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
힐통령 155화
60장 태양이 떠오르는 곳(1)
‘내가 영주라니…… 영주라니!’
카이로서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자리였다.
그는 순수하게 엘프와 인어, 두 종족의 안전을 위해 이 땅을 선물할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다가온 기회를 걷어찰 정도의 바보, 천치도 아니었다.
‘이건 기회라고 봐야 하겠지.’
그것도 보통 기회가 아니었다.
리버티아는 풍부한 자원이 매장된 바다와 숲, 산맥을 끼고 있는 천혜의 요새.
그 말은 자신이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이곳을 대도시로 키울 수도 있다는 뜻!
카이는 자신이 영주로 임명되며 새롭게 얻은 권한은 행사했다.
“영지 관리창.”
[영지 관리]
이름 : 리버티아
등급 : F
인구 : 3,845명
월수입 : 없음
심플하다 못해 빈약하다는 느낌이 날 정도의 관리창.
하지만 카이는 그것이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냥,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3,845명이라…… 많기도 해라.’
단순히 교류를 이어오던 NPC에서, 이제는 자신이 지켜야 할 영지민이 된 이들.
카이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일족의 지도자들을 향해 말했다.
“우선 마을의 치안 상태가 너무 엉망이니 그 부분부터 손을 쓰겠습니다.”
[나의 힘으로 마을 주변에 환각 마법을 치는 것이 어떤가? 누구도 이곳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네.]
“……하지만 이미 한 번 뚫렸잖아요. 뮬딘 교에 의해서.”
[으으음.]
“꽁꽁 숨어 있기보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더 안전해요. 강하고, 많은 모험가들이 마을에 거주하게 만드는 것이 저희 리버티아의 첫 번째 목표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우선 이 거대한 땅에 낮게나마 성채를 지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쪽에 대한 지식은 없으시죠?”
카이의 질문에 그들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쿠아베라는 분명히 왕성이 있지만…… 그건 드워프들이 만들어준 것일세. 우리는 어떻게 만드는지 알지 못해.”
“저희 엘프들도 어버이의 보호 아래에 자라왔기에, 딱히 성채를 만들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끄응, 그럼 이 부분은 인간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야겠네요. 그러자면…….”
돈이 필요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카이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이거, 한 두 푼으로 끝날 일이 아닐 것 같은데?’
옅은 한숨을 내쉬던 카이에게 루테리아가 물었다.
[그런데 성채라는 것이 꼭 필요한 건가?]
“그야 물론이죠. 외적을 막아내는 것도 손쉬워지고……?”
형식적인 답을 늘어놓던 카이가 말끝을 흐렸다.
‘가만, 진짜 성채라는 것이 필요한가?’
엘프와 인어들은 인간들의 문명과는 담을 쌓은 이들.
각자의 독특한 생활 양식을 지닌 이들이었다.
‘이들에게 인간의 문명을 강요할 필요는 없어. 아니, 오히려 강요하지 않는 것이 더 좋아.’
엘프와 인어들을 보러 찾아오는 유저들은 색다른 것을 원할 것이다.
그런데 다른 도시와 똑같은 성채, 건물들을 지니고 있고 마을 주민들만 엘프, 인어라면?
‘식상해. 그건 너무 식상하다고.’
눈을 감은 카이는 곧장 고민에 잠겼다.
‘내가 여태까지 가본 도시들이 많지는 않아. 하지만…….’
그 중 가장 많은 유저들이 방문하고, 또 인기가 좋았던 것은 다름 아닌 아쿠에리아였다.
카이는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 이유에 관해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컨셉이 명확해. 그리고 즐길 거리도 많지.’
바다와 연결이 되어 있는 아쿠에리아는 수로 시설이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
덕분에 낚시를 즐기기도 좋았고, 커플들이 도시를 관통하는 수로 시설 위에서 곤돌라를 타며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베니스가 관광 도시로 유명한 이유와 같아.’
하지만 잘 나가는 것을 따라한다면 아류 밖에 될 수 없는 법.
카이는 거기서 한층 더 나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엘프와 인어. 그리고 나중에 입주할 드워프들의 동선을 모두 생각해서 도시를 만들어야 해.’
리버티아는 현재 건축물은커녕 흔한 창고 하나 없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말은 곧 땅 위에 무엇이든 지을 수 있다는 것!
‘결국 중요한 건 엘프와 인어들의 마을을 방문할 때 유저들이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야.’
한참이나 생각에 사로잡혀있던 카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루테리아.”
[왜 부르는가, 벗이여.]
“혹시 나무들을 이용한 건축물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세계수이자 자연의 수호자. 그 정도쯤은 간단하다네.]
“……좋네.”
씨익 미소를 지은 카이의 지시 아래에서 공사가 시작되었다.
***
사람이 게으름을 피울지라도, 시간은 절대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묵묵하고 부지런하게 그저 앞으로 흘러갈 뿐.
“아니요, 조금 더 왼 쪽으로!”
주루룩!
[이렇게 말인가?]
“좋네요. 딱 그 자리예요.”
카이와 인어, 엘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게으름을 피울 여유도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목표는 당연히 리버티아의 완성.
[이제 슬슬 마을의 윤곽이 보이는군.]
“이런 곳에서 살 수 있다니. 정말 흥미로운 공간이야.”
“아름다운 공간이에요. 카이 님은 건축을 전공하셨나요?”
루테리아와 카리우스, 엘라니아의 입에서는 연신 칭찬이 흘러나왔다.
만약 카이도 자신이 계획한 도시가 아니었다면 탄성부터 터트렸을 것이다.
‘됐어. 이 정도 퀄리티로 완성만 된다면…….’
여름의 워터파크 개장 날처럼, 끝도없이 들어오는 모험가들을 상대하느라 바빠질 것이다.
