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힐통령 152화
59장 오염된 땅(1)
언노운, 한정우가 컨벤션 홀에 들어온 순간.
방송 관계자들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호오. 저 청년이 언노운이라고?’
‘예상보다 훨씬 어린데?’
‘생김새만 보면 한국인인 것 같기도.’
‘다만 영상에서 보던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느껴지지는 않는군.’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의 방송 관계자들이었지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언노운입니다.”
한정우가 단상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순간 그 생각은 뒤바뀌었다.
‘음. 역시 만만히 볼 청년은 아니군.’
‘저렇게 앳되어 보이는데도 전신에 자신감이 넘치고 위엄이 스며들어있다.’
‘분명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해쳐나가면서 최고가 된 이들만이 뿜어낼 수 있는 기운이겠지.’
‘그럼 그렇지. 미드 온라인의 최고가 된다는 건 행운만으로 거머쥘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짧은 소개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한정우가 말을 이었다.
“오늘 여러분을 모신 이유는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미드 온라인 최초의 전쟁.
1만이 넘는 뮬딘 교의 군대와 NPC만 1,500명.
유저 포함 2,000명이 넘어가는 세력의 전쟁!
이 영상의 송출권을 구매하기 위해 방송국의 고위 관계자들은 이 자리를 찾은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해외의 방송국들 중 92억을 부른 곳이 있습니다.”
“9, 92억……?!”
“끄응.”
“이건 뭐, 시장 크기 자체가 다르니 머니 파워도 이렇게나 차이가 나버리는군.”
“영상의 판권 하나 사는데 저 정도 돈을 거리낌 없이 지불한다니…….”
많아봐야 15억에서 20억을 생각하던 이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예상했던 반응들이네.’
그들의 표정을 살피던 한정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들 표정이 너무 딱딱하시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저도 머리가 있으니 방송국 관계자분들의 입장과 심정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해외 시장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겠지요.”
끄덕끄덕.
EP와 국장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정우의 말에 동조했다.
“그렇지. 아무래도 시청자들의 숫자부터 말도 안 되게 차이가 나니까.”
“미국이나 중국…… 아니, 하다못해 일본만해도 한국 시장과는 파이가 비교도 못 할 만큼 크니까.”
“92억…… 한국에서는 영상 하나 산다고 내놓을 수 있는 돈이 아니지.”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한정우가 처음 92억이라는 말을 꺼냈을 때 경매 자체를 포기해버린 사람들은,
말 잘 듣는 학생들처럼 그의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다들 눈치를 채셨겠지만 저는 한국인입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랐고, 국적도 대한민국이지요.”
“역시!”
“이전 랭킹 1위였던 유하린도 한국인이라는 소문은 있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는데…… 언노운이 한국인이라니!”
“거래와는 별개로 정말 자랑스럽군!”
“얼마나 험난한 모험들을 했을지 궁금할 지경이야.”
올림픽 시즌 때, 대한민국의 선수가 금메달을 따면 모든 국민들이 박수를 보내며 이를 자랑스러워한다. 한정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게임일 뿐이지만, 누적 가입자 수만 10억 명이 넘는 게임이지.’
그런 곳의 1등.
한마디로 10억 분의 1이라는 확률의 존재가 한국인이라는 것이니까.
그 사실만으로도 국장과 EP들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한정우가 이용을 하려는 부분도 바로 이 점이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점을 내세워, 일부러 자국에 영상을 판다는 부분을 강조하자.’
본래 사람의 인상이란 첫 인상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첫 인상이 별로인 사람이라면 착한 일을 해도 꼴 뵈기 싫은 것은 만국 공통적인 사항!
반면에 첫 인상이 좋다면, 길을 가다가 우스꽝스럽게 넘어져도 귀엽게 보인다.
‘첫 인상은 강렬하게. 그리고 그 뒤에는 부드럽게.’
방송 관계자들의 마음을 가볍게 뒤흔든 한정우가 입을 열었다.
“오늘 여러분들께서 경매에 참여하시기 전에, 제가 내걸 조건은 단 두 가지뿐입니다.”
