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179화 (179/441)

# 179

힐통령 179화

65장 메리 크리스마스 온라인(1)

촤아아악!

가볍게 검을 흔들어 피를 털어낸 유하린은 슬쩍 고개를 들어 카이를 쳐다봤다.

“…….”

타인에게 자신의 정보를 공개하기를 극도로 꺼려한다는 유하린.

카이는 그녀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는 했지만, 딱히 위협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내가 카이라는 건 알까?’

모를 것이다.

아직 대부분의 유저들은 카이의 얼굴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모르고 있으니까.

‘이번 크리스마스 연휴 때 NET미디어가 비르 평야 전쟁 영상을 공개하면, 그때부터는 얼굴이 알려지겠지.’

자연스레 꼬이는 파리들이 많아질 것이다.

지금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는 건 10대 길드 몇 군데지만, 그것만으로도 귀찮아 죽겠으니까.

‘한 마디로 지금 나와 유하린은 처음 보는 상황.’

그녀와 자신 사이에는 그 어떠한 관계도 없었다.

당연히 그녀가 자신을 적대할 이유도, 반대로 친근하게 대해줄 이유도 없을 터.

적어도 카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앗.”

하지만 그녀는 아닌 모양.

카이를 빤히 쳐다보던 유하린이 돌연 작은 탄성을 터트렸다.

이어서 곧장 사체가 된 트리플 헤드 오우거에게 다가간 그녀는 아이템을 루팅하기 시작했다.

‘역시 무시하네.’

카이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유하린답다고 생각할 때, 그녀는 길게 쭉 뻗은 다리를 성큼성큼 내딛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나한테 온다고? 왜?’

그녀를 따라다니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유저들을 만나도 티를 내지 않고 그냥 무시한다.

때문에 도도한 여신이라는 낯간지러운 별명마저 붙어 다니는 상황.

카이가 유하린의 접근을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할지 고민할 때, 그녀가 손을 척 내밀었다.

“이건…… 트리플 헤드 오우거 가죽?”

유하린이 이걸 자신에게 내미는 저의가 무엇일까.

미간을 찌푸린 카이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나한테 가죽사라고 협박하는 건가?’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무턱대고 가죽을 건네는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있을 리 있나!

잠시 고민을 이어가던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야. 310레벨의 보스 몬스터 가죽이라면 레어한 재료이니까. 이거 사서 블리자드랑 미믹의 겨울옷이나 한 벌씩 해줘야겠어.’

결정을 내린 카이는 조심스럽게 검지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렸다.

“가격은…… 이 정도면 될까요?”

“…….”

아무 말 없이 그의 손가락을 가만히 쳐다보던 유하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100골드로는 부족하다는 건가.’

가볍게 충격을 먹은 카이가 천천히 손가락 하나를 더 들어올렸다.

“2, 200이라면…….”

도리도리.

그녀의 완강한 거절!

카이가 세 번째 손가락을 올려야 할지, 거래를 파토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할 때,

유하린이 가죽을 카이의 어깨 위에 살포시 얹어주었다.

“……답례예요.”

“예?”

카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유하린이 말을 했어? 그것도 나한테?’

그녀의 팬클럽 회원들이 듣는다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친위대를 보내도 할 말 없는 상황!

심지어 그 말의 의미도 가볍지 않았다.

‘답례라니? 무슨 답례?’

답례란 말이나 동작, 물건 등을 남에게서 받았을 때, 이를 돌려주는 행위를 의미한다.

‘아…… 설마…….’

카이가 싸늘한 트리플 헤드 오우거의 사체를 쳐다봤다.

‘내가 서쪽 지역을 뚫어놓은 덕분에 저 녀석을 잡았고…… 그래서 경험치랑 공적치를 얻었으니 재료를 나눠준다는 건가?’

정황상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맞을 터.

이에 카이는 손사래를 쳤다.

“에이, 길 지나다니는 몬스터에 네꺼 내꺼가 어디 있습니까. 굳이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도리도리.

고개를 크게 내저은 유하린이 똑 부러지게 말했다.

“선물을 받으면 다음에 만났을 때는 꼭 답례를 하라고 배웠어요.”

“아, 네에…….”

이 얼마나 훌륭한 가정 교육인가!

할 말이 깨끗하게 사라진 카이는 어색한 미소를 띠며 가죽을 쓰다듬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어우, 가죽 부드럽네요. 따뜻하기도 하고.”

“앗…… 맞아요. 몬스터들의 가죽을 어깨에 덮고 있으면 따뜻해요.”

가죽이라는 주제가 나오자 유하린의 목소리에 생기가 훅 들어가더니, 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가죽 중에서도 최고로 따뜻한 건 설산 쪽에 있는 설인의 가죽이에요. 그건 덮으면 정말 좋아요. 털이 복실복실해서 기분도 좋고, 가죽 자체에 보온 효과가 걸려 있어서 덮고만 있어도 몸이 녹아내릴 것 같아요.”

