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힐통령 161화
61장 전직, 태양의 사제!(2)
어떠한 일이 끝날 때, 사람은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후회, 성취감, 허망함, 혹은 분노.
카이는 알버트 교황의 얼굴 위에서 다양한 감정의 편린을 엿볼 수 있었다.
“교황님. 이제 돌아가시지요.”
“……알겠네.”
카이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난 알버트 교황의 얼굴에는 수심이 깊어 보였다.
“지금 자네는 어떠한 기분이 드는지 물어도 되겠나?”
“그냥 속이 시원합니다만.”
시원할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자신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뮬딘 교의 전력을 또 깎아먹었고, 뮬딘 교단 내에서도 제법 위치가 있어 보이는 모라크도 생포한 상태였으니까.
“그렇군. 나는 지금…… 굉장히 부끄럽고, 화가 나며, 또 스스로의 무능함이 한심스럽네.”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은 알버트 교황이 자글자글한 주름이 퍼져 있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쓰다듬었다.
“자네는 이제 어찌할 생각인가?”
“교단으로 돌아가야지요. 두 명의 추기경과 결탁한 부패한 모든 이들을 끌어내고 모라크에게 뮬딘 교에 대한 정보를 캐내야합니다.”
“지극히 옳은 말일세. 옳은 말이지만…….”
알버트 교황이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세상은 옳고 정의로운 생각만으로 돌아가는 게 아닐세. 실제로 두 추기경과 결탁한 인물들이 누군지 선별해낼 능력이 내게는 없네. 또한…… 알아낸다고 해도 그들을 처벌할 힘도 없지.”
“……하지만 교황님이시잖아요?”
“허울뿐인 교황이지. 나의 우유부단함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네. 선대의 교황분들께서는 강력한 카리스마나 모두가 존경하며 따를 만한 자애로움을 갖추셨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평범한 신도였을 뿐이네. 그저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해주고,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 특기인 사람이었을 뿐이지. 그저 내가 올바르면, 내가 친절히 대하면 다른 사람들도 나의 진심을 알아줄 것이라 믿었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더군.”
알버트의 말은 카이에게도 제법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잘하면 남들이 알아준다라…… 세상은 절대 그렇지 않지.’
물론 그러한 마음을 알아주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
‘한 번 만만한 모습을 보이면 끝이지.’
그것은 카이가 22년이라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터득한 경험이었다.
이 세상은 절대 착한 사람이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니었다.
결국 카이는 타협을 했다.
도와줄 가치가 있는 사람만, 자신의 마음이 끌리는 사람만 도와주기로.
잠시 고민하던 카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교황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요. 당장 교황님만 하더라도 자신이 그들에게 맞출 생각을 하지 않으셨잖아요. 자신이 친절히 대하면 남들도 그 마음을 알아줄 거라 믿고 그 신념을 꿋꿋하게 관철하셨죠?”
“그건 그러네만…….”
“교황님은 착하신 분이예요. 마음씨도 따뜻하고요. 하지만 이걸 조금 나쁘게 말하면 너무 무르세요. 상처가 곪은 부분을 잘라내지 못해서, 결국 팔 전체를 잘라야 할 지경까지 왔죠.”
“……부끄럽군. 할 말이 없네. 사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지난 세월에 대한 회의감이 크게 들더군. 교황이 된 지 12년. 사제가 된 지는 벌써 40여 년…… 난 그 세월 동안 대체 무엇을 좇았던 걸까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네.”
“교황님은 나쁘지 않아요. 그리고 그 뜻을 계속 관철시킬 방법도 있습니다.”
교단 내의 지지 세력이 약하다는 것.
그것이 현재 알버트 교황이 지니고 있는 유일한 문제점이었다.
‘하지만 내가 힘을 실어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
만난 건 잠깐이지만, 카이는 숱한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알버트라는 사람이 청렴결백하며,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것을.
어느새 걸음을 우뚝 멈춘 알버트 교황은 우묵하고 깊은 눈으로 카이를 쳐다보았다.
“그런 방법이 정말 있단 말인가? 사제의 본분. 부패를 척결하고 약한 자를 위하며 사랑을 베푸는 삶을 아무런 문제없이 관철시키는 방법이…… 정말 있다는 말인가?”
“물론입니다.”
카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
그 대답에 알버트 교황은 귀여운 손자를 보듯 카이를 쳐다보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마음은 고맙게 받겠네. 확실히 자네는 강한 사람이야. 나의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으니 말이지. 하지만 이후에 펼쳐질 싸움은 한 사람의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닐세. 명분과 세력이 더 중요한 싸움이 될 것이야. 현재의 교단은…… 이런 말을 하기 부끄럽지만 부패한 귀족들의 정치판이나 다름이 없네.”
“명분과 세력이라, 확실히 강력한 명분이 있다면 세력을 모으기도 쉽고, 신도들의 지지도 크게 받을 수 있겠지요.”
“맞네. 무력이 개입할 여지는…… 크지 않지.”
