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힐통령 187화
68장 밟아죽이기(3)
카이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
‘블랙 쉬르본 세트. 다른 건 몰라도 물리 방어력 하나는 끝내주게 높은 녀석이지.’
‘푸른 선지자의 로브랑 폭주하는 현자의 지팡이? 저 녀석은 위험해.’
어쩌면 태양의 사제로 전직하고 폭발적으로 성장한 오감이야말로 최고의 무기가 아닐까.
카이는 상대방을 한 번 스윽 훑은 것만으로 대략적인 견적을 기가 막히게 뽑아냈다.
물론 할 줄 아는 것이 견적 뽑는 것밖에 없다면 무의미하다.
하지만 카이는 자신이 뽑은 견적에 걸맞는 처방전을 내려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물리 방어력이 높으면 방어력을 무시해야지. 파이널 어택.’
콰드드드득!
“커어억……!”
“노, 녹스!”
“이런 미친! 무려 블랙 쉬르본 세트라고! 세트 하나에 7천 골드씩 하는 건데……!”
“전사들의 악몽이라 불리는 녹스를 단숨에 녹인다고? 무슨 미친 딜이야?!”
‘거, 물리 방어력이 높으면 뭐해. 어차피 방어력 무시 데미지인데.’
한 방, 한 방.
카이의 손은 두 개뿐이었고, 적들의 손은 단순 계산만으로도 400개가 넘어갔다.
당연히 한 대 때리면 200대를 맞아야 하는 상황.
‘공격 한 번을 할 때도 허투루 할 수는 없어.’
이 싸움이 끝나기 전까지 단 한 번의 실수도 해서는 안 된다는 의지가 카이를 휘감았다.
그것은 자연스레 카이의 집중력을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0.7초 뒤 스매쉬 피하고 뒤로 돌아서 가드. 그 다음에는 바로 점프해서 한 번 흔들어볼까.’
단 0.1초의 쉴 틈도 없이 육체를 움직이면서, 머리 또한 빠르게 움직인다.
스스로에게 질문, 질문, 그리고 또 질문.
‘여기선 어떻게 해야될까?’
마치 여러 명의 자신이라도 있듯, 스스로에게 물으며 최적, 최선,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낸다.
그것이 카이가 현재 전장의 사신처럼 보이는 이유였다.
“미친……!”
“이쪽에선 30명이 넘게 로그아웃 당했는데…… 멀쩡하다고?”
“멀쩡한 정도가 아니다.”
창술사 샌지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노히트…….”
No Hit. 단 한 번의 정타도 허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30명의 타이탄 길드원들을 처치하면서도 그가 받은 피해는 0이라는 뜻.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가능하지?’
타이탄 길드원들은 자신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의 등장에 혼란스러워졌다.
특히 가장 놀란 것은 약간 솟아오른 언덕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골리앗이었다.
부릅 뜬 눈으로 카이의 모든 움직임을 관찰하던 그의 입가가 부르르 떨렸다.
‘언노운, 카이 녀석은 절대 저 정도 실력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아예 처음부터 천재였다면 모를까, 언노운은 처음 활동할 때 어수룩한 모험가였다.
‘당시의 내가 마음만 먹었다면 5초 안에 녹여 버릴 수 있는 시시한 상대였지.’
때문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언노운이라는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녀석의 존재감은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성장에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터.
‘그러나 녀석은…….’
자신에게는 한계 따위가 없다는 걸 뽐내기라도 하듯, 놈은 만날 때마다 강해졌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인정해야겠군.’
골리앗이 이빨을 꽈악 깨물며 절대로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 하나를 인정했다.
‘놈의 전력은 세계 10대 길드와 동급. 혹은…… 그 이상.’
벌써부터 소문은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바덴 성에 두 개의 게이트가 열렸을 때, 카이가 언데드 대군을 몰고 와서 그들을 구출했다고.
‘심지어 지금은 언데드 군단을 불러내지 않고도 대등하게 싸우고 있다.’
물론 놈도 사람이니 지칠 것이다.
아무리 이곳이 게임이라서 현실보다 덜 지친다고는 해도, 스테미너라는 것이 존재하니까.
‘하지만…….’
골리앗과 카이의 거리는 무척이나 멀었다.
서로의 얼굴이나 간신히 보일까 싶을 정도로.
“……!”
하지만, 골리앗은 순간 카이와 자신의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누군가가 자신의 심장을 꽉 움켜쥔 것처럼 숨이 턱하고 막혔다.
‘이런 건 인정할 수 없다.’
