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힐통령 159화
60장 태양이 떠오르는 곳(5)
모라크가 쥐고 있던 알버트의 턱을 놓자, 그의 몸이 스르르 바닥에 무너졌다.
곧이어 고개를 돌린 그의 두 눈동자는 새롭게 등장한 사제 한 명을 쳐다볼 수 있었다.
“흥미롭군요.”
성스러워 보이는 새하얀 사제복을 입고, 후두를 깊게 눌러쓴 사제.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을 지은 모라크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죽이세요.”
다시금 움직이는 뮬딘 교의 암흑 성기사들.
태양 기사단을 처치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고, 머릿수도 많은 이들이었다.
사제의 죽음을 확정지은 모라크는 알버트 교황을 쳐다봤다.
“자, 그럼 저희는 하던 일이나 마저…….”
촤르르르륵! 콰앙! 콰앙!
그때 뒤쪽에서 들려오는 거친 파열음.
모라크는 하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파열음이라고?’
상대방은 성기사도 아닌 일개 사제다.
‘그런데 어째서 태양 기사단을 쓸어버릴 때보다도 더 거센 저항을 할 수 있는 것이지?’
그 궁금증이 모라크의 고개를 돌렸고, 그의 눈동자가 크게 뜨여졌다.
바닥을 나뒹구는 뮬딘 교의 암흑 성기사 세 명.
촤라라락.
그리고 조용히 사슬을 끌어당기는 사제의 왼손.
그 정보들을 취합하던 모라크가 돌연 박수를 쳤다.
“그렇군요! 아아아! 후드를 깊게 내려서 몰라봤잖습니까. 당신이 주제도 모르고 교단의 대업을 방해하는 버러지, 카이로군요!”
“……날 아나본데.”
“알다마다요. 애초에 이번 일이 끝나면 당신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이거, 생각보다 빨리 죽기를 바라시나 보군요.”
모라크는 귀찮은 일을 덜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본래라면 두 번째 적합자를 이용해서 죽일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럴 필요는 없겠지요.”
그의 오른손이 올라가자, 수십여 명의 뮬딘 교 암흑 성기사들이 무기를 빼들었다.
“당신은 뮬딘 교의 가르침에 저항하고 사사건건 교단의 대업을 방해하는 인물. 아무리 부활의 권능이 있는 모험가라지만…… 몇 번이고 반복해서 죽이면 언젠가는 저항할 의지조차 남지 않겠지요.”
“유감.”
카이는 강인한 의지의 롱소드를 뽑으며 협곡 안에 위치한 수많은 성기사들을 쳐다봤다.
‘암흑 성기사 서른. 암흑 사제가 스물.’
게다가 스무 명의 암흑 사제들은 모두 협곡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원거리 지원과 공격에 특화된 이들이니만큼 거리의 이점을 살리겠다는 뜻!
‘사제들을 보호하겠다고 협곡 위로 보낸 판단은 좋았어.’
무릇 지휘관이라면 당연히 할 만한 판단이었다.
다만…….
“날 무시해서는 안 되지.”
손가락을 강하게 튕긴 카이가 소리쳤다.
“강화 소환, 미믹, 블리자드!”
스파크를 그리며 바닥에 그려진 두 개의 마법진이 각각 익숙한 생물을 소환해 냈다.
카이는 자신의 귀여운 펫들을 쳐다보며 명령했다.
“블리자드는 나와 같이 전면전을! 그리고 미믹은…….”
척!
협곡 위쪽을 가리킨 카이가 명령했다.
“킹 샌드웜, 물어!”
명령과 동시에 미믹의 덩치가 무섭도록 불어났다.
순식간에 수십 배나 커진 미믹의 덩치!
“호오오, 이것이 보고서에 쓰여 있던…….”
킹 샌드웜으로 변한 미믹을 관찰하던 모라크는,
녀석이 협곡의 벽을 파먹으며 사라지자 그때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차! 킹 샌드웜!”
이 협소한 공간에서 저렇게 무식하게 덩치가 큰 녀석을 가지고 할 만한 일은 하나밖에 없다.
‘카이 녀석, 판을 뒤엎을 생각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모라크는 협곡 위에서 성기사들을 지원하던 사제들에게 소리쳤다.
“도망쳐라! 아니, 지금 당장 그곳에서 내려와!”
“……?”
암흑 사제들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쩌저저저저적!
그들의 두 다리가 딛고 있던 땅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어어어어!”
“무, 무슨!”
당황해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그들은 순식간에 수십 미터의 거리를 떨어졌다.
물론 암흑 성기사들은 사제들을 구하려고 분주히 움직였다.
하지만 그걸 가만히 지켜볼 카이가 아니었다.
“블리자드. 아주 제대로 괴롭혀.”