“아, 그렇군요…….”

“하지만 가성비가 가장 좋은 건 오크의 가죽이에요. 노린내가 조금 나고 질기기는 하지만, 강인한 오크들의 가죽은 추위를 잘 막아주거든요. 코볼트 가죽은 안 돼요. 너무 얇아서 바람이 잘 들어오거든요. 애매한 게 놀의 가죽인데…….”

한바탕 일장연설을 쏟아낸 가죽 덕후는 그제야 부끄러워졌는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 그럼 안녕히.”

이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간 유하린은 건물의 지붕과 지붕을 밟으며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거참. 밤도깨비 같은 여자네.”

머리를 긁적인 카이는 자신의 어깨를 덮는 건 물론, 바닥까지 질질 끌리는 거대한 가죽을 쳐다보며 웃음을 지었다.

“첫 만남에 이런 걸 주다니. 착한 사람이야.”

***

[상급 게이트를 파괴하셨습니다.]

[상급 게이트를 파괴하여 공헌도 50,000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현재까지 획득하신 공헌도는 총 121,082포인트입니다.]

[대륙의 모든 게이트가 파괴되어 침공 이벤트가 종료됩니다.]

[카이님의 공헌도 랭킹은 7위입니다.]

“후우.”

두 개의 상급 게이트를 닫을 땐 이미 새벽의 해가 떠오르는 중이었다.

“7위라…… 나쁘지는 않네. 에이, 타이탄 놈들만 아니었으면 1위도 노려볼 만했는데.”

영 찜찜한 기분에 한숨을 내쉰 카이는 자신을 따르는 듀라한과 스켈레톤들에게 인사했다.

“너희들도 고생이 많았다. 푹 쉬어.”

하룻밤 사이에 수백 마리까지 불어난 이들을 역소환시키자 허전한 기분마저 들 정도.

카이는 비어버린 그들의 자리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나이트 오브 나이트메어…… 확실히 위력적인 아이템이야.’

이 게임에 단 하나밖에 없는, 흑탑주 코로나가 두 달에 걸쳐 만들어낸 희대의 역작!

단 한 번 사용해 봤을 뿐이지만 카이는 아이템의 성능에 크게 만족했다.

‘이 반지에는 개인을 군단으로 만들어주는 힘이 있어.’

10대 길드는 물론 어지간히 이름이 높은 길드들은 덩치가 크다.

최정예 유저들만 수백 명인 건 물론, 특별히 양성하고 있는 루키나 일반 길드원들까지 합치면 길드원만 수천 명이 넘는 곳도 수두룩하다.

그런 대형 함선들이 항해하는 바다에서, 카이라는 개인은 일개 돛단배 정도 크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지겠지.’

혼자서 군대를 이길 수 있는 플레이어.

자신은 이번에 타이탄 길드의 최정예 부대를 꺾고 골리앗을 죽이며 그 사실을 입증했다.

‘이제 이벤트가 끝나면 아주 천천히 복수를 해줄 테니 기대하라고.’

자신을 건드린 이들에게는 철저한 복수를.

마음 깊이 각오를 새긴 카이는 바덴 성으로 돌아갔다.

“다들 고생이 많았네.”

바덴 성의 절반은 하룻밤 만에 폐허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NPC들은 이미 동문을 통해 다른 곳으로 대피시킨 상태인지라 인명 피해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정말 고맙네. 자네들의 노고는 내가 반드시 보상해 주지.”

하인드 백작이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으로 선언했다.

그는 도시가 절반이나 무너졌다는 것에 슬퍼하기보다, 절반이나마 무사한 것에 감사했다.

“바덴의 자랑스러운 기사와 전사들이여! 그대들의 손으로 우리의 도시를 지켜냈다!”

“우오오오오오!”

NPC병사와 기사들이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기쁨의 눈물을 주룩주룩 흘려댔다.

“오늘 우리의 싸움을 도와준 모험가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도록!”

“물론입니다!”

“정말 고마웠다고.”

“모험가들은 이득이 되는 일만 하는 약삭빠른 이들이라 생각했는데…… 반성하지.”

“너희들이 아니었으면 바덴 성은 진작 멸망했을 거야. 정말 고맙다.”

유저들은 NPC들의 감사 인사를 아주 뻘쭘하게 받아들였다.

‘훗, 여기서 나와 저들의 차이가 두드러지는구나.’

수많은 NPC들을 도와줬던 카이는 이미 이런 상황이 적응되다 못해 제 집 안방처럼 편한 상황!

“정말 힘들었습니다. 텔레포트 게이트는 말을 안 듣지. 소문에 따르면 바덴 성의 상황은 최악이지…… 하지만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시민을 살려야 한다는 그 마음 하나로. 저는 아르나 평원을 달려 이 성에 도달했습니다.”