“조건이 어떻게 되는지 들어볼 수 있나?”
“너무 무리한 조건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제 조건은 간단합니다.”
잠시 말을 멈춘 한정우는 마치 어미새를 보듯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말했다.
“첫째. 경매 최저 시작 금액은 15억으로 할 것.”
“15억이라? 흠. 나쁘지 않군.”
“저 정도면 예상 범위 내야.”
“시작가가 저러면 경매가 치열해져도 맥시멈은 25억 정도……?”
“그래도 영상 하나 값으로는 제법 비싸지 않나?”
“무슨 소리인가? 해외에서 제시한 92억과 비교하면 착한 수준이지. 온게임즈는 참여하겠네.”
대다수의 관계자들이 보여주는 긍정적인 반응에 한정우가 씨익 웃었다.
‘만약 내가 해외 방송국에서 92억을 제시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도 같은 반응이 나왔을까?’
한정우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랭킹 1위의 언노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각적인 부분은 중요하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저들의 눈에는 고작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보이겠지.’
그렇다면 뒤에서 가격 담합을 해도 한정우가 손 쓸 방도는 없다.
게임에서라면 협상 스킬이라도 사용할 수 있겠지만, 이곳은 현실이었으니까.
그래서 카이는 92억이라는 패를 먼저 제시했다.
사람이란 본래 불가능한 조건을 먼저 보여준 뒤, 아슬아슬하게 가능할 법한 것을 요구하면 생각보다 느슨해지는 법!
‘이건 여명의 검술관에 등록비를 낼 때 배운 경험이지. 음음.’
하나같이 피가되고 살이되는 과거의 플레이들.
한정우는 지체없이 두 번째 조건을 내걸었다.
“두 번째. 영상 편집에 마이클 레이놀드를 프로듀서로 참여시켜 주십시오.”
“……응?”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영상의 판권 자체를 사려고 하는 것인데…….”
“다른 곳에서 편집자를 데려오면 그건 우리의 영상이라기보다는 으음…….”
“게다가 아마추어이기도 하고.”
직접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EP들이 살짝 불쾌한 기색을 내비췄다.
하지만 한정우는 전혀 주눅 들지 않은 기색으로 말했다.
“마이클은 제 영상을 몇 번이나 편집해 준 사람이며, 이미 그 실력은 업계에 정평이 난 상태입니다. 실제로 그가 만든 제 영상은 모두 영상미가 뛰어나기로 세계의 인정을 받은 상태지요.”
“그거야 그렇지만…….”
“물론 영상 편집을 잘하긴 하네. 하지만 이건 단순한 레이드가 아니라 전쟁이야.”
“단순히 영상을 편집하는 시간만 몇 주가 걸리는 대형 프로젝트지.”
“차라리 돈을 더 얹어주고 독자적으로 만드는 건 안 되겠나?”
자신들의 밥그릇에 다른 숟가락이 올라오는 것이 싫다는 눈치.
그러나 이 부분에 관해선 한정우도 물러설 수 없었다.
“물론 저도 프로듀서 분들과 감독님, 편집자 분들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제 입장이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제가 마이클과 아무런 상의 없이 방송국에 영상을 맡긴다면 제가 뭐가 되겠습니까. 그러니 마이클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끄응. 좋아. 대신 마이클의 실력이 명성에 비해 별로라면…….”
“물론 그 이후에 관해선 터치하지 않겠습니다. 프로는 실력으로 말하는 것이니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정우는 절대 그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았다.
‘마이클의 실력은 세계에서도 통용될 정도야. 본인이 귀찮아서 언더 쪽에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이제 자신은 커뮤니티의 동영상 게시판이 아닌, 브라운관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영상을 편집할 때 방송국을 무시하고 마이클에게 맡길 수는 없는 법.
‘그러니 마이클, 미안하지만 네가 양지로 올라와 줘야겠어.’
물론 본인이 거절하면 말짱 꽝이겠지만, 한정우는 그가 자신의 제안을 수락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야, 마이클한테는 벌써 앞부분을 보여줬으니까.’
