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힐통령 157화
60장 태양이 떠오르는 곳 (3)
2년 전.
전직을 위해 라피스를 방문한 카이는 감탄했다.
‘신성하고 청렴한 도시다.’
태양교 헬릭의 이름 아래에 모인 순수한 신도와 사제, 성기사들.
그들은 자신이 믿는 신의 이름에 누가 될 만한 행동을 일체 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도왔으며, 배려했고, 신뢰했다.
비록 대도시 크기의 왕국이었지만, 그 안에 흘러넘치는 밝은 기운과 인정만큼은 다른 왕국들의 수도에서도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음. 겉보기에는 지난번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데…….’
무장을 한 채 질서정연하게 도시를 돌아다니는 성기사단.
사제복을 입고 태양교의 구절을 읽으며 헬릭의 가르침을 배우는 거리의 사제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카이는 조금이지만 안도감을 느꼈다.
‘생각보다 부패가 심한 건 아닐지도…….’
만약 일반 사제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태양교의 본단이 부패했다면, 손 쓸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거리는 아직 여전해.’
한참이나 도시를 둘러보던 카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을 내렸다.
아직까지 라피스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제들은 타인에게 친절했으며, 배려심이 깊었다.
“그렇다면 바로 들어가 봐야겠지.”
이어서 카이가 당당한 걸음으로 방문한 곳은 태양교의 본단!
굳이 태양교의 신자가 아닐지라도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장소였다.
‘음? 여기는 살짝 분위기가…….’
다르다.
그 사실을 느낀 카이의 인상이 살짝 찡그려졌다.
‘예전에도 이곳의 분위기가 가볍지는 않았어. 하지만 그건 예의를 갖췄기 때문이지.’
헬릭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소란을 피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태양교의 본단은 매우 조용했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지만…….
‘분위기까지 무거워.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어.’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던 카이에게 사제 하나가 다가왔다.
“형제님은 이곳이 처음…… 일 리는 없겠군요. 모험가시지요?”
“예, 그렇습니다만.”
카이의 대답에 사제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조그마한 통을 내밀었다.
“그렇군요. 형제님의 앞날을 태양이 비추기를.”
물끄러미 통을 쳐다보던 카이가 물었다.
“저기, 이 통은 뭡니까……?”
“헌금 통입니다. 헬릭님을 향한 형제님의 신앙심을 증명해 주십시오.”
“…….”
헌금이란 신에 대한 믿음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일 뿐, 절대 강요되어선 안 된다.
‘예전에 방문했을 때도 이런 식의 강요는 없었어.’
카이는 인상을 찌푸리는 대신, 도리어 활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랑은 조금 다른 것 같네요. 무조건 내야 하는 건가요?”
“하하, 형제님. 태양신의 가르침을 대륙에 널리 퍼뜨리는 데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 몬스터들이 기승을 부리니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더 큰돈이 필요하게 되었지요.”
“……그런가요.”
지나가는 개도 안 믿을 이유다.
하지만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카이는 1골드를 꺼내 헌금함에 넣었다.
“부디 태양교의 앞날에 번영이 있기를.”
“아! 믿음의 증명에 감사드립니다. 모험가님의 앞날에도 영광이 함께하기를.”
용무를 마친 사제는 다시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음 타깃에게 떠났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카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시스템은 적어도 헬릭이 원하는 바는 아닐 거야.’
자신은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지만,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신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배가 고프고 가난한 이들이 헬릭의 자비를 바라고 방문하는 경우도 많다.
‘예전에는 태양교에서 소박한 식사와 여비, 숙식 자리를 내어주고, 정착할 수 있는 마을을 주선해 주었는데…….’
“어허!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들어오십니까!”
아쉽게도 그 또한 과거의 이야기인 모양.
카이는 소란이 일어난 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예배실로 들어가는 넓은 복도였는데, 초라한 행색의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남자를 오만한 눈으로 깔보는 것은 다름 아닌 태양교의 고위 사제.
누더기 옷을 입고 있던 남자는 고위 사제의 바짓단을 잡으며 빌었다.