“오오오! 설마 미론 마을에서 이곳까지 달려왔다는 건가?”

“크흑……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역시 글렌데일과 화이트홀에서 성자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었군!”

[NPC 호른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NPC 보트간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NPC 퀴밀의 호감도가…….]

계속해서 상승하는 NPC들의 호감도!

그뿐만이 아니었다.

띠링!

[당신이 이끈 죽음의 군단이 아니었으면 바덴 성은 이미 폐허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 싶다는 그 간절한 마음이 절망에 빠진 바덴의 시민들에게 내일이라는 희망을 선사하였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던 헬릭이 귀를 갸웃거립니다.]

[그녀는 당신이 정말로 아르나 평원을 달려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태양신 헬릭이 당신의 선행에 크게 감동하였습니다.]

[선행 스탯이 10 상승하였습니다.]

[태양 목격자의 효과로 선행 스탯이 5만큼 추가로 상승하였습니다.]

[명성이 15,000 상승하였습니다.]

“음음.”

연설 한 번에 바덴 성의 시민들은 물론, 신까지 홀려 버리는 기적의 언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메시지 창들을 쳐다보던 카이가 스탯 창을 열었다.

[카이]

직업 : 태양의 사제

레벨 : 318

칭호 : 신의 대리자

생명력 : 49,400

신성력 : 121,200

능력치

힘 : 1156 체력 : 494

지능 : 386 민첩 : 354

신성 : 1212 위엄 : 336

선행 : 203

독 저항력 +30

마법 저항력 +40%

자연친화력 +200

악마/언데드에게 주는 피해 +50%

“318레벨이라. 좋네.”

비록 트리플 헤드 오우거를 잡지 못해 320레벨을 찍지는 못했지만, 침공 이벤트로 인해 엄청난 폭업을 이뤄냈으니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상급 게이트를 많이 닫지 못해서 공적치는 낮지만, 올라간 레벨만 따지면 내가 가장 많이 득을 본 것 같아.’

그 사실을 위안으로 삼는 카이에게 하인드 백작이 다가왔다.

“성혈단장 카이. 자네에 대한 감사 인사는 태양교 본단을 통해 정식으로 하겠네.”

“별말씀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저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허허. 사람 참, 아르센 남작의 말대로 정말 겸손하군. 그가 보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진국이야.”

“아, 그러고 보니…….”

하인드 백작은 지난번에 지나가듯 자신 이전에도 아르센 남작의 추천장을 받아 온 모험가가 있다고 말했다.

‘아르센 남작님은 딱히 말해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대체 누구지?’

궁금증이 발동한 카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말고 이전에 왔던 모험가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음…… 그녀는 내가 봤던 모험가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네.”

“아름다웠……다고요?”

“그래. 긴 은발을 자랑하는 그 모험가는 검술의 달인이었네. 아까 바덴 성이 걱정되어서 들렀다가 간다고 편지도 남기고 갔었는데, 혹시 전장에서 마주친 적은 없나? 이름은 유하린이라고 하네만…… 한 번 마주친다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사람이네만.”

“…….”

하인드 백작의 말을 듣던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만. 그럼 랭킹 1위의 유하린이 아르센 남작의 추천을 통해 하인드 백작을 만난 적이 있었다고?’

자신이 유저 중 최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바덴 성의 성주와 만났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유하린이라면 납득은 가.’

그녀는 누구와도 소통을 하지 않는 외로운 한 마리의 늑대와 같은 사람이다.

당연히 소문이 퍼질 리가 없다.

‘그런데 유하린이라면…….’

문득 카이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오크 토벌대를 마치고 아르센 남작의 집에서 저녁 만찬을 즐기던 날.

그 때 자신이 만났던 여인도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이름이 유하린이었다.

‘한 번이면 우연이겠지만, 공통점이 이렇게 많다면…….’

카이의 눈이 반짝였다.

‘이런 속 편한 우연이 있을 리 없지. 두 사람은 동일인물이다.’

이어서 인벤토리에 들어있는 트리플 헤드 오우거의 가죽을 쳐다보던 카이는 헛웃음을 흘렸다.

“……뭐야. 그럼 전부 알고 있었다는 소리잖아?”

자신이 언노운인 것도, 현재 랭킹 1위의 플레이어라는 것도.

그녀는 전부 알고 있었다는 소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히 티를 내지도 않았어.’

오히려 오크 가죽의 답례랍시고, 310레벨짜리 보스 몬스터의 가죽을 주는 사람이다.

항상 누군가를 도와주던 자신이 누군가에게 일방적인 호의를 받아본 건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유하린이라…….”

한동안 헛웃음만 흘리던 카이는 기지개를 쭉 펴면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감쪽같이 속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야. 오히려 다음에 또 만난다면…….”

그때는 조금 더 편하게, 마치 좋은 친구처럼 대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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