골리앗도 누군가보다 뒤에 있을 때가 존재했다.
게임을 남들보다 1주일 정도 뒤에 시작한 그의 위로는 이미 많은 강자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확신하건데, 단 한 번도 그들에게 열등감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어차피 내가 언제고 뛰어넘을 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보라.
200명의 양 떼 사이에 난입하여 학살을 자행하는 사자를.
그 모습을 쳐다보는 골리앗은 자신감이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것이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샌지. 준비해라.”
“……예.”
골리앗의 명령에 샌지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카이가 실시간 방송을 켜자 커뮤니티는 광란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난리가 났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평소보다도 훨씬 조용해진 상태였다.
평소 커뮤니티를 배회하던 유저들이 모두 카이의 방송을 보느라 글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카이의 방송 랭킹은 압도적으로 전 세계 1위.
시청자 수가 320만을 돌파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덕분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실시간 방송 서버 관리자들이었다.
“젠장! 서버 구축 상황은?”
“곧 됩니다! 97…… 98…… 99…… 100% 완료되었습니다!”
“후우. 겨우 한시름 놓았나…….”
서버 관리 책임자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도 언노운, 언노운해서 대단한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대단할 줄이야.’
일반적인 개인 방송 서버로는 도저히 320만 명을 감당할 수가 없다.
때문에 그들은 카이를 위해 독자적인 서버를 따로 구축해야 했다.
“뭐, 이 말도 안되는 영상을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지만.”
서버 관리자 또한 미드 온라인의 광팬.
그는 영상 속에서 한 편의 영화를 찍고 있는 남자에게 존경심을 표했다.
인터넷의 댓글 상태도 그리 다르지는 않았다.
-아 관리자들 돈 벌어서 뭐하냐? 서버 관리 안 해?
-어휴. 진짜 영상이 재미라도 없으면 버퍼 걸리는 거 짜증나서라도 안 볼 텐데.
-오오……? 갑자기 버퍼 하나도 안 걸린다.
-어라, 진짜네? 관리자들 일 좀 했나 본데?
-크으, 저 무빙을 렉 없이 보니까 예술이네 그냥. 예술이야.
-혼자 무슨 약 빨고 게임하나? 저 상황에서 뒤에서 찌르는 공격이 보여?
-이거 타이탄 길드랑 짜고 찍는 건 아니겠지? 의심이 될 정도.
물론 타이탄 길드가 미치지 않은 이상, 카이를 띄워주려고 본인들 이미지를 시궁창에 처박지는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현재 카이가 보여주고 있는 화면은 그 어떠한 조작도 들어가지 않은 공정한 결투.
-50명 남았다.
결투는 종장으로 치달았다.
***
“허억, 허억…… 허억.”
항상 순백의 고결함을 자랑하던 카이의 로브는 여기저기 얼룩이 져 엉망이었다.
비에 젖은 초원의 바닥을 구르면서 생긴 영광의 흔적들이었다.
“후우, 후우, 후우.”
카이는 일정한 호흡을 짧고 빠르게, 하지만 주기적으로 뱉어냈다.
마라토너들이 즐겨 사용하는 호흡법으로, 심폐 효과를 크게 증진시켜 주는 호흡법이었다.
‘이제 정말 몇 안 남았어.’
사제들은 모두 처리했다.
전사와 마법사들도 대부분 처리했다.
남은 건 고작 10여 명의 적들뿐.
하지만, 카이는 200여 명의 적 앞에 있을 때보다도 크게 긴장했다.
‘하나같이 만만한 놈이 없냐.’
절로 웃음이 나왔다.
190마리의 양을 도륙하고 나서야 양떼들을 지키던 사냥개와 늑대들이 어슬렁거리며 기어 나왔으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대단하군.”
창술사 샌지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짧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네 놈은 적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설마 우리를 상대로 여기까지 올 줄이야…….”
“마치 여기까지가 내 한계인 것처럼 말하네. 난 끝까지 갈 생각인데.”
카이의 말에 샌지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상태로 말인가? 아, 설마 지난번의 그 언데드를 소환할 생각인가?”
“잘 아네.”
온갖 쎈 척은 다했지만, 카이는 정말 자신이 한계까지 왔음을 깨달았다.
‘스테미너 회복 속도가 너무 느려. 아야나의 특제 포션으로도 이 정도라니.’
검 한 번 휘두를 때도, 공격을 회피할 때도 몸이 한 박자 느리게 움직이는 게 느껴질 정도다.
‘나이트 오브 나이트메어…… 대중에 이렇게 공개하긴 싫었지만. 여기서 질 수는 없어.’
