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
힐통령 201화
72장 성혈단(1)
“사실 드워프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건 생각보다 큰 문제가 아니야.”
삼삼오오 모여 밥을 먹는 드워프 아이들을 쳐다보던 카밀라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대지의 신 호른이라는 존재를 알아?”
“아아. 드워프들이 믿는다는 신?”
“……알고 있네? 보통 몰라야 정상인데…… 하긴, 네가 보통 유저는 아니지. 아무튼 알고 있다면 설명이 쉽겠어. 게임에 불과하지만 너도 신을 모시는 입장이니 알고 있겠지? 신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가 무엇이 필요한지.”
“신도.”
카이의 대답에 카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신도. 자신을 믿어주는 이가 없다면 신이라는 존재는 결국 잊혀질 수밖에 없어. 그런 차원에서 볼 때 호른은 축복받은 신이라고 할 수 있지.”
“자신을 믿어주는 신도들이 고정적으로 있으니까?”
“응. 드워프 일족은 기본적으로 모두 호른을 숭상해. 물론 모두가 신관의 길을 걷는 건 아니지만…… 간혹가다 망치를 들기 싫어하는 드워프들도 있으니까. 그들이 걷는 길이 신관의 길이야.”
“드워프 신관이라, 저 아이들 중에도 있나?”
“우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카밀라가 건물들의 사이에 존재하는 조그마한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는 소녀를 가리켰다.
“하지만 알지? 그들의 위치를 찾는다고 이야기가 끝난 건 아니야.”
“뮬딘 교들의 정예가 있다고 했고…… 또 따로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몬스터들의 군대도 있어.”
“몬스터들까지……? 그건 몰랐던 정보네. 하지만 내 생각엔 그것들은 너에게 별 위험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물론.”
카이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지만, 카밀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가 진정으로 조심해야 할 건, 검은 남자야.”
“……검은 남자?”
“드워프들이 이 설산에 새로운 잉가르트를 건설한 건 벌써 200년이 넘었어. 그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사룡 시네라스가 스스로 잉가르트를 발견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뮬딘 교의 조력자인가?”
“그건…… 확신할 수 없어.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남자는 시네라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부렸고, 시네라스는 그의 말을 거역하지 않았어.”
“그 얘기, 확실한 거야?”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확실해.”
사룡 시네라스는 미드 온라인 세계관 내에서도 강력한 강자다.
‘물론 해츨링에 불과하다고는 하지만, 그건 성체 드래곤들과 비교해서 약한 거야.’
사룡은 대다수의 NPC들과 비교하자면 대적할 이가 손에 꼽힐 정도의 강력한 존재.
그런데 그런 녀석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라고?
“이름은? 적대 상태가 되면 머리 위에 이름이 떴을 거 아냐.”
카이의 질문에 카밀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그게 정상이긴 한데…… 아니었어. 그 남자는 드워프들에게 속박 주문을 날리면서도 머리 위에는 물음표만이 떠 있었어.”
“물음표……?”
묘한 기시감에 카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상과의 레벨 차이나, 스탯 수준이 압도적으로 나면 물음표가 뜰 수도 있어.’
카이 본인은 게임을 하면서 그런 경우를 딱 한 번 경험해 봤다.
‘흑마술사 지르칸.’
어떤 의미로는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칭할 수 있는 인물이다.
과정이야 어땠든 그로 인해 태양의 사제로 전직을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르칸은 뮬딘 교와 접점이 없어.’
둘 다 음침하고 나쁜 새끼들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지르칸은 마왕의 부활을 위해 활동하는 마왕군 소속이고, 뮬딘 교는 악신을 신봉하는 사이비다.
‘그렇다면 둘이 손을 잡을 가능성은?’
카이는 그 실낱같은 가능성의 포문을 열어두었다.
‘뮬딘 교는 세상에 혼란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드래곤들에게조차 장려 정책을 펼칠 정도의 교활한 신이야.’
그렇다면 과연 마왕이라고 다를까?
마왕군이야말로 NPC들이 거주하는 이 세계에 가장 큰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세력 중 하나.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겠는데.”
사람마다 직감이라는 것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정말 사소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작은 단서만을 가지고도 진실에 가까운 무언가를 도출해낼 때 말이다.
카이는 지금이 그런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내 불길한 예감은 종종 잘 들어맞는단 말이지.’
만약 자신의 이 불길한 가정이 사실이라면, 상황은 정말 답이 없어진다.
