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167화 (167/441)

# 167

힐통령 167화

62장 Ready to kill(3)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미드 온라인에 접속을 하는 유저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화면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뭐야, 왜 갑자기 검은 화면이 떠?’

‘렉…… 이 걸릴 리는 없는데?’

플레이어들은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마치 암막 커튼을 사방에 둘러놓은 것처럼 한 점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흑색의 화면.

그 적막감 속에서, 아주 희미한 소리가 귓가를 울리기 시작했다.

둥…… 두둥…… 둥…… 두둥.

북이나 장구를 일정하게 두드리는 것 같은 반복적인 리듬.

그러기를 잠시,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 정도의 묵직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부우우우우웅-!!

그것은 바로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의 소리.

이어서 커튼이 젖히듯, 어두운 화면이 순식간에 한 쪽으로 흘러내리며 사라졌다.

그 뒤에서 등장한 것은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

“죽여라!”

“더러운 몬스터 놈들이 국경선을 넘지 못하게 막아!”

“키에에에엑!”

수 만 명의 병사들이 검과 창을 휘두르고, 마법사들의 주문이 전장을 폭격했다.

그들이 상대하는 것은 다름 아닌 몬스터들의 군대!

휘이이이익!

카메라 시점이 빠르게 튀어나가며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의 사이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전장.

영상의 마지막은 인간과 몬스터의 우두머리가 서로를 향해 무기를 내지르며 끝을 맺었다.

다시 암전된 화면 위로 양각이라도 되듯, 천천히 문장이 각인되었다.

[Extra Ep.1 - 침공이 시작되었습니다.]

***

[페가수스. 12월 맞이 대규모 업데이트 깜짝 공개!]

[미드 온라인 1주년 기념 이벤트! 다가오는 15일, 내일부터 시작.]

[엑스트라 에피소드 침공. 과연 그 내용은?]

[페가수스, 침공 이벤트 영상 공개로 다시 한 번 주가 폭등.]

페가수스는 유저와 원활한 소통을 나누지 않는 기업이다.

오죽하면 불통의 아이콘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을 정도!

하지만 본인들이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스위터나 페이스노트를 통해 할 말은 꼭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1주년 이벤트인 침공이 공개되었습니다. 재미있게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정중하지만 짧은 포스트.

하지만 이 짤막한 문장에 유저들은 뜨거운 반응으로 화답했다.

-계정 해킹 당하신거 아니죠?

-역시 페갓수스…… 연말에 이런 선물이라니. 산타 없다고 한 놈 누구야?

-아니, 그런데 갑자기 이벤트라니? 좀 뜬금없네.

-쓰읍…… 연말에 가족들이랑 일본 온천 여행가기로 했는데…… 취소하고 게임합니다.

└이벤트 대비 식량 좀 구비해 놔야 할 듯.

-게임 접속했을 때 뜨는 인트로 영상 완전 대박이던데. 대체 이벤트 내용 뭘까요?

└아무래도 요즘 사냥터 문제가 불거지니까…… 몬스터 무한으로 사냥하게 해주는 거 아닐까요?

평소 사냥에 관심없던 플레이어들조차 영상에 매료될 정도로 반응은 뜨거웠다.

그 뜨거움은 카이의 심장을 데우기에도 적절한 온도였다.

“페가수스 쪽에서 아주 작정하고 만든 모양인데.”

하긴, 자신에게 이 정보에 대한 소스를 흘린 게 벌써 몇 달 전이다.

그때 개발이 완료되었고 날짜만 조정 중이라고 했으니, 준비는 완벽할 터.

“그럼 나도 슬슬 움직여야겠어.”

리버티아는 자신이 손을 대지 않아도 폭발적으로 성장을 하고 있다.

이미 엘프와 인어들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도시라고 커뮤니티에 입소문이 퍼진 상태!

각 방송국의 PD들도 서둘러 프로그램을 편성하여 리버티아를 방문할 예정이라 공표했다.

물론 연예인이나 랭커들, 뮤튜브 스타들 중에서도 방문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흐음. 그들의 지갑 속에 있는 돈은 다 내 꺼라는 소리구나.’

그 사실은 카이가 빠른 결단을 내릴 수 있게 만들어줬다.

“그럼 내가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지.”

자신이 리버티아의 영주라는 사실이 밝혀져서 좋을 건 없으니까.

카이는 연락처 화면을 활성화 시켜 목록을 스윽 훑었다.

“연락처가 있었는데…… 아, 여기 있네.”

[미네르바]

자신이 찾던 이름을 발견한 카이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

엘프의 숲.

이제는 엘프들이 거주하지 않지만, 여전히 엘프의 숲이라 불리는 기묘한 장소.

카이는 그곳으로 미네르바를 불러냈다.

저벅저벅.

“오셨군요.”

뒤쪽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몸을 돌린 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야로, 태양교 문양이 그려진 사제복을 장비한 유저들이 들어왔다.

‘뭐, 그보다 갑옷을 입고 있는 성기사가 더 많지만.’

카이의 입가에 떠오른 은은한 미소를 마주한 미네르바는 침착하게 자신의 길드원들을 제지한 뒤, 천천히 카이에게 걸어왔다.

“……왜 부른 거죠?”

“정말 모르셔서 물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카이가 인상을 찡그리며 실망한 티를 내자, 미네르바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본단에서, 무려 교황명으로 명령이 떨어졌어요. 저에게 광휘의 성기사인 당신을 성심성의껏 보좌하라고 하던데…… 그쪽 짓인가요?”

“예, 뭐.”

“저 건방진 자식이!”

