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175화 (175/441)

# 175

힐통령 175화

64장 두 개의 게이트(2)

하급 게이트와 중급 게이트를 파괴하는건 적당히 레벨이 맞는 유저들이 모이면 가능하다.

하지만 상급 게이트는 달랐다.

애초에 침공 이벤트 자체가 저레벨 유저들보다는 고레벨 랭커들을 위한 이벤트.

페가수스 사는 그들이 보상을 손쉽게 가져가도록 만들어놓지 않았다.

“젠장…….”

“저 몬스터들을 어떻게 다 죽여?”

“저 정도 숫자라면 세계 10대 길드 중 한 곳은 더 와야 해볼 만한 수준이야.”

바덴 성의 성채에 서있던 유저들은 단체로 낮은 신음을 뱉어냈다.

프레이 길드가 전투에 합류할 때만해도 기세는 최고였다.

하지만 두 마리의 보스 몬스터가 전장에 출몰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트롤 히어로와 트리플 헤드 오우거.

이벤트가 아닌 다음에야 쉽게 찾아볼 수도 없는 수준의 몬스터들이다.

그들에게 로그아웃 당한 유저들의 숫자가 두 자리가 넘은 순간, 그들은 성 내부로 후퇴해야만 했다.

“바덴 성이 밀리면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거지?”

“글쎄. 다른 건 몰라도 바덴 백작은 라시온 왕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 중 하나야.”

“끄응, 골치 아파지겠구만.”

“퀘스트 동선도 다 꼬일 테고, 완료가 불가능해지는 퀘스트가 속출하겠지.”

“페가수스 놈들, 장사할 생각이 없는 건가? 왜 이런 곳에 상급 게이트를 두 개나 설치해 놓은 건지…….”

참담한 현실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유저들은 소리를 질러대는 몬스터들을 보며 치를 떨었다.

‘보스 몬스터의 등장 하나만으로 놈들의 기세가 바뀌었다.’

‘저게 상급 게이트에서 나온 보스 몬스터의 존재감인가…….’

‘그나마 다행인 건 보스 몬스터 이후로 게이트에서 더 이상 몬스터가 나오지 않는다는 건데…….’

‘쯧, 그래도 성이 함락 당하는 건 시간문제겠어.’

몬스터들 주제에 머리를 쓸 줄 안다.

바덴 성의 단단한 성채를 쉽게 뚫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놈들은 숲과 산에서 커다란 바위나 나무뿌리 등을 가져왔다.

“저걸로 성문을 뚫을 생각이야.”

“젠장, 트롤이랑 오우거 따위가 저렇게 똑똑해도 돼?”

“……우리가 죽으면 NPC들은 모두 어떻게 되는 걸까.”

한 유저의 뜬금없는 질문에 불만을 토로하던 이들이 합죽이처럼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되기는…….’

‘전부 죽겠지.’

누구나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쉽게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아무리 프로그램이라는 걸 알고 있다지만,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며 기도를 올리는 그들의 모습은 어딜 봐도 인간처럼 보였으니까.

“끄응. 커뮤니티에 지원 요청을 올리긴 했거든?”

“소용 없어. 보스 몬스터가 등장하면 그 주변에서는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할 수 없으니까.”

“결국 다른 유저들의 도움을 바랄 수는 없다는 소리인가.”

“모르지. 가까운 도시로 텔레포트 한 다음에 거기서부터 뛰어오는 놈들이 있을 수도.”

“퍽이나 있겠다. 랭커들 습성 몰라? 견적 안 나오면 몸 사리면서 안 움직이는 거.”

하물며 패색이 짙은 바덴 성을 지원하러 온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였다.

심지어 바덴의 성채는 수성을 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춘 것도 아니었다.

성의 사면이 평야로 이루어진 덕분에 교통과 문화 교류의 중심지가 될 수는 있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 부분이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했으니까.

‘동서남북, 어디를 공격당해도 이상하지 않아.’

‘몬스터들의 숫자가 적은 것도 아니고…….’

‘성이 완벽하게 포위당하기 전에 도망쳐야 되나?’

유저들이 다양한 생각을 이어가던 그 시각.

성의 영주 홀에서는 한 노인이 이마를 짚고 있었다.

“성주님.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후우.”

바덴 성의 영주이자 라시온 왕국의 귀족인 하인드 백작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공손하게 앉아있는 여인을 쳐다보았다.

‘태양교의 새로운 성녀.’

일개 모험가가 교단의 성녀로 발탁된 건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모험가들의 세력을 일궈냈고, 이제 프레이라는 이름은 이 세계의 주민들 사이에서도 제법 이름이 높았다.

“그래서 뭘 어쩌면 좋겠다는 거요.”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저희가 모실 테니…….”