여기서 패배하는 자는 정말 모든 걸 잃는다.
물론, 혹자는 지금 자신이 지더라도 괜찮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무려 타이탄 길드와 1인 전쟁을 펼쳐서 190명을 죽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떻게 보면, 개인이 아무리 강해도 결국 10대 길드의 아성은 넘을 수 없다는 것과 같다.
‘이제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보여줄 수 있다.’
개인도 집단을 이길 수 있다는 걸.
사회의 시스템이 부패했을 경우, 개인이 그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여 쳐부술 수 있다는 걸.
‘나를 건드리면 그것이 누구라 해도, 같은 전철을 밟게 된다는 걸.’
세상 사람들에게 말해줄 수 있게 된다.
때문에 카이는 지친 왼팔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나이트 오브 나이트메어.”
예전과 마찬가지로, 반지에서 보랏빛이 반짝거리더니 구름과 같은 어둠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
뿜어져 나오던 연기는 빠르게 사라져갔다.
“……?!”
이에 당황한 카이가 다시 한 번 나이트 오브 나이트메어를 사용했다.
[재사용 대기시간이 23시간 59분 55초 남았습니다.]
‘스킬은 확실히 사용된 것이 맞는데?’
그런데 응당 있어야 할 스켈레톤 나이트들이 보이지 않는다.
한껏 당황한 카이에게 샌지가 창을 빙빙 돌리면서 다가왔다.
“스스로에게 자신을 가질 만해. 나 같아도 너 정도의 실력이 있다면 가질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말이다. 본인이 뛰어나다고 남들을 바보 멍청이로 보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샌지를 필두로 9명의 랭커들이 카이의 사방을 원형으로 에워쌌다.
“그 말은……?”
“지난번에 듀라한 군대에 그렇게 당해놓고 여태까지 그에 대한 대비를 안 했으면 세계 10대 길드 같은 자리는 진작 누군가에게 내줬겠지.”
“대체 무슨 수를?”
“훗.”
샌지가 자신의 앞섬을 열더니 목걸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순도 높은 화이트 크리스탈로 조각되어 있는 정교한 목걸이였다.
“고대 신의 눈물이라는 목걸이다. 사용자의 반경 50미터 이내엔 그 어떤 언데드도 접근할 수 없어. 그건 소환 또한 마찬가지다. 물론 네임드나 보스 몬스터들에겐 효과가 없었지만…… 아쉽게도 네놈의 스켈레톤 나이트들은 그 정도 급이 아니잖아, 안 그래?”
“…….”
완벽하게 할 말을 잃어버린 카이가 입술을 꾹 깨물자, 샌지가 두 손으로 창대를 쥐며 자세를 취했다.
“자, 혼자서 멋있는 장면 많이 땄으니 이제 우리 길드 멋있는 장면도 따줘야지?”
“할 말이 없어서 그런지 입을 꾹 다물었군.”
“이것이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의 결말이다. 애송이.”
랭커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카이가 이마를 문지르면서 입을 열었다.
“이봐요, 시청자 여러분. 내가 나중에 다시 방송 켤게. 그럼 안녕.”
짤막한 말을 남기고 방송을 꺼버리는 카이.
방송을 켤 때도 뜬금없었지만, 끌 때는 더욱 뜬금없었다.
“…….”
“…….”
“아니, 우리 멋있는 장면도 좀…….”
벙찐 표정으로 입만 멍하니 벌리는 타이탄의 랭커들!
“멍청한 자식들. 비켜봐라.”
골리앗이 그들의 어깨를 밀어내며 카이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무력해보이는 카이를 쳐다보며 웃었다.
“네놈도 정말 웃기는군. 네놈이 방송을 켤 수 있으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걸 왜 모르지?”
“안 하는 게 좋을 텐데.”
“천하의 언노운이 내 발바닥에 깔려 죽는 모습인데, 안 할 수가 있나.”
“아냐. 정말 너 생각해서 하는 소리야.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검을 조용히 검집에 집어넣은 카이가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후우…… 스탯 아까워서 이건 진짜 최후의 순간 아니면 쓰기 싫었는데…….”
나이트 오브 나이트메어가 막혔고, 스테미너도 바닥이다.
5초 동안 무적 상태가 되는 불사의 무적 스킬이 있긴 하지만, 5초 만에 랭커 10명을 죽일 자신은 없었다.
결국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최후의 수단 하나뿐.
카이는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표정을 짓더니 억지로 입을 열었다.
“스킬 사용, 강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