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힐통령 171화
63장 영웅 출현(3)
“부모님 허락 받았을 때만 먹고, 이빨 상하지 않게 먹고 나면 꼭 양치질 해야된다?”
“네에에~”
카이는 자신의 신신당부에 예의 바르게 대답하는 아야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글렌데일의 중급 게이트와 하급 게이트를 순식간에 격파하고, 화이트홀을 방문한 지 네 시간.
눈 깜짝 할 사이라고 말해도 좋을만큼 빠르게 게이트를 철거한 카이는 스마일 진료소를 방문했다.
그것도 아야나가 좋아하는 먹거리를 잔뜩 사 들고서.
“이제 또 가시는 거예요?”
“그래야지.”
“히잉.”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아야나와 눈높이를 맞춘 카이가 그녀를 달랬다.
“이 시간에도 다른 전장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두 알아요. 가셔야 한다는 거…… 그냥…….”
투정을 조금 부리고 싶었을 뿐.
“일 끝나면 다시 올게.”
“네! 그 때는 또 새로운 약들을 보여드릴게요!”
“기대해야겠는데?”
아야나와 그녀의 부모님이 만든 각종 영약들을 후한 값에 구매한 카이는 인사를 마치고,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거리를 나섰다.
‘상급 게이트. 확실히 하급, 중급 게이트보다는 훨씬 위협적이야.’
하지만 카이는 몬스터들을 무시한 채 게이트를 철거하는 작업에만 집중했다.
‘듣자하니 게이트에서 보스 몬스터들도 나온다던데.’
다행스럽게도 화이트홀의 상급 게이트에서는 여태 보스 몬스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손쉽게 철거할 수가 있었다.
‘이제 바덴 성으로 가야 하는데…….’
거리를 걷던 카이의 시선을 스윽,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주변을 한 바퀴 훑었다.
‘쟤네는 대체 뭐지?’
때때로 자신을 힐긋힐긋 쳐다보는 몇 명의 유저들.
이건 카이가 연예인병 같은 것에 걸려 과대망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었다.
‘글렌데일에 있을 때부터 붙은 놈들이지?’
그곳에서부터 사도의 예민한 감각은 한 줌의 이상함을 낚아챘다.
바로 자신을 주시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 때부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 카이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죄다 검은 머리라…….’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옛 중국의 사상가인 공자가 효경에 실었던 문장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그 말을 따르냐고 묻겠지만…….
‘응, 미드 온라인에는 있지. 염색을 절대 하지 않는 녀석들이 말이야.’
바로 중국인이다.
물론 모든 중국인이 염색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단일 단체. 검은 머리가 특징인 세력은 한 곳뿐이지.’
세계 10대 길드의 일좌이자, 인도의 시바 길드와 더불어 길드원 수가 가장 많은 길드.
흑룡이다.
‘거기 가입 조건에 분명…… 검은 머리에 중국인 한정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조항이 있었지?’
이미 미드 온라인에서는 파다하게 퍼진 사실이었다.
‘그럼 중요한건 저들이 지금 나를 왜 감시하냐는 건데…….’
카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걸리는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
‘흑룡 길드와는 딱히 마찰을 빚은 적이 없어.’
박수도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아무리 여기저기 시비를 걸고 다니고, 밉보였던 카이라지만 옷깃조차 스친 적 없는 상대에게 미운 털이 박힐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흑룡의 쟈오 린은 명성 좀 날려보겠다고 날 치는 멍청이도 아니야.’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간단했다.
지극히 계산적이라 손익에 민감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신을 비롯해, 길드에 피해가 갈만한 일이라면 그는 절대 하지 않는다.
‘쟈오 린 같은 경우는 돌다리를 확인해보는 정도가 아니라 들었어.’
아예 돌다리를 무너트린 뒤, 인력과 자금으로 그 옆에 자신만의 새로운 다리를 짓는 인물.
쟈오 린은 그런 인물로 평가되고 있었다.
‘한 마디로 흑룡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았다는 소리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무엇인지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카이는 한 가지만은 확신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불안 요소를 떠안고 바덴 성으로 갈 수는 없어.’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미끼를 좀 던져볼까?’
카이는 자신의 등으로 꽂히는 몇 쌍의 시선을 느끼며, 화이트홀을 떠났다.
동시에 그를 쳐다보던 흑룡 길드원들이 보이스톡 프로그램을 통해 보고를 올렸다.
“목표물이 화이트홀의 동문으로 나갔습니다.”
“추적을 개시하겠습니다.”
우르르르.
거리의 골목골목에 숨어있던 흑룡의 길드원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
“이 정도면 한적하지.”
비틀와일드의 숲.
190레벨 정도의 초거대 곤충 몬스터가 나오는 곳으로, 당연하지만 인기는 꽝인 장소다.
때문에 카이는 일부러 이 장소를 골랐다.
‘비싼 재료를 뱉지도 않고, 한 마리를 사냥할 때마다 녹색 진액을 뒤집어써야 하며, 귀찮은 패턴을 지닌 벌레들을 찾아오는 변태는 많이 없겠지.’