“어림없는 소리!”

콰앙!

늙은 노장이 눈을 매섭게 뜨며 책상을 내려쳤다.

“지금 나를 믿고 따르는 영지민들을 버리라는 소리인가? 그들과 나와 선대가 일군 고향을 포기하라는 소리인가?”

“때로는 놓아주셔야 할 때도 있는 법이에요.”

“허어. 사람 목숨을 그리 쉽게 놓으라니, 교단의 성녀라는 사람이 내뱉을 말은 아닌 것 같군.”

미네르바는 줄기차게 하락하는 호감도 창을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라고 이런 방법을 추천드리고 싶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바덴 성은 이미 회생불가의 타격을…….”

“나에게는 아직 견고한 성채가 있으며 나의 영지민, 기사와 병사들이 존재하네. 그들을 지키고자하는 나의 마음이 꺾이지 않는 한, 내가 먼저 등을 돌리는 일은 없을 걸세.”

하인드 백작은 못질이라도 하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우…….”

지도자로써는 최고의 덕목을 지닌 작자이다.

하지만 바덴 성에 발이 묶여버린 미네르바는 머리가 아파져오는 것을 느꼈다.

‘보스 몬스터들의 기운 때문에 텔레포트 게이트는 사용할 수가 없어. 지원은 없고, 이쪽의 전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해.’

여차하면 마법사들의 텔레포트 마법 또한 이곳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성을 나가 보스들의 디버프 영역을 벗어나야만 사용할 수 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언노운, 카이는 연락조차 되질 않았다.

‘설마 우리를 쳐내기 위한 고도의 함정…… 일 리는 없겠지요.’

굳이 그가 자신들을 적대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카이가 태양교의 교황을 구워삶은 이상, 좋든 싫든 프레이 길드는 그와 한 배를 타야 하니까.

‘우리 길드의 전력을 깎아서 이득 볼 건 없으니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건데…….’

쿠우웅.

미네르바가 옅은 신음을 내뱉는 순간, 또 한 번의 거대한 충격이 성을 뒤흔들었다.

“하인드 백작님…….”

“후우.”

얼굴에 가득 떠오른 수심과 자글자글한 주름을 손으로 쓸어보인 백작은 기사단장에게 물었다.

“성채는 모두 포위당했나?”

“몬스터들의 수가 많다고는 하지만 성채의 사면을 촘촘하게 뒤덮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 때문인지 아직 동문의 경계는 느슨한 상태입니다.”

“……여기서 시간을 좀 끌어준다면 여자와 아이들, 노인들을 데리고 빠져나갈 수 있겠나?”

하인드 백작의 물음에 기사단장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소리쳤다.

“백작님! 가셔도 백작님이 가장 먼저 가셔야…….”

“아니. 나에겐 그들을 지킬 의무가 있네. 그들이 무엇을 위해 세금을 내고, 이곳을 터전으로 삼으면서 평생을 살아왔겠는가. 나의 영역 아래라면 안전하다는 생각 하나 때문이겠지.”

쿠우우우웅!

성채가 다시 한 차례 흔들리며 먼지 더미가 내려앉았다.

손을 휘저어 허공의 먼지를 흩어낸 하인드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싸울 의지가 있는 남자들에게는 무기를 쥐어주어라. 그리고 여자와 아이들, 노인들부터 먼저 대피를 시키도록 하지. 이대로 있다가는…… 개죽음밖에 되질 않아.”

“하, 하지만…….”

기사단장은 죽음을 각오한 주군의 결단에 존경을 품으면서도 안타까운 눈빛을 드러냈다.

툭툭.

그런 그의 마음을 읽은 하인드 백작은 기사단장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고는, 전장을 전전할 때면 항상 자신을 보호해 주던 금빛 투구를 푹 눌러썼다.

“예전에 선대 영주인 아버님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네. 좋은 영주는 먼저 움직일 때와 천천히 움직일 때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고. 내 보기에 지금은 천천히 움직여야 할 때인 것 같군.”

“지금 몸도 성치 않으신 분이…… 전장에 나서시겠다는 말입니까?”

“바깥 공기를 쐬면 다 낫게 되어있네.”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는 하인드 백작은 노장임에도 불구하고 덩치가 제법 좋았다.

근육질의 몸매는 그의 수염과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었다는 걸 가릴 정도로 단단해 보였다.

다만, 그의 창백한 얼굴에서는 감출 수 없는 병색이 엿보였다.

“병력은?”

“호위대를 제외한 73인과 병사 425인이 백작님을 모실 겁니다.”

“흐음. 그대들은 어쩔 생각인가.”

