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힐통령 191화
70장 설산(1)
“인간 왕국의 왕이라, 재미있는 단어를 사용하는군. 그대는 누구인가?”
베오르크가 한쪽 손으로 제 턱을 쓰다듬으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에 엘레느는 살포시 웃으며 폴리모프를 해제했다.
그러자 로브 밑으로 드러나는 그녀의 싱싱한 물고기 꼬리!
“……설마 인어족의 일원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베오르크는 물론, 바리탄 남작까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두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각각 달랐다.
‘인어가 왜 이곳에……?’
‘저년이 왜 여기에……?’
잊을 수 없는 엘레느의 얼굴을 쳐다본 바리탄 남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과거의 어느 날, 그녀를 광장에 전시하며 자신의 노예처럼 굴리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것을 확인한 베오르크가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바다의 수호자께서 왕성에 친히 발걸음을 한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물론이옵니다. 그저…… 저는 이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을 뿐이에요.”
엘레느는 조곤조곤. 마치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의 말이 끝났을 때, 베오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대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말이 없음을 알겠다.”
“구, 국왕 폐하! 아, 아니옵니다!”
“무엇이 아니라는거지?”
베오르크의 무감정한 눈동자가 바리탄을 꿰뚫었다.
절대자의 눈빛을 마주한 바리탄은 곧 들통 날 거짓말을 늘어놓지도 못하고 울먹거리기만 했다.
“번복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나 오늘만큼은 나의 말을 정정해야겠군. 이 시간부로 바리탄 자작의 모든 직위를 박탈하고, 그를 국가법 위반의 죄인으로 취급한다.”
“아, 아아아……!”
알현실의 기사들에게 끌려 나가는 바리탄 남작을 쳐다보는 카이의 귓가로 익숙한 알림음이 들렸다.
띠링!
[권선징악 효과가 발동합니다.]
[국법을 위반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던 영주의 작위를 박탈시켰습니다.]
[박탈시킨 영주의 작위는 ‘자작’입니다.]
[선행 스탯이 40 증가합니다.]
[태양 목격자의 효과로 선행 스탯이 20만큼 추가로 상승하였습니다.]
‘좋았어!’
카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바리탄 남작이 승작을 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었다.
‘엘레느의 이야기가 베오르크 국왕의 귀에 들어간다면 확실하게 막을 수 있었지.’
하지만 그는 아쿠에리아에 도착한 순간 생각을 달리했다.
‘가만, 그러고보니 권선징악이라는 효과가 있었지?’
부패한 영주의 작위를 박탈시켰을 때 선행 스탯을 지급하는 시스템!
게다가 작위의 등급에 따라 지급되는 선행 스탯이 다른 것으로 추정되었다.
‘지난 번에 화이트홀에서 남작의 작위를 박탈시켰을 땐 선행 스탯이 25개 들어왔어.’
그렇다면 자작은 어떨까?
카이는 더 큰 보상을 위해 며칠의 수고를 더 들였고, 리버티아에 들러 엘레느까지 데려왔다.
그 결과는 대성공!
‘단번에 선행 스탯이 60이나 상승하다니,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카이는 지난 번에 강림 스킬을 사용하며 그 힘에 전율했다.
동시에 걱정했다.
‘한 번 사용할 때마다 선행 스탯이 20개씩 사라지다니, 장기적으로 봤을 땐 손해야.’
강림 스킬은 자신의 전투력을 제물로 삼아 순간적인 힘을 폭발시키는 행위와도 같았다.
선행 스탯이 아깝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쓸 수밖에 없는 스킬.
때문에 카이는 다짐했다.
‘선행 스탯. 지금부터 악착 같이 선행 스탯을 모아야 해.’
어차피 결과적으로는 나쁜 놈을 처치하는 일이었다.
‘더 극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선 때로 적과 악수를 나눌 수도 있어야지.’
그것이 카이가 바리탄 남작과 함께 웃고 떠들었던 이유!
베오르크는 카이를 가만히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대는 처음부터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었군.”
‘이크.’
