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힐통령 162화
61장 전직, 태양의 사제(3)
천공의 섬에 위치한 아늑한 섬.
천사들이 조각되어있는 분수대가 무지개를 뿜어내는 불가사의한 장소였다.
그리고 카이는 태양의 사제로 전직할 때 이곳을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천상의 정원. 진짜 오랜만이네.”
말 그대로 하늘 위의 정원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섬의 끝자락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짙은 구름이 깔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자…… 그래서 헬릭은?’
카이는 고개를 돌리며 그의 행방부터 찾았다.
자신과의 대화를 원했으니 당연히 모습을 드러낼 터.
새로운 스페셜 칭호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왔구나. 나의 어린 양이여.]
목소리는 멀리서 들렸다. 아주 멀리서.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중년 사내가 조각되어있는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로브를 입고 머리 위에는 태양 써클릿을 쓰고 있는 모습.
누가봐도 신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위엄이 넘치는 외견이었다.
카이는 신상을 보는 순간 생각했다.
‘저 신상…… 탐난다…….’
전직을 할 때 봤던 석상보다도 훨씬 고급스러워 보이는 신상!
그 때 석상의 등급이 레전더리였으니, 천상의 정원에 있는 저 신상이라면?
‘저것도 레전더리려나? 아니. 어쩌면 성물들과 마찬가지로 이터널 레전더리일 수도 있어.’
하지만 신상의 값어치가 탐나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갤러리에 전시된 명화를 보고 그 그림을 구매하고 싶은 마음과 흡사했다.
‘아니.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정신을 차린 카이가 신상을 향해 물었다,
“당신이 헬릭이십니까?”
[음. 본인이 바로 헬릭이니라.]
카이는 두 다리를 천천히 움직여 신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가까워질수록 머릿속에서는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그런데 직접 대화를 하자고 불러놓고…… 왜 본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 거지?’
신상 앞에는 탁자와 의자가 하나씩 놓여있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카이는 3미터 크기의 신상을 올려다봤다.
[그곳에 앉거라. 나의 어린 양이여.]
“예.”
얌전히 자리에 앉은 카이는 이어질 헬릭의 말을 기다렸다.
[내가 이곳에 그대를 부른 이유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저를 진정한 사도로 임명하기 위함이겠지요.”
[맞아…… 아니, 맞다. 현재 반쪽에 불과한 그대의 힘으로는 이 세상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
“제가 지닌 힘으로도 말입니까?”
[그게 무슨 건방진 소리…… 크흠. 물론이다. 그대는 지난 몇 달간 폭풍적인 성장을 이뤄냈지만, 왕국의 정예 기사 한 명과 좋은 승부를 펼칠 정도에 불과하지.]
“아…… 그렇군요.”
스스로를 제법 강하다고 믿고 있던 카이에게는 꽤나 통렬한 일침이었다.
[뮬딘 교도 현재는 완벽히 부활한 것이 아니다. 때문에 정예 병력을 꺼내들지 않고 있는 것이지. 이번에는 그들도 조심스러워. 정말이지…… 너무나 조심스럽다.]
“그건 저도 이번 사건을 통해 확실히 느꼈습니다.”
뮬딘 교는 아인종들뿐만 아니라 태양교의 본단까지 내부에서부터 무너트리려 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어쩌면 다른 왕국, 혹시 제국의 중추에도 손이 닿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대의 의견은 타당하다. 만약 그대가 진정 사도의 길을 걷겠다면, 뮬딘 교의 손이 닿아 있는 모든 세력을 정화해야겠지.]
“먼지 하나 남기지 않겠습니다.”
카이는 최선을 다하겠다, 모든 노력을 쏟아보겠다 같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의 자신감을 보여서 헬릭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해.’
어느 누가 시작하기도 전에 주눅이 든 사람을 채용하고 싶겠는가.
카이는 현재 면접을 보는 취업 준비생, 헬릭은 면접관이나 다름이 없었다.
지금은 면접관이 자신을 마음에 들게끔 확신을 줘야 할 때.
헬릭은 흡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포부는 마음에 드는구나. 앞으로 그대가 걸어가야 할 길은 외롭고 고독하며, 때때로 포기하고 싶어질 만큼 힘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의 역할을 짊어진 채 묵묵히 그 길을 걸어나갈 자신이 있는가?]
‘시험이다.’