“크르륵.”
송곳니를 드러내며 씨익 미소를 지은 블리자드는 특유의 기민한 몸동작을 선보였다.
타다다닥!
벽을 타고 달리며 두 자루의 곡도로 떨어지는 사제들의 몸을 난자한 것!
물론 카이는 블리자드가 날뛸 동안, 자신을 에워싼 성기사들을 상대했다.
콰아아아앙!
전후좌우.
나노초 단위로 쏟아지는 무수한 검격들 사이에서,
카이는 자신의 전력을 숨기지 않았다.
“신성 폭발.”
모든 스탯이 말도 안 되게 상승하고, 카이의 몸놀림도 과감해졌다.
‘예전이라면 신성 폭발이 최후의 한 수 같은 느낌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서걱! 서걱!
[7,404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신성력을 700 회복하였습니다.]
[신성력을 550 회복하였습니다.]
[신성력을 1,200 회복하였습니다.]
적에게 피해를 입힐 때마다 차곡차곡 쌓이는 신성력!
신성 폭발은 초당 1,000이라는 무지막지한 신성력을 소비하는 스킬.
하지만 고급 여명의 검법과 함께라면 무한정으로 사용이 가능할 정도였다.
‘게다가…….’
예전에는 신성력을 신경 쓴다고 자주 사용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거리낌없이 사용할 수 있다.
“홀리 익스플로젼!”
콰아아아아아!
카이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빛의 광선이 그대로 암흑 성기사들의 가슴을 강타했다.
신성력 스탯에 비례하여 적들에게 데미지를 주는 무지막지한 공격력!
‘게다가 뮬딘 교의 적들은 태양교의 신성력에 취약하지.’
한 마디로 카이를 잡으려면 암흑 성기사들 정도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못해도 이단심판관들을 몇 마리 데려왔어야 했겠지만…….”
두 명의 추기경들이 도움을 주었다고 해도, 이곳은 신성 왕국 라피스 인근이다.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은 암흑 성기사, 사제들이라면 몰라도,
뮬딘 교의 이단심판관들이 활동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는 곳.
“뭐, 반응을 보니 날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지만.”
자신은 지난 전쟁에서 이단심판관도 홀로 쓰러트렸던 전적이 있다.
만약 이곳에 올 줄 알았다면, 이렇게 조촐한 전력을 준비해 두지는 않았을 터.
‘정리하는 건 시간문제겠어.’
카이가 느긋한 마음으로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한 줄기 고함이 그의 몸을 멈춰 세웠다.
“동작 그만! 거기까지다!”
카이는 고개를 돌려 알버트 교황을 인질로 삼고 있는 모라크를 쳐다봤다.
“네 놈이 날뛰는 것도 여기까지다.”
“글쎄, 나 아직 몸도 다 안 풀렸는데.”
“눈만 있다면 알 수 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의 전력으로 네놈을 막을 수 없다는 걸 말이지.”
모라크는 순순히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했고, 담담히 선언했다.
‘……무슨 꿍꿍이지?’
카이가 눈매를 가늘게 뜨자, 모라크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우리와 손을 잡자.”
“……뭐라고?”
“네놈의 재능, 신성력, 그리고 전투 센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모라크는 덜덜 떨리는 목함을 들어 보였다.
“어둠의 정수께서 널 선택하셨다. 본래 적합자는 알버트 교황이었는데 말이지.”
“……그게 무슨 말이지?”
“훗. 쉽게 설명해 주지.”
모라크는 들고 있던 목함을 열더니, 한쪽 손에 특수한 장갑을 꼈다.
그러고는 씨익 웃으며 어둠의 정수를 꺼내들었다.
“우선 이것이 무슨 물건인지 알고 있나?”
“처음 보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기묘한 구슬.
카이는 이와 같은 물건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어둠의 정수 조각…… 아니, 원본인가?”
“그래. 이건 조각 따위가 아니다. 어둠의 정수 그 자체. 뮬딘 교가 자랑하던 어둠의 정수는 마침내 완성이 되어 사람에게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
“사람에게?”
“혹시 베이거스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있나.”
“약탈자들의 왕.”
“잘 아는 군. 그 녀석도 우리 교단이 만들어낸 작품이지.”
“……뭘 잘났다는 듯이 말하고 있어. 미안하지도 않아?”
카이가 싸늘한 눈빛으로 중얼거리자, 모라크가 광소를 터뜨렸다.
“미안? 크하하하!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오히려 베이거스는 우리에게 고마우면 고마웠을 것이다. 좀도둑질이나 하던 녀석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만들어줬으니까 말이지.”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서 나에게 손을 잡자는 저의가 뭐냐.”
“어둠의 정수는 항상 더욱 강력한 적합자를 원하지.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선…….”
덜덜덜.