미네르바는 자신에게 향한 깊은 눈동자를 마주보며 고민했다.

‘만약 여기서 프레이 길드가 빠지게 된다면?’

바덴 성은 몬스터들에게 점령당한다.

당연히 프레이 길드의 명성은 땅에 떨어질 터.

‘유저들에게 손가락 받는 건 그리 상관없어. 하지만…….’

NPC.

그것도 라시온의 귀족과 왕에게 미운털이 박히는 것은 치명적이다.

특히나 주 무대가 라시온 왕국인 프레이 길드에게는 더더욱.

결국 그녀는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지를 골랐다.

“물론 저는 백작님과 함께 전장에 나서겠습니다. 그리고 아이와 여자, 노인분들을 대피시킨다고 말씀하셨는데, 제 세력의 절반을 호위로 보내겠습니다.”

“음. 배려에 감사하네.”

길드 전력의 절반이라도 보존하기 위함이었지만, 하인드 백작은 순수히 감사를 표했다.

철그렁, 철그럭.

바덴 성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각자의 장비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기 시작했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자원한 남자들에게 무기가 분배되었다.

‘유저들의 수도 적지는 않아.’

바덴 성을 터전으로 잡은 유저들만 해도 수백 명.

그들과 프레이 길드, 그리고 NPC의 군대라면 정면 승부는 무리더라도 수성 정도는 가능해 보였다.

‘최대한 버티면서 카이가 오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물론 그조차도 회의적이다.

그가 이 전장에 엘프와 인어들을 데려올 것 같지는 않으니까.

‘아마 혼자서 오겠지.’

랭킹 1위의 플레이어라고는 하나, 미드 온라인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현재 미네르바가 잡을 수 있는 동아줄은 카이가 유일했다.

“나의 영지민들이여.”

바덴 성 최후의 전투가 될 수도 있는 싸움을 앞두고, 하인드 백작은 전사들을 내려다보았다.

엉성한 무기와 갑옷들을 덕지덕지 입은 채, 죽음을 각오한 진정한 전사들.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바덴은 500년이라는 시간 동안 건재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하인드 백작이 검을 뽑아 하늘을 가리켰다.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 그리고 스스로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오오오!”

“몬스터들의 군대는 강력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죽음을 각오한 우리를 두렵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오오오!”

“우리가 시간을 더 벌수록,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멀리 도망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하인드 백작의 검을 받아 성스럽게 빛났다.

“태양신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신다! 바덴을 위하여!”

“바덴을 위하여!”

NPC들의 눈물겨운 행동에 감수성 여린 유저들은 벌써부터 눈시울을 훔쳤다.

“젠장…… 할배 주제에 뭐 저리 멋있냐.”

“오늘 전투. 죽을 때까지 열심히 싸워볼란다.”

“이 상황에서 도망치면 밑에 달린 거 떼야지.”

이어서 바덴 성의 NPC호위대와 프레이 길드가 노인과 아이, 여자들을 데리고 동문으로 빠져나갔다.

콰아아아아아앙!

동시에 서문의 두꺼운 문이 몬스터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스르르릉!

“나를 따르라!”

두려움을 모르는 듯한 하인드 백작이 선두를 차지하며 튀어나갔다.

“저 할아버지가 정말…….”

당황한 음성을 뱉어낸 미네르바가 다급히 길드원들에게 명령했다.

“우리 길드도 곧장 전투에 참여합니다! 바덴 성의 영주가 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세요!”

그녀의 뾰족한 음성이 광장에 퍼지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메시지창이 반짝거렸다.

‘카이……!’

발신자를 확인한 미네르바의 눈이 반짝거렸다.

[카이 : 30분만 버티십시오.]

[미네르바 : 30분이라뇨? 지금 서문이 뚫려서 몬스터들이 해일처럼 들어오는 중이예요. 15분도 아슬아슬하다구요.]

[카이 : 성녀 클래스가 그렇게 볼품없지는 않을 텐데요? 거, 좋은 패 숨겨놨다가 무덤 가져갈 것도 아니고 이럴 때 좀 씁시다.]

[미네르바 : 그, 그런 말이 그렇게 쉽게…….]

[카이 : 아무튼 30분입니다. 그 동안만 버티면, 뒤는 알아서 하겠습니다.]

[대화가 종료되었습니다.]

“이이……!”

제멋대로에 안하무인인 카이의 행동!

하지만 미네르바는 혈관이 툭 불거진 이마를 주무르면서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카이는 여태껏 쉬운 것 하나 없던 수많은 전장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일궈낸 사람이었다.

그 사실이 미네르바로 하여금 자그마한 안식을 가져다주었다.

‘30분만 버티면 그 뒤는…….’

괴물이 책임져 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