듣는 즉시 헬릭의 의도를 깨달은 카이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입에서 유려한 문장이 흘러가는 바람처럼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이미 사제로 전직을 할 때 맹세했습니다. 악(惡)에 고통받는 이들을 구하고, 악(惡)을 행하는 자들을 벌하고, 당신의 가르침을 이 땅에 널리 퍼트려 악(惡)을 근절할 것이라고.”
[오, 훌륭해…… 아니, 몹시 훌륭하다.]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헬릭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동시에 굳게 닫혀있던 카이의 눈꺼풀이 살짝 올라갔다.
‘그런데…… 신이라는 존재가 생각보다 말투에 위엄이 없다? 개발자들은 대체 뭘 어떻게 설정해 놓은 거야?’
카이는 슬쩍 고개를 들어 헬릭의 신상을 쳐다보았다.
누가 봐도 남자다운, 태양과 자비를 관장하는 신 중의 신 헬릭.
그런 이의 말투가 때때로 방정맞게 들릴 정도이니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음? 표정을 보니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말해 보거라.]
헬릭의 나긋나긋한 말투에 카이가 머뭇거리자 그는 다시 한 번 재촉했다.
[괜찮다. 말해 보거라.]
“……아니, 역시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해보라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난 신경쓰지 말고 말해보라고.]
‘왜, 왜 이렇게 끈질겨?’
의외의 부분에서 굉장히 고집스러운 헬릭!
카이는 진땀을 흘리며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 말 못 해. 이걸 어떻게 말해?’
여성스럽다는 말을 꺼내면, 헬릭은 카이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신을 능멸했다는 죄목으로 직업이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한 번 먹잇감을 포착한 헬릭의 집념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어서 숨기고 있는 것을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신성력을 모두 회수하겠다.]
“예?! 그런 게 어딨습니까?”
[여기 있다. 어차피 그 신성력도 내가 나눠준 것 아니냐.]
“와…… 진짜 치사하다.”
카이가 울컥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헬릭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어서 말해 보거라. 난 궁금하면 아무런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성격이야. 대륙에 큰 우환이라도 닥치면 그것을 네가 책임질 테냐?]
“어차피 평소에도 일 안 하셨잖아요? 교단이 그렇게 될 때까지 지켜만 보셨으면서.”
[뭐, 뭐라고…… 아니. 그 얘기가 왜 여기서 나와?]
“그럼 제가 뭘 숨기고 있다는 이야기는 왜 나오는데요?”
[이이……!]
헬릭이 노한 음성을 뱉어내자, 카이는 그때서야 아차했다.
‘너, 너무 나갔나?’
생각해보니 지금 자신이 상대하는 이는 면접관 따위가 아니었다.
기업의 회장이나 될 정도의 엄청난 존재!
빠르게 사태를 파악한 카이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그게 아니고…….”
[됐어! 아니, 됐다. 안 듣고 말겠다!]
헬릭이 누가 들어도 토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어서 찾아오는 정적.
이에 당황한 카이는 은근슬쩍 화해를 시도했다.
“헤, 헬릭 님. 기분이 많이 나쁘셨습니까?”
[별로. 다만 그대를 사도로 임명해야 할지는 고민이 되는구나. 나에게까지 비밀을 만드는 이를 사도로 만들어도 될지…… 으음. 심하게 고민이 돼.]
‘……아니, 신이라는 작자가 이렇게 치사할 수가!’
카이는 이 부조리함에 맞서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를 내지는 못했다.
대신 그의 혀는 한층 더 부드럽고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제가 딱히 비밀이 있는게 아니구요. 그냥 헬릭 님의 위엄 넘치는 모습에 잠깐 기가 죽었던 겁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을 고하거라.]
“정말입니다. 사실 지상에 있는 신상들은 이토록 늠름하고 위엄 넘치는 헬릭 님의 모습을 반의반도 표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이더냐. 그래도 당시 대륙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는 조각사를 섭외했다만.]
“에이, 인간의 솜씨로는 헬릭 님의 존재감을 표현할 수가 없죠. 이 조각상은 스스로 만드신 겁니까?”
[맞다. 심심할 때 만들었다.]
“역시 헬릭 님이십니다. 제가 천상의 정원에 와서 무얼 보고 가장 놀랐는지 아십니까?”
[……혹시 나의 신상?]
헬릭이 살짝 기대하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에 씨익 미소를 지은 카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천상의 정원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장소이지요. 이런 곳에서 평생 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축복이 아닐까요?”
[흐, 흠.]
본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법!
카이는 그 리스트에 신도 포함된다는 걸 오늘 처음으로 깨달았다.