역시 정치인들 사이에서 매일을 살아가는 괴물.
카이는 굳이 거짓을 입에 담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는 진실을 꿰뚫어보는 절대자의 눈이 있었으니까.
“예. 맞습니다.”
“왜이지?”
“그야 더 높은 곳에서 떨어져야 더 많이 다칠 것 아닙니까.”
“…….”
카이의 뻔뻔한 대답에 할 말을 잃어버린 베오르크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더 숨겨진 속내가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대는 임무를 잘 완수해 주었다.”
띠링!
[영지 감찰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라시온 왕국 공헌도가 15,000 상승하였습니다.]
[하인드 백작과의 호감도가 상승하였습니다.]
성공적으로 보상을 챙긴 카이가 인사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순간, 베오르크의 목소리가 그를 잡았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지?”
“타르달님께서 설산에 임무가 하나 있다고 하셨습니다.”
“호오. 타르달은 그 임무를 자네에게 맡길 셈인가…….”
두 눈에 이채를 띤 베오르크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중이다. 비단 어둠 추적자의 임무만은 아니지.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결한다면 나 또한 라시온의 국왕으로서 그대에게 감사를 표하겠다.”
[왕의 명령]
난이도 : A-
라시온의 국왕 베오르크는 최근 설산 지역에서 벌어지는 주민들의 실종과 죽음에 크게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면 그에게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퀘스트 보상 : 라시온 왕국 공헌도 20,000, 명성 20,000 상승.
“언제나 그래왔듯,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카이가 다분히 영업적인 미소를 걸치며 방긋방긋 웃었다.
***
엘레느를 리버티아로 돌려보낸 카이는 반가운 얼굴을 마주했다.
“……카이인가?”
바체 댄 블랙.
철혈 기사단의 단장이자 검으로는 극의를 보았다고 알려지는 젊은 괴물.
그는 카이의 달라진 모습에 살짝 놀란 눈치였다.
“모험가들은 신기하군. 그 짧은 시간에 용케도 그 정도 수준까지…….”
혼자 중얼거리던 그가 말을 이었다.
“예전에 했던 약속을 지키러 온 건가.”
예전의 약속.
그것은 훗날 검술에 자신이 생겼을 때 찾아오면 대련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바체와의 대련이라면 나도 얻는 것이 많겠지.’
무려 소드 마스터라고 불리는 이와의 대련이니 당연하다.
하지만 카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훗날을 위해 조금 더 미뤄두겠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 말이 꼭 들어맞았다.
카이는 검술 스킬이 고급 3레벨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바체가 검 한 자루로 행했던 기적을 흉내낼 생각조차 못하는 수준이었다.
‘최소 고급 5레벨. 그 정도는 찍고 바체를 찾아와야 얻는 것이 더욱 클 거야.’
기다림의 미덕을 잘 알고 있는 카이는 절대 조급해하지 않았다.
전 세계의 누구보다 앞서있는 자신이다.
스스로 조급함을 느끼는 바보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흠. 의외로군. 맛있는 사탕이 있다면 먼저 까먹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과거에는 그랬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씨익 웃어 보인 카이가 걸음을 옮기며 그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 그런데 바체 님. 혹시 드레이크나 와이번, 드래곤을 만나보신 적이 있습니까?”
“드레이크와 와이번은 숱하게 만나봤다. 드래곤을 만난 적은 없지만. 그건 왜 묻지?”
“최근 설산 지역에 나타난 몬스터가 그것들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고 해서요.”
“아아. 그 얘기였나. 설마 그 문제를 해결하러 가게 되었나?”
“예.”
카이의 대답에 납득을 마친 바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드레이크는 하늘을 날지 못하지만 강인한 두 다리로 지상을 뛰어다니는 몬스터다. 때때로 불을 뿜어내기도 하고, 비늘도 질겨서 웬만한 실력으로는 검으로도 놈의 피부에 생채기를 내지 못해. 튼튼한 두 다리가 강점인 녀석이지. 반대로 와이번은 두 다리가 볼품없는 대신 날개를 지니고 있다. 하늘을 계속해서 부유하며 불을 쏴대는 녀석은 귀찮기 그지없지. 만약 와이번을 상대한다면 날개를 먼저 자르고, 드레이크를 만나게 된다면 다리부터 공격해라.”