“사, 사제님. 제발 기도만…… 기도 한 번만 하게 해주십시오……!”
“기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고위 사제는 발을 뒤로 빼며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죄송하지만 헬릭께서는 염치없는 분의 기도를 들으실 만큼 한가하지 않으시답니다.”
“하지만 헬릭께서는 태양과 자비의 신이잖습니까…….”
“아아, 자비.”
고위 사제가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동전 주머니를 꺼냈다.
“그래요. 그분께서는 몹시 자비롭습니다. 당신 같은 분에게도 베풀라고 가르쳐주셨거든요.”
짤그랑, 짤그랑!
은화가 바닥을 두드릴 때마다 누더기 사내의 두 눈에서 굵은 물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
“제 딸아이가…… 딸아이가 아픕니다! 사제 분의 지원은 바라지도 않으니 제발 예배실에 한 번만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예전에는 아무 문제없었잖습니까! 대체 왜 지금은……!”
“그건 예전 아니겠습니까.”
고위 사제는 남자의 눈물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사람이란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 아닌가요.”
“제발…… 제발 한 번만…….”
“끌고 나가세요. 신성한 태양교의 본단에 믿음이 부족한 이가 발을 들였습니다.”
그의 명령에 주변에 대기하던 성기사들 몇 명이 머뭇거렸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고위 사제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당신들, 믿음이 부족하군요?”
“아, 아닙니다.”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그의 눈길을 받은 성기사 두 명이 누더기 사내를 조심스럽게 부축하며 밖으로 끌고나갔다.
“쯧, 별 거지 같은 것들이 신성한 곳에 꾸역꾸역 밀려오는군요.”
혀를 차며 중얼거린 고위 사제는 그 말을 끝으로 복도의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카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체란티아.”
[불렀나?]
동시에 카이의 등 뒤에서 나타나는 반투명한 인영.
2미터의 신장을 자랑하는, 사제보다는 야차를 닮은 사나운 인상의 사내였다.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걸까요. 태양교.”
[뭐,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놀라거나 분노하지 않으시네요.”
[내가 살아 있던 때만 해도 이런 일이 두 번 정도 일어났지. 한 번 정도 뒤집어주면 또 몇 십 년 동안은 부패 없이 잘 굴러가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하…….”
악은 아무리 박박 문질러도 사라지지 않는 때라도 되는 걸까.
카이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자, 체란티아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그대가 원한다면 무시할 수도 있는 일이고. 헬릭께서도 이와 같은 일을 묵인하고 계시지 않나? 이건 인간계의 일이니 온전히 자네에게 달려 있다네.]
“그렇죠. 솔직히 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긴 한데…….”
자신은 헌금을 낼 돈도 있고, 때문에 기도도 언제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툭, 툭.
자신의 관자놀이와 심장을 차례대로 찌른 카이가 입을 열었다.
“여기랑 여기가 너무 뜨겁네요.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요.”
[화라도 난 것인가?]
“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화라기보다는…… 그냥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안 듭니다. 왜 약자를 보호해야 할 이들이 앞장서서 약자를 괴롭히는 겁니까?”
[시미즈는 열심히 부정했지만, 나는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라고 본다.]
“성악설을 말하는 겁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설마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악하겠나? 다만…… 권력과 명성을 손에 넣은 인간은 확실히 사고방식 자체가 달라지게 되어 있다.]
“체란티아도 그랬나요?”
[아니. 만약 그랬다면 내가 사도가 되는 일도 없었겠지. 항상 기억해라. 사도의 길은 그 무엇보다 숭고하며, 청렴해야 한다.]
“숭고, 청렴인가요.”
[떠올려 보게. 자네가 사제의 맹세를 하던 순간을.]
“사제의 맹세…….”
가만히 눈을 감은 카이는, 자신이 이곳에서 전직을 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비록 전직을 하기 위해 형식상 외운 문구이긴 하지만…….’
카이가 낮게 중얼거렸다.
“사제란 항상 청렴결백해야 하며, 당신의 가르침에 따라 약자를 위하고, 당신의 힘으로 악을 멸하며 약자들을 지켜내야 한다.”