“그럼 현재 교단 내부에서 교황님을 적대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명분은 뭡니까?”
“주축이었던 버나드, 몰디온 추기경은 교황의 능력 부재로 인한 교단의 몰락을 주장했지.”
“능력의 부재라고요? 그렇게 보이시진 않는데요.”
“이런 말을 하기엔 부끄럽지만, 내가 교단의 지휘봉을 잡고 있을 때의 교단은 그리 부유하지 못했네.”
“왜요?”
“가난하고 배를 굶는 사람들, 안타까운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기 때문이지.”
“그건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자비로움과 선을 관장하는 태양신의 신도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하지만 현재 교단의 높은 역할을 맡고 있는 이들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겠지.”
“……한 마디로 굴릴 수 있는 돈이 적은 게 마음에 안 든다. 이거군요.”
“허허…….”
알버트 교황은 힘없는 웃음으로 말끝을 흐렸다.
‘흐음. 명분이라…….’
교황의 처량한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교황님. 혹시 시미즈와 체란티아, 패트릭.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이 뭔지 아십니까?”
카이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알버트 교황의 몸이 한순간 굳었다.
이어서 눈을 가늘게 뜬 그는 카이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겐가?”
“교황님이 워낙 정신이 없으셔서 알아차리지 못하셨나 봅니다.”
교황의 어깨를 놓고, 뒤로 한 발자국을 물러선 카이가 양 팔을 옆으로 쭉 뻗었다.
“제 옷을 보고 뭔가 느껴지시는 게 없으신가요?”
“……자네가 입고 있는 사제복 말인가?”
카이의 뜬금없는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린 알버트 교황이 이를 자세히 살폈다.
“여태 본 적 없는 부드러운 원단으로 만들어진 듯하군. 그리고 곳곳에 황금빛으로 각인되어있는 문양은 고급스럽고…… 가슴팍에 새겨진 태양은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처럼……?”
하나씩, 하나씩.
카이가 입고 있는 사제복의 특징을 나열하던 알버트 교황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 설마 그 옷은?”
경악한 알버트 교황의 표정을 마주한 카이는, 짓궃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 번 인사했다.
“소개가 늦었네요. 4대째 태양의 사제이자 헬릭의 대리인을 맡고 있는 사도. 카이라고 합니다.”
***
다행히 마차는 협곡의 입구에 세워져 있었기에, 돌아가는 길이 막막하지는 않았다.
마부 역할을 하던 성기사는 전투 중에 사망했기에 알버트 교황이 직접 마부석에 앉았다.
모라크와 버나드는 마차에 짐짝처럼 실어놓은 상태.
알버트 교황이 이끄는 마차는 그 성벽의 입구를 지나쳤다.
“소란스럽네요.”
“그렇지 않겠는가. 교황이 직접 마차를 몰고 있다는 것도 놀랍겠지만…….”
“멀쩡하게 살아 돌아올 줄은 몰랐겠지요.”
다시금 출발한 마차는 그대로 본단을 향했다.
연락을 받고 나온 입구에 나와 있던 고위 사제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교, 교황 성하. 어, 어찌된 일이십니까? 같이…… 같이 나간 자들은 모두 어쩌고…….”
“옆의 청년은 또 누구인지……?”
“피곤하니 나중에 얘기하세. 마차 안에 실려있는 두 사람은 재갈을 물린 채 신성 감옥에 수감해 놓게.”
알버트 교황은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카이를 데리고 본단 내부로 들어섰다.
그들에게 꽂히는 수십 쌍의 시선.
알버트 교황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 시선을 받아들였다.
‘역시 교황. 스스로를 우유부단하다 칭하지만, 이런 정치판에서 10년이 넘게 구른 인물다워.’
끝도 없이 쏟아지는 탐색과 경계의 시선 속에서 저렇게 멀쩡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카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대범함을 모방했다.
“카이. 우리는 곧장 예배실로 갈 걸세.”
“예? 하지만 예배실이라면 이미 지나친 것이…….”
카이가 뒤쪽의 예배실을 돌아보며 중얼거리자, 알버트 교황이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우리가 향하는 곳은 조금 더 특별한 예배실일세. 아마 자네는 그곳에서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겠지.”
“제가 원하던 것이라면…….”
카이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현재 그가 태양교 본단에서 원하는 것이라고는 한 가지 밖에 없었으니까.
‘반 쪽 짜리 직업의 완전한 각성.’
한 마디로 지금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은 이를 도와줄 수 있는 장소라는 소리.
‘드디어…….’
반쪽짜리 직업에도 큰 불만은 없었다.
태양의 사제는 선행 스탯의 존재만으로도 스킬의 상성이나 위력을 가볍게 씹어먹었으니까.
‘그래도 반 쪽 짜리라고하면 아무래도…….’
조금은 찜찜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 기분도 오늘로 끝이 날 터.
카이가 마음의 준비를 하며 걸어가고 있자니, 맞은편 복도에서 일련의 무리가 황급히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카이는 알버트 교황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용히 물었다.