살짝 누그러진 목소리로 헛기침을 삼킨 헬릭이 퉁명스럽게 얘기했다.
[되었다. 그 얘기는 이쯤하지. 사제 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거라.]
“예.”
굽혀져 있던 카이의 무릎이 천천히 펴졌다.
이윽고 꼿꼿하게 세워진 그의 전신을 거대한 빛줄기가 강타했다.
뒤이어 헬릭의 위엄 넘치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기억하라. 그대는 태양신의 뜻을 지상에 전파할 신의 대리자이자, 모든 악인들이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며, 모든 약자들이 기댈 수 있는 기둥이 될지어다.]
“명심하겠습니다.”
거대한 빛의 세례가 끝났을 때.
헬릭은 짤막하게 말을 마쳤다.
[오늘부로, 그대는 일찍이 세 명만이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영광을 거머쥐게 되었다.]
떠오르는 알림 창.
띠링!
[태양신 헬릭의 인정을 받으셨습니다.]
[태양의 사제(신화)의 모든 능력치가 해방됩니다.]
[지금부터 태양교의 신전을 방문해 직업 전용 스킬을 배우실 수 있습니다.]
[스페셜 칭호, ‘신화급 플레이어’를 획득하셨습니다.]
[스페셜 칭호, ‘제4의 사도’를 획득하셨습니다.]
[어둠을 걷어내는 자Ⅱ 퀘스트를 획득하셨습니다.]
“……후우.”
길었다.
정말이지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세 달…… 정도인가.’
22년하고도 10개월.
274개월이라는 세월 중에 고작 3개월의 시간.
하지만 카이에게 있어선 최근의 3년보다 더 값진 시간이었다.
‘하, 진짜 게임이 뭐라고.’
대체 이게 뭐기에 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걸까.
성취감, 혹은 달성감이라 불릴만한 기분을 느낀 카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아주 좋습니다. 날아갈 것처럼요.”
비단 말뿐만이 아니었다.
반쪽짜리였던 직업이 완벽한 하나의 상을 만들어내고, 어떠한 능력들이 생겼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카이는 현재 자신의 감각이 창끝처럼 뾰족하고, 날카롭게 바뀐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야.’
물론 기분만 그럴지, 실제로도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현재 카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
“헬릭 님. 이제 그만 나오시지요.”
[가, 갑자기 무슨 소리냐.]
카이의 뜬금없는 요청에 헬릭이 당황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이에 카이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좋네요. 사도라는 거. 마치 머릿속에 레이더라도 달린 기분이에요. 아! 레인저들의 패시브 스킬인 적군 감지를 배우면 이런 기분이 든다고 본 것 같기도 하네요.”
카이의 두 눈은 눈앞의 거대한 신상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본능이 소리쳤다.
그 뒤에는 이 신상보다 훨씬 대단한 존재가 있다고.
‘분명 헬릭이겠지.’
물론 태양신께서는 쉽게 수긍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내가 할 말은 끝났으니 어서 지상으로 돌아가거라.]
“그럼 떠나기 전에 신상을 돌면서 기도를 올리는 건 괜찮지요?”
[아, 안 돼! 기도는 지상에 내려가서 해도 괜찮으니라!]
“저도 안 돼요. 제가 독실한 신자라서 지금 기도를 드리고 싶거든요.”
헬릭의 다급한 음성은 거침없는 카이의 두 다리를 막을 수 없었다.
‘신을 만났을 때 얻게 되는 스페셜 칭호를 놓칠 수는 없지.’
순식간에 신상의 발목 부분을 잡은 카이는 고개를 쏙 내밀어 그 뒤편을 쳐다보았다.
“헬릭 님. 대체 왜 여기에 숨어계시는…… 아?”
카이의 입가에서 머물러있던 미소가 사라지고,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그가 상상하던 위엄 넘치고 근엄한 중년 사내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다만…….
“흐으윽…… 내가…… 지상으로…… 가라고…… 했잖느냐아…….”
이를 대신하여,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는 어린 소녀가 쭈그려 앉아 있었다.
동시에 카이를 기쁘게 만드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스페셜 칭호, ‘태양 목격자’를 획득하셨습니다.]
침을 꿀꺽 삼킨 카이는 눈앞의 메시지와 울음을 꾹 참고 있는 헬릭을 번갈아보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시, 신난다아.”
“흐윽…… 흐아아아앙!”
“아, 망했다.”
아쉽게도, 태양신을 울린 자라는 칭호는 없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