이곳에서 흑룡의 꿍꿍이를 파헤치기만 해도 카이에게는 큰 이득이었다.
‘어차피 나에게는 신출귀몰 스킬이 있어. 귀환 스킬인지라 캐스팅 시간이 조금 길기는 하지만, 내 몸 하나를 뺄 정도는 되니까.’
카이의 자신감은 자신이 여태까지 쌓아올린 경험과 직업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여태까지의 난 비틀와일드처럼 애벌레나 다름없었지만…….’
지금의 그는 화려하고 큰 날개를 가진 나비였다.
다가오는 모든 천적을 잠재울 수 있는 강력한 독을 지닌 나비.
“그러니까 이제 연기는 그만하고 나와.”
정적이 흐르는 숲의 공터.
족히 백 명은 들어갈 듯한 그 장소의 중앙에서, 카이가 흙을 꾹꾹 짓밟으며 말을 꺼냈다.
“…….”
잠시 이어지는 침묵.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이의 귓가로 잡음이 잡히기 시작했다.
부스럭, 우지끈.
한겨울의 마른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밟아 부러트리는 소리.
‘하나, 둘, 셋, 넷…… 잠깐만. 대체 몇 명이나 온 거야?’
카이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응?”
유저들의 얼굴, 그리고 그들이 가슴팍에 달고 있는 엠블렘을 확인한 카이가 인상을 찡그렸다.
“흑룡이 아니잖아?”
그들이 달고 있는건 알통이 큼직하게 솟은 남성의 팔뚝을 형상화한 엠블렘이었다.
당연하지만 검은 용이 비상하는 엠블렘을 쓰는 흑룡의 표식은 절대 아니었다.
물론, 흑룡 길드의 엠블렘이 아니라고 유명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타이탄.”
나즈막히 중얼거린 단어가 바람에 흩어지기도 전에, 다시 한 번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우두두두.
마치 숲 자체를 포위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다가오는 거대한 인간들의 벽.
그들은 흑룡이 맞았다.
“이건…… 흠.”
가볍게 콧바람을 내쉰 카이가 삐딱한 표정으로 타이탄과 흑룡 길드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어떻게봐도 한 번 해보자는 뜻 같은데.”
“맞다.”
타이탄 길드원들을 제치며 앞으로 나온 골리앗이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카이는 황당함을 넘어, 순수한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렇게 뜬금없이?”
“예로부터 전쟁의 승률을 높이는 방법은 선수를 치는 것이었다. 그럼 사전에 초대장이라도 보낼 줄 알았나?”
“세계 10대 길드라는 녀석들이 음침하게 움직이기는.”
“흥, 꼬리가 붙었다는걸 알면서도 인적이 드문 곳으로 온 네 놈의 자만심을 탓해라.”
코웃음을 치며 카이의 의견을 무시한 골리앗이 제 주먹의 뼈를 가볍게 눌렀다.
우두둑, 우두둑. 징그러운 소리를 내던 그의 입가로 미소가 찾아들었다.
“아아. 참고로 흑룡 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을 예정이거든.”
“벽 역할을 하는 건가?”
“잘 아는군.”
“하나 물어나보지. 나랑 사이가 틀어져서 타이탄에 득이 될 게 없는데, 왜 이렇게까지 무리수를 두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
“무리수? 하, 여전이 자신이 뭐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군.”
골리앗이 인상을 찡그리며 으르렁거렸다.
“흑룡의 방대한 정보망을 통해 모두 파악했다. 이 주변에는 네 놈을 도와줄 엘프도, 인어들도, 심지어 태양교의 NPC들도 없지.”
“그래서?”
“네 놈에게 강대한 세력이 없다면 넌 결국 랭킹 1위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일개 유저에 불과하다. 그토록 강력한 무위를 자랑하던 유하린조차 감히 세계 10대 길드를 건드리지는 않았지.”
“그런데 내가 건드려서 자존심이 상하셨다?”
“계속 그렇게 긁어봐야 네 놈에게 득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어서 비릿한 미소를 지은 골리앗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길드를 관리하는 입장이다. 사적인 감정을 잠시 배제하고 이야기하자면…… 네 놈이 검은 벌의 몰락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점과 비르 평야에서 보여줬던 전투 센스는 개인적으로는 높게 평가하고 있다.”
“고마워해야 하나?”
“물론이지. 난 벼랑 끝에 몰린 네 놈에게 마지막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거니까.”
골리앗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표정 중 최대한 인자하고 자비로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무서운 표정이었을 뿐이지만.
“타이탄에 들어와라. 그렇다면 네놈은 세력을 무서워하기는커녕, 타이탄의 관리 하에 최고의 커리어를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지.”
“……뭐야.”
카이는 징그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큰 남자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미는 장면은 꿈에 나올까 봐 무서울 정도!
“잠시만요. 이야기의 내용이 다르지 않습니까?”
흑룡 길드에서 한 명의 인물이 나와 골리앗을 막아섰다.
쟈오 린은 이 자리에 없었기에, 그를 대신하여 길드원들의 통솔을 맡은 흑룡 길드의 제 3단주, 쿤 팽이었다.
