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힐통령 178화
64장 두 개의 게이트(5)
[보스 몬스터, 트롤 히어로를 처치하셨습니다.]
[공적치 포인트 2870을 획득하셨습니다.]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들의 위력이 약해집니다.]
“후우.”
레벨 278의 트롤 히어로가 일개 유저 한 명에게 처치되는 데에는 12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업그레이드와 신성 사슬 콤보도 좋은데?”
보스 몬스터조차 쉽게 풀어낼 수 없을 정도의 사슬이라니.
카이는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홀리 익스플로젼은…… 기본 스킬이라고 얕보고 있었는데…….’
올라간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오며 어색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바덴 성의 서쪽 구역 건물들을 불도저처럼 밀어버린 것이 스킬 하나의 힘이라니.
다른 직업이라면 2차 전직을 마친 마도사가 상위 스킬을 사용했을 때나 낼 수 있는 위력이다.
‘업그레이드라는 거, 생각보다 변수를 만들기 좋겠어.’
재사용 대기시간도 5분으로 그리 긴 편은 아니다.
게다가 세 개의 스킬이나 강화를 할 수 있으니, 그때 그때 전략적인 선택을 취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공적치가 계속 들어오는 걸 보니 바깥은 아직도 순항 중인 것 같고…….”
카이는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는 바덴 성의 중앙 지역을 힐긋 쳐다봤다.
‘우선 영주부터 살리는게 먼저겠지.’
그 후에야 남아 있는 한 마리의 보스 몬스터를 해치우고, 게이트들을 파괴하면 될 터.
검을 늘어트린 카이는 중앙 지역의 몬스터들을 무차별적으로 베어가며 앞으로 전진했다.
***
“와.”
“헐.”
“대박.”
영혼이라고는 1g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감탄사가 줄줄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일반인이라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봤을 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저 정도의 감탄사를 뱉어낸 것만으로도 일반인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트롤 히어로를…… 12분 만에 해치운다고?”
“진짜 미쳤어. 대체 장비랑 스킬들 레벨이 얼마나 되길래…… 아니, 스탯은 어떻게 분배되어 있는 거야?”
“저저, 그냥 막 달려오면서 몬스터 썰어버리는 거 보소. 혼자 무쌍 찍냐?”
그들의 말처럼 카이는 시가전을 질주하며 다가오는 몬스터들의 팔다리를 무처럼 썰어댔다.
“흐읍!”
카이가 이토록 날뛸 수 있는 데에는 아야나 가족이 만들어낸 영약도 크게 한몫을 했다.
[치카푸라 잎 영약 LV.7]
30분 동안 최대 스테미너 치가 대폭 증가합니다.
30분 동안 스테미너 재생 속도가 크게 증가합니다.
30분 동안 예리한 감각 LV.2 효과가 부여됩니다.
[민트아시오를 삼킨 큰 귀 박쥐 포션 LV.5]
20분 동안 모든 스탯이 17만큼 증가합니다.
10분 동안 받는 피해가 6% 감소합니다.
“후우, 후우!”
아무리 달려도,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숨이 턱턱 막히지 않는다.
대폭 강화된 스테미너 수치와, 재생력이 카이의 심장과 혈관을 튼튼하게 만들어주었기 때문!
‘우선 서쪽 구역을 안전하게 만든다.’
얼마 없는 그들의 전력은 현재 서쪽과 북쪽, 남쪽을 동시에 경계하느라 분산된 상태다.
한쪽만 신경을 끄게 만들어줘도 상황은 훨씬 편해질 터.
‘과연 침공 이벤트. 왜 저레벨 유저들이 뿔났는지 알겠네.’
하급과 중하급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을 실컷 잡아봤자, 경험치나 공적치, 재료들은 상급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와 비교조차 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이번 이벤트는 레벨이 높을수록 유리하다는 뜻!
카이는 쑥쑥 올라가는 경험치 창을 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최소 320레벨은 찍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침공 이벤트가 시작하기 직전 298레벨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엄청난 성장이다.
특히 레벨이 오를수록 획득 경험치가 늘어나는 미드 온라인을 생각하면 침공 이벤트는 유저들에게 매우 은혜로운 이벤트다.
“까드드득.”
때문에 카이는 더욱 열이 받았다.
‘이렇게 꿀 같은 이벤트를 타이탄 그 놈들 때문에 온전하게 즐기지 못하다니!’
녀석들에게 묶여있던 몇 시간이면 몬스터들 잡아도 수백 마리는 더 잡고, 게이트를 닫아도 최소 한 개는 더 닫았을 시간이다.
‘이 빚은 나중에 톡톡히 받아내겠어.’
골리앗 한 번 죽였다고 퉁치기에는 이쪽의 손해가 너무나도 막심한 상황.
복수의 칼날을 마음속에 품은 카이의 검은 더욱 매서워지기 시작했다.
