, 그가 지도의 한 부근을 집었다.
“바다와 숲을 끼고 있으며, 질 좋은 광석들이 매장된 산을 끼고 있는 장소다.”
‘그렇게 좋은 땅이 실재했단 말인가?’
‘그런 곳을 언노운이 날름 먹다니. 배가 아플…… 응?’
‘잠깐만, 그런데 저 곳은……?’
‘언노운 녀석. 국왕에게 밉보인 거라도 있나?’
베오르크가 점찍은 장소를 쳐다보던 길드 마스터들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압도적인 부러움과 질시에서, 동정으로 바뀌는 표정들!
영문을 모르는 카이에게 베오르크가 명했다.
“과거 푸른 역병의 저주를 받아 일대가 오염되어 모두가 꺼리던 땅이지만 그대라면 괜찮겠지.”
그 말에 카이는 확신했다.
‘타르달이 나에 대해 국왕에게 말했나 보군.’
자신이 태양의 사제라는 것을 감안했기에 저런 땅을 준다는 소리를 했을 터.
베오르크의 심중을 헤아린 카이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성은에 감사드립니다.”
“……?”
“……?”
길드 마스터들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카이를 쳐다볼 때, 고개를 숙인 그는 웃고 있었다.
‘저 땅을 전부 정화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리겠어.’
한마디로 저 땅이 원상복구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