[잘 아는군.]
씨익, 입 꼬리를 올려 호쾌한 미소를 지어 보인 체란티아가 물었다.
[그럼 이제 어찌할 생각인가? 이곳은 라피스. 아무리 썩었다고는 해도,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신성 왕국이다.]
“용의 몸통이 아무리 길다 한들 머리가 잘리는데 안 죽고 배기겠습니까.”
카이의 왼쪽 소매에서 기분 좋은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촤르륵, 촤르르륵.
***
교황 알버트.
그는 태양교의 32대 교황이자, 현존하는 태양교 최고 직급의 사제였다.
하지만 그의 찬란한 명성과는 달리,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아아, 죽어서 헬릭님을 뵐 낯이 없구나.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을꼬.”
모든 것은 자신의 방심과 믿었던 추기경들의 배신 때문이었다.
“몰리온과 버나드…… 그들이 이렇게까지 변했을 줄이야.”
물론 그들의 변화를 미처 알아내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 컸다.
그들은 젊었을 때 신의 말씀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자는 생각 하나로 뭉친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자신이 교황의 자리에 선출되었을 때, 아무런 고민 없이 그들에게 추기경의 직위를 맡겼다.
‘그것이 벌써 10년 전이군. 그리고…… 2년 전부터 두 사람이 조금씩 변했다.’
처음에는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안 좋은 소문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뇌물을 받고 성기사단을 파견해 줬다거나, 영지에 축복을 내려줬다는 유언비어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믿지 않았지.’
수십 년을 함께해온 친우들이었다.
그들의 굳센 믿음을 잘 알고 있는 알버트였기에, 그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다음은 헌금의 강요였다.
알버트는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추기경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뮬딘 교를 상대하려면 성기사들을 더욱 육성해야 한다고. 그를 위한 자금이 필요하다고 했었지.’
하지만 추가적으로 육성된 성기사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때서야 알버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현재 제정신이 아니다.’
마치 악덕 영주가 영지민들을 상대로 미친 듯이 세금을 뽑아먹는 것처럼,
태양교는 수백만, 아니 대륙에 존재하는 수천만의 신자들을 상대로 돈을 쓸어 담고 있었다.
“이건 옳지 않아. 게다가 그 돈이 모두 어디로 가는지도 확실치 않으니…….”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돈이 절대 태양교를 위해 쓰이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지금은 각 왕국과 제국조차 잠잠한 평화의 시대.
그토록 많은 돈이 필요할 일도, 사건도 없었다.
“후우. 정말 생각하기 싫지만…….”
태양교를 내부로부터 무너트리고, 흡수할 생각을 할 수 있는 세력.
감히 태양교의 추기경들을 상대로 매력적인 제안을 할 수 있는 곳.
알버트는 그러한 곳이 딱 한 군데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뮬딘…… 아, 아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
뮬딘 교가 돌아왔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둠 추적자들의 모든 보고를 거의 실시간으로 받아보고 있었으니까.
‘그들이 부활의 징조를 보인 순간부터 교단 내부의 단속을 철저히 했다. 그런데도…….’
사태가 이 지경이 되다니.
뮬딘 교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똑똑.
알버트는 누군가의 방문에 입을 열었다.
“누구신가.”
“성하, 외출하실 시간이옵니다.”
“……외출?”
“예. 추기경 두 분께서 긴히 하실 말씀이 있다고, 모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방문자의 말에서 무언가 꺼림칙한 기분을 느낀 알버트가 거절했다.
“직접 찾아오라 전해주시게.”
“죄송합니다만…….”
딸깍.
알버트의 허락도 없이 문을 연 방문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를 따라 방에 들어온 몇 명의 성기사들이 알버트를 에워쌌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교황 성하. 두 분께서 꼭 모셔오라고 하셔서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가?”
알버트의 질문에 깊은 후드를 눌러쓰고 있던 사내가 이를 벗었다.
이어서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사제가 입을 열었다.
“모라크라 불러주시옵소서. 성하.”
“…….”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알버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주변을 둘러본 그는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안내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