“크롸아아아아!”
“그르르륵!”
자신들의 동료가 계속 죽어나가자 이변을 눈치챈 오우거와 트롤들이 등을 돌렸다.
“어어!”
“이봐, 위험해!”
자신들을 공격하던 몬스터들이 단체로 등을 돌려 카이에게 달려 나가자, 이를 지켜보던 유저들이 당황한 음성을 뱉어냈다. 하지만 카이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몬스터들의 동선을 계산했다.
‘오우거 세 마리. 트롤 두 마리랑 맨티스 네 마리.’
이 정도 숫자라면 월척 중에서도 월척!
“업그레이드, 신성 폭발.”
[업그레이드 스킬에 의해 신성 폭발이 강화된 상태입니다.]
[신성 폭발의 능력치 상승 효과가 대폭 증가합니다.]
[모든 스탯이 65만큼 상승합니다.]
카이의 움직임이 한층 더 기민해졌다.
당연히 그가 휘두르는 칼 끝도 날카로워졌다.
***
터벅, 터벅.
거친 전투를 치렀음에도 발소리는 육중하다.
그렇다고 그의 키가 골리앗처럼 크거나, 덩치가 오우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발소리가 지닌 강렬한 무게는 자신감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자네의 이름은 무엇인가.”
몬스터들의 피로 갑옷을 가득 물들인 하인드 백작이 살짝 흔들리는 눈빛을 띄우며 물었다.
유저들은 항상 용맹하던 하인드 백작의 그런 모습을 쉽사리 이해했다.
‘이런 놈을 눈앞에 두고 흔들리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거지…….’
‘진짜 말도 안 되는 놈.’
‘아니, 애초에 성기사라는 새끼가 왜 언데드들을 이끌고 다니는데?’
서쪽에 존재하던 몬스터를 궤멸시킨 카이는 성호를 그리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태양교의 성혈단장, 카이라고 합니다.”
“……성혈단이라? 태양교 내부에 그런 단체가 있던가?”
“아마 아직 정식으로 공표되진 않았을 겁니다. 조만간 교황님에 의해 발표될 태양교의 새로운 무력 단체입니다.”
“허허…… 성스러운 피라…….”
힐긋 언데드들을 쳐다보던 하인드 백작은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는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뭐, 이름이 무슨 대수겠는가. 자네가 바덴 성의 위기를 넘겨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잖나. 그런데…… 어째서 연고도 없는 우리 바덴을 위해 이리 힘을 써주는 겐가?”
“사실 연고가 없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빙그레 미소를 지은 카이가 오랜 시간 인벤토리에 잠들어 있던 편지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냈다.
“이것은?”
“아르센 남작님의 추천장입니다. 바덴 성의 영주님에게 가져가면 만나주실 거라 말씀하셨는데…….”
“아아! 이제 기억났네! 글렌데일의 성자, 카이가 자네였단 말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에 의해 신원이 확인되자, 하인드 백작은 카이를 격렬하게 환영했다.
“분명히 전서를 받은 기억이 있어. 일 잘하고 똑 부러지는 모험가 한 명에게 추천장을 넘겨주었다는 전서였네. 이전에 추천을 받았던 이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터라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방문을 하지 않아 걱정을 했었네.”
“이런 저런 일이 많았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닐세. 사과 받고자 꺼낸 말이 아니야. 오히려 바덴이 힘들 때 잊지 않고 찾아와줘서 정말 고맙네.”
굳은살을 넘어 딱딱한 무언가가 되어버린 손바닥으로 카이의 손을 두드린 하인드 백작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네. 북쪽과 남쪽에는 아직 몬스터들이 남아 있어.”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당당한 자신감을 드러낸 카이는 다시 떠날 채비를 했다.
“남쪽의 몬스터들은 하인드 백작님과 모험가들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병력일 겁니다. 전 곧장 북쪽의 몬스터들을 처치한 뒤, 게이트를 소멸시키고 돌아오겠습니다.”
“혼자서 괜찮겠나? 여차하면 기사들이라도 지원을…….”
“아니요.”
카이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영주님이 안전하셔야 제가 마음을 편하게 먹고 싸울 수 있습니다.”
“자네…….”
하인드 백작이 크게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상황을 지켜보던 유저들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저 녀석 게임 좀 할 줄 아네.’
‘하긴, 랭커치고 아부 못하는 놈들은 거의 없지.’
‘으으. 나도 저렇게 입 잘 털 수 있는데…… 호감도 잘 올릴 자신 있는데…….’
물론 다짜고짜 아부를 한다고 호감도가 오르는 것이 아니다.
적절한 상황과 시기, 그리고 진심이 담긴 아부일 때야 비로소 효과가 나타나는 법!