“드래곤을 만난다면요?”
우뚝.
카이의 질문에 몸을 세운 바체가 미간을 찌푸렸다.
“드래곤은 나도 만나본 적이 없지만…… 드레이크와 와이번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존재. 마법의 조종으로 불리는 그들은 신체적인 약점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소문에 의하면 그들의 목에는 비늘이 거꾸로 난 곳이 있다고 칭해지지.”
“역린인가요?”
역린.
용의 목에 거꾸로 나있는 비늘을 의미한다.
동양의 전설에 따르면 용을 길들인 자라 할지라도 이곳을 건드리면 용에게 물려 죽는다.
‘그게 드래곤한테도 있나보네.’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된 카이가 바체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뭐, 제가 생각해도 드래곤을 만나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 만나게 되면 꼭 역린을 찾아서 공격하겠습니다.”
“건투를 빌지.”
바체가 짤막한 응원을 던졌다.
***
“후우, 후우.”
카이가 거친 호흡을 뱉어낼 때마다 하얀 입김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무진장 춥잖아.’
타르달과 만나 임무를 받은 그는 지체 없이 설산 지역으로 떠나왔다.
현재 그가 향하는 곳은 설산의 초입에 있는 한 마을.
텔레포트 게이트도 없는 낙후된 지역으로, 유저들도 잘 찾지 않는 NPC들의 거주지였다.
‘이 옷이라도 없었다면 큰일날 뻔했어.’
현재 카이는 유하린에게 건네받은 트리플 헤드 오우거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물론, 자신의 소환만을 기다리는 블리자드에게도 한 벌을 선물한 상태.
미믹에게도 선물하고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건 무리인 듯싶었다.
‘보통 상태의 미믹은 그냥 몰캉몰캉하니깐.’
슬라임이 어떻게 옷을 입겠는가.
카이는 기뻐하던 블리자드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을이 위치한 곳으로 다가갔다.
“후우.”
마침내 도착한 마을의 입구엔 성채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목책이 망루와 함께 세워져 있었다.
“음? 모험가인가?”
망루에서 경계를 서던 보초 두 명이 카이를 신기한 듯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이런 험지에도 모험가가 오다니. 확실히 모험가들이 강하긴 한가 보군.”
“매우 빠른 속도로 강해진다는 소문이 있었지 않나. 그럴 수도 있지.”
서로 수다를 떨던 그들은 별다른 확인 작업 없이 목책의 문을 열어주었다.
마을로 들어선 카이는 스페셜 칭호로 최초의 마을 방문자를 획득할 수 있었다.
‘효과가 그리 좋지는 않네. 냉기 저항력이 조금 상승하는 정도인가.’
하지만 그 효과만으로도 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은 들었다.
옷에 덕지덕지 뭍은 눈덩이를 털어낸 카이는 가만히 서서 마을을 주욱 둘러보았다.
마을의 이름은 코르도.
검고 단단해 보이는 통나무로 지어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크리스마스 때 주고받는 편지지에 나올 법한 동화 속의 마을처럼 보였다.
“자, 그럼 여기서부터 단서를 찾아야 한다는 건데…….”
언뜻 보기에도 마을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많아봐야 30세대를 넘지 않는 소규모 마을.
집 밖에서 걸어 다니는 마을 사람들은 처음 마주하는 모험가를 경계하고 있었다.
‘우선 저들의 마음에 걸려있는 빗장부터 풀어야 사건에 대한 실마리라도 얻겠어.’
카이는 사람은 몰라도, NPC와의 친화력만큼은 발군인 사나이!
그는 이제는 익숙하게까지 느껴지는 간이 진료소를 즉석에서 열었다.
‘사람은 자신을 치료해 준 이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법.’
카이가 그 생각은 옳다고 느끼는 데에는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