마이클은 영상 편집을 누구보다 사랑한다.
그게 아니라면 잠조차 줄여가면서 일감에 파묻혀 지내지는 않을 터.
그 정도 열정이 있는 편집자라면, 한정우가 보낸 영상을 보는 순간 흥분할 수밖에 없다.
‘본인이 손대고 싶어서 지금쯤이면 짐부터 싸고 있을 수도 있겠네.’
피식 웃어보인 한정우는 근처의 직원을 불러 USB하나를 넘기면서 운을 띄웠다.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되기 전에, 상품은 보여드려야겠죠?”
“……상품이라면?”
“영상이죠.”
입 꼬리를 올린 한정우가 손가락을 튕기자, 컨벤션 홀의 모든 조명이 꺼졌다.
그리고 영화관과 버금가는 거대한 스크린에서.
영화와도 같은 한 편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총 러닝 타임 6시간 57분.
중간에 두 번이나 휴식 시간을 갖춰야 할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다들 스케줄이 꽉 차있는 바쁜 인사들.
하지만 그들은 누구 하나 자리를 떠나는 미련한 짓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상이 끝났을 때, 그들의 머리를 지배한 건 단 하나의 생각뿐.
‘이건 무조건 잡아야 한다.’
‘확신해. 만약 해외 방송국들이 이 영상을 봤다면, 못해도 제시가는 100억을 넘겼을 거야.’
‘원본이 이 정도다. 여기에 편집으로 음향 키우고, OST 삽입하고, 이펙트까지 먹이면…….’
‘영화관에서 돈 받고 상영을 해도 천만 관객을 넘길 수준이다.’
이 자리의 모두는 방송 방면의 프로들.
견적만 봐도 성공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날카로운 본능은 이 영상이 대박이라 말하고 있었다.
“16억.”
“17억.”
“18억.”
“에잇, 20억! 거기다가 시청률에 따른 인센티브 5% 지급!”
그것이 경쟁이 치열해진 이유였다.
자리에 편하게 앉아 과열되는 경쟁을 쳐다보는 한정우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상을 보여주는 게 정답이었나 보네.’
한정우만해도 물건을 살 때는 꼼꼼하게 따진다.
물건의 품질은 좋은지, 가성비는 좋은 편인지, 내구도는 어떻고 사용자들의 평가는 어떤지.
하물며 수십억짜리 영상을 판매하는 일이다.
‘당연히 저들이 최대한 가지고 싶게 만들어야지.’
그랬기에 영상을 미리 보여주고, 그들의 구매욕을 자극한 것!
그 결과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15억을 부르며 경매의 시작을 끊은 온게임즈를 필두로,
NET미디어나 TBC, GBM방송국의 인사들이 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으니까.
‘자, 그럼 얼마에 팔리려나.’
이미 가격은 38억을 초과했다.
거기에 특집 프로그램 편성은 물론이고, 시청률에 따른 인센티브는 15%까지 나온 상태였다.
“국장님. 이거 대박입니다. 제 눈 못 믿습니까? 제가 여태까지 대박친 프로그램이 몇 갠데요.”
“저번에 미국 CTN에서 수십 명끼리 치고받고 싸우던 영상 아시죠? 시청률 21% 나왔던 거요. 단언컨대, 이 영상 풀리는 순간 그건 소꿉장난으로 보일 겁니다.”
“반지의 제왕이랑 명량 보셨어요? 그거랑 버금가는…… 아니. 그냥 작살낸다니까요. 아! 예산 좀 팍팍 지원해 줘요!”
이윽고 국장들에게 전화를 걸어 생떼까지 쓰기 시작한 EP들!
하지만 치열한 경쟁 속에서는 단 한 명의 승자만이 탄생하는 법.
“48억에 시청률 인센티브 20%. 거기다가 언노운 님께서 이전에 커뮤니티에 게재하신 영상들도 특집 프로그램으로 묶어서 방영하고, 인센티브도 35%로 드리겠습니다.”
“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한정우는 방긋 웃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NET미디어의 낙찰을 축하드립니다.”
성공적인 거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