“단주 따위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꺼져.”
골리앗이 으르렁거리자 울컥했던 쿤 팽은, 괜한 말썽을 피우지 말라는 마스터의 명령을 상기하고는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방해꾼까지 사라지자 골리앗은 더욱 당당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자, 선택해라. 우리를 등에 업고 화려한 날갯짓을 해볼 것인지, 아니면 미약하게 달려 있는 조그마한 날개마저 찢긴 채 몰락할 것인지.”
“…….”
잠자코 골리앗의 말을 모두 들어준 카이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나는 정말 모르겠단 말이야. 이해가 안 가.”
그는 정말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쪽까지 정보가 전달 안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을 기해서 내 손에 해체된 길드만 무려 세 개야.”
붉은 주먹, 붉은 노을, 그리고 검은 벌.
“개중에 한 곳은 네 놈들과 같이 세계 10대 길드라고 추앙받던 이들도 있었지.”
“우리와 놈들을 똑같이 보지 마라. 그리고 그때는 네놈이 게릴라전을 펼쳐서 전력이 분산되었던 것뿐. 우리는 그런 미련한 짓을 하지 않는다.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 하는 법이거든.”
검은 벌의 실패를 토대로 언노운, 카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뼛 속 깊이 새겨넣은 골리앗.
그는 카이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시, 망설이지 않고 그를 척살할 마음을 굳게 품었다.
‘카이 녀석의 척살을 시작하면 침공 이벤트에서 볼 수 있는 이득이 크게 줄어들겠지만…….’
눈엣가시 같은 강력한 경쟁자 한 명을 제거하는 일이니 손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자, 어떻게 할 테지?”
이미 답은 나와 있다고.
골리앗은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했다.
오죽하면 그 상황을 지켜보던 흑룡의 쿤 팽조차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쟈오 린을 호출했을 정도.
‘카이가 타이탄에 소속되면…… 골치 아파진다.’
세계 10대 길드 중 어느 곳이라도, 태양교와 인어, 엘프의 세력을 배후에 두면 부러울 것이 없어진다.
모두가 각자의 계산을 이어가며 침묵을 지키던 도중.
카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거절. 타이탄에는 들어가지 않아.”
“……죽음을 자초하겠다는 건가?”
카이의 고개가 다시 한 번 저어졌다.
“그것도 거절. 죽음이랑은 영 친하지가 않아서.”
“멍청한…… 10분이 지나지 않아 네놈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 말 똑같이 돌려줄게.”
찰칵.
타이머를 10분에 맞춘 카이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을 둘러싼 타이탄 길드원들을 쳐다봤다.
‘150명…… 정예 중의 정예만 골라서 뽑아왔어.’
게다가 단단한 흑룡의 벽은 자신의 도망을 허용치 않았다.
한 마디로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
‘찬 물, 더운 물 가릴 처지가 아니야.’
이건 전쟁이다.
이기는 쪽이 모든 것을 가져가고, 지는 쪽이 모든 것을 빼앗기는 전쟁.
카이는 목숨이 달린 전쟁에서 패를 아껴둘 만큼 미련한 작자가 아니었다.
반짝!
들어올려진 카이의 왼손에는 총 두 개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카이는 주저없이 입을 열었다.
“나이트 오브 나이트메어.”
시동어를 외치자 반지 중 하나가 영롱한 보랏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카이의 주변에서 50여 마리의 스켈레톤 나이트들이 덜그럭거리며 등장했다.
이에 골리앗이 인상을 찡그리며 그들을 살폈다.
‘이건 예전 영상에 등장하던 놀 스켈레톤……? 아니. 아니다.’
놀 스켈레톤보다 신장은 두 배 정도 크고, 검과 방패를 든 채, 갑옷까지 입고 있는 놈들이다.
“……스켈레톤 나이트로군.”
머리 위로 떠오른 놈들의 레벨은 무려 298!
시전자인 카이의 레벨에 영향을 받은 탓이었다.
“……뭘 믿고 그렇게 당당하나 했더니, 숨겨놓은 패가 하나 정도는 있었나 보군.”
골리앗은 자신이 살짝 놀란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아.’
스켈레톤 나이트는 아주 정직한 병과다.
검과 방패를 쓰는 전형적인 기사들.
공격 패턴도 단순하기 때문에 골리앗은 놈들의 레벨이 320이라 할지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단순히 사냥을 한다고 생각하고, 쓸어버려라.”
골리앗이 자신의 부하들을 향해 살짝 턱짓을 하자, 150명의 타이탄 길드원들이 각자의 스킬을 시전했다.
덜그럭, 덜그럭.
주군인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채 명령만을 기다리는 스켈레톤 나이트들.
그들의 텅 빈 눈동자를 바라보던 카이가 다시 한 번 왼손을 들어올렸다.
“미안한데, 숨겨놓은 패가 하나라는 말은 안 했어.”
동시에 카이의 중지 손가락에 끼어져 있던 반지가 밝은 빛을 뿜어냈다.
“스킬, 서임 발동.”
중천에 떠오른 해조차 미쳐 흩어내지 못하는 으슥한 어둠이 전장을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