“감히 미네르바 님을 뭘로 보고……!”

시원하게 인정을 하자 프레이 길드원들이 분노를 표출했다.

‘그래. 저런 반응도 충분히 이해는 가지.’

그들의 눈에는 카이라는 존재가 악당 중의 악당으로 보여도 무리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미네르바가 히든 클래스인 성녀라는 점을 이용하여 세계 10대 길드인 프레이를 이용할 생각이었으니까.

‘내 제안을 거부하면, 프레이 길드는 골치 아픈 상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어.’

교황의 명을 거부한다는 건 곧 태양교를 적으로 삼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프레이 길드는 애초에 태양교를 기반으로 삼으며 성장한 곳.

그곳의 NPC들과 우호도가 대폭으로 깎이면 10대 길드의 자리조차 위태로워진다.

한마디로…….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소리지.’

그 예상은 적중했다.

“……원하는 게 뭐죠?”

“똑똑한 분이니 상황은 파악하셨을 거라 믿습니다.”

“그래서요? 저희가 일구어놓은 이 길드를 홀라당 당신에게 바치라는 소리인가요?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부끄럽냐고요? 아니. 전혀요?”

카이가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리자, 미네르바가 고운 입술을 깨물었다.

“광휘의 성기사. 저희도 나름대로 조사를 해봤어요. 교단 내에서도 극비 정보로 분류되어 제 권한으로도 열람이 안 되더군요. 대단한 직업이라는 건 알겠어요. 함께 태양교에 소속된 플레이어로서 축하를 드릴 일이구요. 하지만 그 위치를 이용해 저희 길드를 삼키려고 하시면 이야기는 달라지지요.”

“후우.”

가볍게 한숨을 내쉬운 카이는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래. 여기서 내가 챙겨줘야 할 건 하나.’

어차피 그녀는 교황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다.

하지만 곧이 곧대로 자신에게 끌려 다니면 길드 마스터로서의 체면이 용납하지 못할 뿐.

그러니 자신이 여기서 챙겨줘야 하는 건, 그녀의 자존심이었다.

“……아까부터 대화의 핀트가 안 맞는다 생각했는데, 아주 큰 오해를 하고 계시네요.”

검지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이목을 집중시킨 카이가 말을 이어받았다.

“제 위치를 이용하여 교황님께 부탁을 드린 건 인정합니다. 덕분에 미네르바 님은 저를 도와주셔야하는 상황이 되셨지요.”

“고분고분 따를 거라 생각하나요?”

카이는 미네르바의 블러핑에 우스운 마음밖에 들지 않았지만, 애써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요. 미네르바 님이 어떻게 세계 10대 길드를 일구어냈는지 잘 압니다. 교황님께서 어떤 식으로 의견을 전달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프레이 길드 여러분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을 뿐입니다.”

“……그게 전부인가요?”

미네르바가 여전히 풀리지 않는 경계심을 표출하며 카이를 훑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뿐.

“물론이지요. 아무래도 태양교 내부에서 제 직급이 높기에 교황님께서 오해를 하시고 보좌하라는 식으로 얘기한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제안드리지요. 이번 침공 이벤트. 저와 함께 손을 잡아보시지 않겠습니까?”

수직 관계가 아닌 수평 관계라는 것을 인지시켜준 뒤, 그녀에게 순순히 선택권을 내어준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미네르바에게는 ‘명분’이 생겼다.

‘길드원들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야. 그리고…….’

‘어떤 대답을 할지는 그녀에게 달려있지. 한마디로.’

그녀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카이의 속마음 정도는 당연히 꿰뚫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거절을 하면 그때도 이렇게 신사적이지는 않을 거야. 교황에게 달려가겠지.’

‘미네르바가 여기서 거절을 하면 그때는 강압적인 방법을 쓰면 그만이야.’

중요한건 겉으로만 보면, 카이가 제안을 하고 미네르바에게 선택권이 주어진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계 10대 길드 마스터이자, 성녀 클래스로 유명한 그녀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

“음…….”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던 미네르바는 카이를 빤히 쳐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답에 앞서 한 가지 묻겠어요. 언노운…… 아니, 카이 당신이라면 굳이 길드와 손을 잡지 않아도 혼자서 이벤트 진행이 가능할 텐데요? 게다가 당신은 천화와도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물론 혼자서도 이벤트를 할 수 있고, 이번에도 천화와 손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 태생적으로 떠돌이. 한 곳과 계속해서 손을 잡으면 이미지가 굳혀져요.”

“아.”

카이의 말 한 마디에 미네르바는 납득을 끝냈다.

그건 대화 내용을 듣고 있던 프레이 길드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회만 찾아오면 상대가 누가 되었든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

‘일종의 자유 용병처럼 활동을 하겠다는 소리인가?’

‘흥. 한 마디로 박쥐 짓을 하겠다는 거군. 여기 붙었다가, 저기 붙었다가.’

‘우리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야. 언노운, 카이라는 이름은 아직까지 미드 온라인에서 가장 뜨거우니 그와의 콜라보라면 이번 이벤트에서 상당한 이득을 취할 수 있겠지.’

빠져나갈 구멍은 없지만 이해관계는 제법 일치하는 편이다.

‘무서운 사람. 단순히 싸움만 잘하는 것이 아니야.’

미네르바는 자신의 길드원들이 보지 못하게끔 표정을 살짝 찡그리면서 오른손을 뻗었다.

“이번 이벤트, 한 번 멋있게 먹어봐요.”

“예. 앞으로도 종종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프레이 길드.

세계 10대 길드 중 한 곳에 무사히 목줄을 채운 카이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