[하인드 백작의 호감도가 상승하였습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메시지 창을 바라본 카이는 다시 등을 돌려 북문으로 향했다.
“잠깐만요!”
떠나는 카이에게 황급히 따라붙은 미네르바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혈단이라뇨? 설마 우리 길드랑도 상관있는 단체인가요?”
“예. 프레이 길드는 절 전적으로 지원해 주셔야 하니까요.”
“그런 말은 들어본 적 없어요!”
“그야 제가 말 안 했으니까요.”
카이의 즉답에 미네르바는 상처받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제, 제가 우리 길드에 관련된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들어야겠어요?”
누가봐도 달래주고 싶은, 상처받은 표정의 미네르바.
하지만 카이는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사람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한테 전해 들은 것도 아니고, 제 입에서 나온 말이잖아요. 그리고 이야기 꺼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에요. 뭐가 문젭니까?”
“…….”
당사자에게 직접, 누구보다도 먼저 이야기를 들었다.
카이가 하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틀리지는 않았는데…….
‘뭐죠? 왜 이렇게 기분 나쁘죠?’
미네르바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으으…… 그래도 다음부터 우리 길드에 관련된 사항은 저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세요. 다른 사람이랑 같이 듣는 건 기분이 조금 그러네요.”
“그럴게요. 그럼.”
“…….”
저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원하게 인정하는 것도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던 미네르바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길드원들과 함께 남쪽 성채를 막을 거예요.”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성혈단 이야기는 프레이 길드 입장에서도 절대 손해보는 일이 아닐 거예요.”
“……왜죠?”
미네르바의 질문에 카이는 씨익 미소를 지을 뿐,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에게 해줄 이야기가 더 없기도 했다.
‘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설명을 해줘. 알버트 교황에게는 그런 이름의 무력 단체를 신설하겠다는 말만 들었으니까.’
그게 대체 무슨 목적을 가진 단체인지는 카이조차 모른다.
단, 알버트 교황이 교단의 실권을 회복했고 자신이 태양신 헬릭의 대리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지금.
그가 절대 카이를 섭섭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네.”
미네르바는 언데드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랭커들 사이에서 그런 걸 묻는 건 실례다.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길드원들 속으로 돌아갔다.
‘자, 그럼 트리플 헤드 오우거만 잡으면 끝나는 건가.’
나머지 몬스터들이야 시간만 있으면 다 잡을 수 있다.
‘언데드들이 역소환되기 전까지는 끝났으면 좋겠어.’
다행히 유지 시간인 24시간이 지나기 전에 전쟁은 끝날 것 같았다.
덕분에 산책을 나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북문을 향한 카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전투 소리……?’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아직도 북문에는 모험가와 NPC들이 전투를 치루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귀에 들리는 소리는 조금 달랐다.
‘예리한 칼로 몬스터의 가죽을 계속해서 썰어대는 소리다.’
당연한 말이지만 웬만한 고수가 아니라면 낼 수 없는 소리다.
심지어 카이가 알기로 이 자리에 그 정도 수준의 유저는 없다.
‘바덴의 기사 단장이 330레벨 정도 되기는 하지만…… 분명히 아까 하인드 백작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걸 봤는데?’
궁금증을 참지 못한 카이는 앞길을 막고 있는 몬스터들을 더욱 빠른 속도로 처치하기 시작했다.
“후우!”
전신에 피를 가득 묻히고 레벨이 하나 올랐을 때.
카이는 그제야 자신이 보고 싶어 하던 전투를 목격할 수 있었다.
“검…….”
가벼운 몸짓으로 트리플 헤드 오우거의 무릎과 뱃살, 어깨를 순차적으로 밟으며 튀어 오른다.
동시에 가녀린 팔뚝이 들어 올린 칼은 밝은 달을 청명하게 반사시켰다.
달빛을 녹여낸 것처럼 찰랑거리는 긴 은발의 생머리가 허공을 수놓았다.
그러한 장면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카이의 눈동자에 각인되었을 때, 그녀는 검을 휘둘렀다.
“스매쉬.”
조곤조곤, 마치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듯 조용하게 울려퍼지는 고운 목소리.
하지만 그 가녀린 목소리와는 별개로, 섬전처럼 내리꽂힌 검은 오우거 머리 세 개를 일격에 날려버렸다.
[보스 몬스터, 트리플 헤드 오우거가 처치되었습니다.]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들의 위력이 약해집니다.]
카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이를 쳐다봤다.
실제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영상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다.
미드 온라인의 모든 랭커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천재라고 부르는 게이머.
지금은 카이에게 뺏겼지만, 랭킹 1위라는 타이틀을 반 년 넘게 놓지 않았던 전설 중의 전설.
“하읏차.”
검은색 투구를 깊게 눌러쓴 은발의 여검사, 유하린은 깃털처럼 부드럽게 착지하며 귀여운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