모라크가 어둠의 정수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바로 네 놈이 가장 강력한 적합자다. 무려 태양교의 교황인 알버트보다도 어둠의 정수를 더욱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
“…….”
자신들의 군대를 멸망시키고, 사사건건 훼방을 놓은 것이 자신이건만.
저 녀석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동맹을 제안하고 있었다.
‘이게 뮬딘 교의 방식인가.’
더 강해질 수 있다면,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방법을 택하는 이기적이지만 확실한 방법.
카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모라크가 재촉했다.
“자, 어쩔 생각인가. 우리와 손을 잡겠나?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어둠의 정수는 예정대로 알버트 교황의 입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시간을 벌 수 있을까 고민이 되던 찰나,
카이의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헬릭이 무기를 든 채 이 상황을 관심있게 주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자신을 배신할 시, 헬릭은 주저 없이 신의 철퇴를 내릴 것입니다.]
“…….”
신이라는 작자가 이렇게 속이 좁을 수가!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을 받드는 교단의 최고 우두머리를 구하기 위해 골머리를 끙끙 앓고 있건만!
얼이 빠진 카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이를 거절로 받아들인 모라크는 친절한 미소를 거두었다.
“그렇다면 협상을 결렬이군.”
“뭐? 아니 잠……!”
깜짝 놀란 카이가 그를 제지하려 했지만, 모라크의 움직임은 빨랐다.
반응을 할 틈도 없이 이루어진 기습이었다.
“커, 커억……!”
강제로 벌려진 턱으로 어둠의 정수를 삼키게 된 알버트 교황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아윽…… 크아악!”
항상 그의 몸 주변을 감돌던 희미한 황금빛 신성력이 마치 수명이 다 된 전구처럼 깜빡였다.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모라크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지금 전력으로 네놈을 이기진 못하겠지. 오늘을 놓치면 이런 기회가 두 번 다시 올 수도 없으니……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교황은 타락시켜야겠다. 이것으로 태양교는 정신없어지겠지.”
모라크는 어쩔 거냐는 표정을 지으며 카이를 조롱했다.
그에게선 이미 자신의 임무는 완수했다는 뿌듯함과 안도감이 느껴졌다.
“……비켜.”
콰드득! 서걱!
빠르게 눈앞의 성기사들을 처치한 카이는 서둘러 끙끙거리는 알버트 교황에게 다가갔다.
모라크는 카이가 달려오자 이미 잽싸게 암흑 성기사들의 뒤로 도망친 상황.
그들의 뒤에 숨은 모라크가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크하하하하! 단언컨대 어둠의 정수는 뮬딘의 힘이 담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물건이다. 한 번 적합자의 몸에 들어간 순간, 그 누구도 이를 정화할 수는 없을 터.”
털썩.
모라크의 조롱을 귓등으로 흘린 카이가 알버트 교황을 부축했다.
“교황님 괜찮으십니까?”
“끄윽…… 제, 제발…….”
교황의 얼굴에는 푸른 핏줄이 거칠게 튀어나온 상태였다.
그는 카이를 쳐다보며 애원했다.
“날…… 날 죽여주게. 헬릭 님에게 더 큰 무례를…… 끼치기 전에……!”
“죽이라니요. 지금 사제인 저보고, 교단의 교황을 죽이라는 겁니까?”
“크윽…… 어, 어둠의 힘…… 나는 막을 수가 없네! 더 늦어버리면…… 돌이킬 수가…….”
“알버트 교황님.”
카이는 마치 유치원생을 혼내는 선생님처럼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사제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사람입니다. 저에게 맡기세요.”
“이건…… 이건 다르네! 내 몸이니 내가 가장 잘 알 수 있어! 이것은 일개 사제가 정화할 수 없는…….”
“예. 일개 사제라면 못 하겠지요.”
무기를 내려놓은 카이의 두 손이 막대한 신성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저는 사제로 전직할 때 똑똑히 선언한 적 있습니다. 사제란 항상 청렴결백해야 하며, 당신의 가르침에 따라 약자를 위하고, 당신의 힘으로 악을 멸하며 약자들을 지켜내야 한다고.”
“라피스…… 선서……?”
사제와 성기사로 전직할 시, 헬릭의 석상 앞에서 누구나 선언해야 하는 선서.
오랜만에 듣는 그 문장에, 알버트 교황이 눈물을 흘렸다.
카이는 주름진 얼굴을 흘러내리는 그의 눈물을 닦아내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카이의 두 손에서 뿜어져 나오던 막대한 신성력이 마침내 절정에 이르렀다.
“전 사제의 본분을 행하겠습니다. 아, 참고로…….”
황금빛으로 물든 카이의 두 손이 알버트의 이마 위에 얹어졌다.
“저 일개 사제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