흐뭇함을 가득 머금은 카이의 입 꼬리가 하늘로 향했다.
쏴아아아아.
마치 잭과 콩나무에 나오는 것처럼 거대한 나무 기둥이 마을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것은 수천 개의 건물들!
‘각 건물 간 이동을 하려면 계단을 통해 걸어가거나, 인어 족들의 마법이 걸린 수로 엘리베이터를 통해야만 이동할 수 있지.’
물론 주민이 아니라면 수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기 위해 요금을 내야할 것이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거대한 나무 기둥에서는 기분을 좋게 만드는 향긋한 냄새가 뿜어져 나왔고, 수로 엘리베이터의 뒤쪽은 폭포가 마련되어 있어 아름다운 무지개를 자아내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몽환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도시!
“이런 도시가 세상에 또 있을 리 없지.”
판타지 그 자체인 도시.
마치 요정들의 나라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장소였다.
[그대의 요청이 모두 끝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군.]
“예. 하지만 크게 어려운 부분은 아닐 겁니다. 이제 마감만 신경 쓰면 되는 수준이니까요.”
리버티아는 나무 기둥 근처가 화려한 대신, 지상 부분은 약간 허전했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드워프들이 합류하면 어떻게든 해결해 주겠지. 내 능력은 여기서 끝이야.’
밑도 끝도 없는 무책임한 태도!
그건 마치 중간고사 한 달 전, 내일의 자신에게 공부를 맡기는 학생의 모습과도 같았다.
‘대충 마을 완성은 끝났어. 더 이상 내가 터치할 부분도 없으니…….’
이제는 정말 태양교의 본단으로 찾아가야 할 때.
카이는 일족의 지도자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태양교의 본단을 방문하고 최대한 빠르게 돌아오겠습니다.”
“이곳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음. 우리가 알아서 잘 대처하고 있겠네.”
“……그럼 믿고 다녀오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카이는 리버티아를 떠났다.
엘프와 인어들이 얼마나 일을 열심히 했는지, 길은 라시온 왕국의 수도와 버금갈 정도로 잘 닦여져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엘프들의 기술을 사용했기에 딱딱한 포장도로의 느낌보다는, 잘 다듬어진 시골 길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대된다. 리버티아.”
과연 이곳이 자신의 기대대로 무럭무럭 성장할 수 있을 것인지.
카이는 쉬이 장담할 수 없는 의문을 품은 채 길을 걸어갔다.
‘목적지는 태양교 본단.’
일컬어지길래 태양이 떠오르는 곳.
태양의 사제로 전직한 뒤에는 처음 방문하는 장소였다.
***
대륙 어딘가의 지하에 위치한 대전.
음침한 기운이 감도는 기둥들이 일렬로 늘어서있었고, 장소의 끝에는 옥좌에 위치해 있었다.
[…….]
그 옥좌에 앉아있는 남자는 검은색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생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 장소에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어둠에 동화되어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의 충실한 종, 모라크여. 임무는 무사히 수행했는가…….]
딱! 화아아악.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벽면에 붙어 있던 횃불들이 일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복도를 스쳐지나가던 검은색 연기들이 뭉치더니 사람의 형상으로 변모했다.
그는 곧장 남자의 앞에 부복하더니 고개를 숙여 바닥에 붙였다.
“예, 아트록 추기경님.”
[후보는 어떻던가. 적합자이던가?]
“사전에 철저히 조사한 대로, 그는 어둠의 정수를 받아들이기에 무리가 없어 보였습니다.”
모라크라고 불린 남자가 자신 있게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아트록 추기경은 이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눈앞에 위치한 자신의 종은 그를 실망시켰던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곧장 의식을 시행하라.]
“예. 하지만 최근 들어 모험가들의 방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모험가들?]
“예. 그들의 성장 속도는 보통이 아닙니다. 지금에야 벌레 같은 녀석들이지만, 오랜 시간을 주면 얼마나 성장을 하게 될지…….”
[확실히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뮬딘께서도 언급한 적이 있다.]
대륙의 누군가가 이 대화를 들었다면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악신 뮬딘이라는 단어는 그만큼 대륙인들에게 충격적이었으니까.
아트록 추기경이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가가각, 가가각.
그가 턱을 쓰다듬을 때마다 마치 칠판을 세게 긁는 듯한 소리가 났다.
[본교가 대륙에 우뚝 서기 위해서는 자그마한 변수조차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런 와중에 모험가들이라…… 제법 귀찮게 됐군.]
“제가 어찌해야 되겠나이까?”
[죽일 수 없다면 품어야겠지. 그들에게 뮬딘의 가르침을 널리 알려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모라크는 잠깐 무엇이 생각난 듯,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추기경님 그럼 카이라는 녀석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카이…….]
아트록이 대번에 불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뮬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교도 녀석은 처치해라.]
“하지만 그는 하란 주교가 이끄는 군대를 패배시켰을 정도의 강자입니다.”
[그때는 엘프와 인어, 다른 모험가들이 그의 뒤를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었지.]
콰드득.
옥좌의 팔걸이를 가볍게 쥐어서 부서트린 아트록이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적합자의 의식이 끝나는 대로 카이에게 보내라. 시험 상대로는 적당하겠군..]
그 명령에 모라크가 두 눈을 부릅떴다.
“서, 설마 그 애송이 하나를 위해 적합자를 보내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우리의 대업을 몇 번이고 그르친 녀석이다. 어설픈 병력을 보내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처치하는 것이 옳아.]
“……명을 받들겠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모라크는 다시 어둠의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흐음…….]
무료해 보이는 아트록 추기경은 턱을 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대전의 공기가 모조리 연소되었고, 횃불의 기능이 정지되었다.
그곳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침묵만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