“교황님. 저들은?”
“버나드와 몰디온을 지지하던 자들. 한마디로 나와 반대되는 자들이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가까이 다가온 고위 사제들은 입고 있는 옷의 형태부터가 달랐다.
‘누가 보면 사제가 아니라 국왕인 줄 알겠네.’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몸에 문신을 과도하게 그려 넣거나, 본인이 소유한 차에 덕지덕지 스티커를 붙이는 자들.
한, 두 개라면 누가 봐도 멋있지만, 십여 개가 넘어가면 그 때부턴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눈앞의 고위 사제들이 보이는 행태가 딱 그러했다.
하얀색 사제복 위에 걸쳐놓은 휘황찬란한 색상의 스카프나 천들부터, 번쩍번쩍 빛이 나는 보석들을 손과 목걸이에 주렁주렁 달고 있다.
“……교황 성하가 능력 부재라는 걸 믿지 않았는데, 저걸 보니 조금 수긍이 갈 것 같기도 하네요.”
“하하…… 자네에게는 면목이 없네.”
부끄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린 알버트 교황에게 다가온 고위 사제들이 입을 열었다.
“교황 성하.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이옵니까? 교단의 성기사들과 추기경분들께서는……?”
“후우. 피곤하니 나중에 얘기하지.”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추기경과 성기사들이 함께 돌아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저희는 지금 당장 들어야겠습니다.”
교황의 명령 따위는 귓등으로 안 듣는 모양.
카이의 앞에서 이런 대우를 받자, 알버트 교황도 부끄러움에 귀가 빨개질 정도였다.
“피곤하다고 이야기했네. 자세한 내용은 내일 아침, 고위 사제와 주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하겠네.”
“…….”
짐짓 화난 것 같은 교황의 음색에 고위 사제와 주교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결국 그들이 택한 것은 일보후퇴.
하지만 용무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편히 쉬시지요. 그런데…… 교황 성하의 침소는 이 방향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청년과 함께 신상을 방문할 생각이네.”
“이 상황에서도 헬릭을 찾으시는 성하의 믿음은 역시 존경스럽군요. 하지만 이 청년의 경우에는 신상을 쳐다볼 자격이 없을텐데요?”
“신상을 쳐다볼 자격이라…… 이 참에 묻지. 그 자격이란 건 대체 누가 정했나.”
“그야 수많은 주교 분들과 고위 사제들…….”
“그래. 딱 잘라 말하면 자네들이 정한 법칙이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암. 없어야지. 그게 정상 아닌가?”
태양의 사제라는 든든한 배경을 얻은 알버트 교황은 거침이 없었다.
처음보는 교황의 당당함에 주교와 고위 사제들은 당황을 금하지 못했다.
“교, 교황 성하.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말했네. 내일 아침 설명을 해주겠노라고. 그럼 이제 좀 비켜주겠나?”
세월이 담겨있는 중후한 목소리로 그들을 물린 교황은 카이를 이끌었다.
“교황님. 멋있으셨습니다.”
“자네가 없었다면 이렇게 큰 소리도 치지 못했을 걸세.”
“앞으로도 그렇게 당당하게 행동하십시오. 보기 좋습니다.”
“허허. 그렇게 말해주다니 고맙군.”
이윽고 두 사람은 본단 내부의 정원에 도착했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아름다운 꽃과 식물들이 만연해 있고, 그 중앙에 위엄 넘치는 태양신 헬릭의 신상이 세워져 있는 정원.
“본단 내부에 이런 정원이 있었군요. 몰랐습니다.”
“이 신상은 헬릭님의 계시를 받은 조각사가 만들었다고 칭해지고 있네. 덕분에 이 신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면 태양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전해지지.”
“역대 사도들도 모두 이곳에서 기도를 드렸겠군요.”
“맞네. 기록에 따르면 그분들의 믿음이 모두 깊었기에, 최소 한나절은 기도에 몰두하셨다고 전해지고 있지.”
“하루나…….”
물론 카이는 그렇게 오래 기도를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럼 자리를 비켜주겠네. 부디 자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하지.”
“예. 기도가 끝나면 찾아뵙겠습니다.”
정원이 문이 닫히고, 신상을 눈앞에 둔 카이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디보자…… 기도문이 뭐였더라?”
전직을 할 때 외웠던 기도문은 이미 까먹은 지 오래.
결국 커뮤니티를 뒤져 기도문을 외운 카이의 입에서 천천히 기도문이 흘러나왔다.
그러기를 잠시.
띠링!
[태양신 헬릭이 당신과 대화를 하고 싶어합니다.]
[천상의 정원을 방문하실 수 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대화라…… 아무래도 전직만 잽싸게 마쳐줄 생각은 없나 보네.”
예상치 못한 메시지였지만, 카이는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답을 마친 카이가 눈을 깜빡인 순간.
처음 태양의 사제로 전직할 때 방문했던 천상의 정원이 다시 한 번 그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