‘나와 뮬딘 교의 호감도는…… 아니, 그 녀석들이 나한테 호감도라고 칭할 만한 게 있긴 하나.’
바닥 밑에 지하가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뮬딘 교와의 관계도는 이미 0을 지나 마이너스로 돌입한 상태였다.
‘적의 적도 친구인 마당에, 동맹 관계의 적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적!
“끄응.”
카이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무르고 있자,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카밀라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시네라스 녀석을 잡았으면 재료 아이템도 나왔겠네?”
“나왔지.”
“하, 한 번만 보여주면 안 돼? 그냥 구경만 할게!”
“구경 정도야 뭐.”
시네라스가 토해낸 전리품들을 보여주자, 카밀라는 거친 숨소리를 뱉어내며 연신 환호성을 질러댔다.
“꺄, 꺄아아악! 이 비늘 좀 봐! 망치를 쥐고 이걸 두드리면 대체 어떤 감촉이 느껴질지……! 앗! 이 뼈는 또 어때? 두드릴 때마다 속이 꽉 차 있는 소리가 나! 이, 이곳이 바로 천국인가?!”
“위치만 보면 지옥에 가까울걸.”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한 카이는 그녀를 쳐다보더니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러고 보니…….”
잉가르트의 드워프들은 사도의 마지막 성물인 성검 프리우스를 보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잉가르트는 멸망한 상태.
‘그럼 프리우스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설상가상으로 성물이 뮬딘 교의 손에 넘어간 상태라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카이는 드워프족의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이 어린이들이 프리우스에 대해 알 리는 없을 것 같고…….’
그나마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소녀는 아까 카밀라가 지목했던 소녀였다.
카이는 곧장 그녀에게 다가갔다.
“안녕?”
“…….”
말없이 가만히 카이를 올려다본 소녀는 이내 다시 고개를 숙였다.
“크흠. 우선 잉가르트에 있었던 비극에는 심심한 유감을 전할게.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내가 드워프 족의 어른들, 네 부모님까지 포함해서 모두 구해올 테니까.”
“……거짓말.”
“거짓말 아닌데? 이 오빠는 보기보다 훠어어어얼씬 강한 사람이야.”
“우리 엄마랑 아빠가 허세로 가득 찬 남자는 상대하지 말랬어요.”
“허, 허세 아닌데…….”
생각보다 성숙한 꼬맹이다.
잠시 고민을 하던 카이는 비장한 표정으로 손을 움직였다.
“쨘. 수도에서만 파는 세계적인 빵집의 케이크야. 보존 마법까지 걸려있어서 갓 구운 것처럼 부드럽고 달콤할걸?”
띠링!
[헬릭이 굉장히 관심 깊은 눈빛으로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 케이크 먹고 싶지 않아?”
무언가 알림이 들린 것 같지만, 이를 쿨하게 무시한 카이는 케이크를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애도 아니고. 됐어요.”
하지만 어린 시크녀를 유혹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미끼!
“흐음.”
슬쩍 고개를 돌려 카밀라가 아직도 시네라스의 뼈와 비늘, 가죽을 향해 침을 뚝뚝 흘리는 것을 목격한 카이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드워프 족의 신관이라며?”
“아저씨도 차림새 보니 신관 같네요.”
“아저씨…….”
의외의 구석에서 상처를 받은 카이는 황급히 정신을 수습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 오빠도 신관이야. 오빠도 신관이야. 중요해서 두 번 말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더 특별해.”
“……세상에서 자신만은 특별하다고 믿는 타입?”
대체 누가 순수해야 할 아이를 이렇게 만든 걸까?
잠시 아이의 부모님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카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착각이 아니야. 나는 사도거든.”
이에 소녀는 멈칫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사도……?”
“그래. 내가 바로 사도야.”
카이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뭔데요?”
“…….”
낭패였다.
하긴, 아무리 신관이라고 하나 일족에 신관이 이 아이 한 명뿐인 것도 아니고.
이렇게나 어린데 사도에 대한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다.
‘끄응. 그럼 프리우스의 행방은…….’
결국 어른 드워프들을 무사히 구출해내야만 알 수 있는 것일까.
옅은 한숨을 내쉰 카이는 마음을 내려놓으며 한결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른다면 됐어. 그러고 보니 우리 서로 자기소개를 안 했네. 내 이름은 카이야.”
“……시드니.”
“오, 예쁜 이름인데?”
“아무 여자한테나 막 그런 소리 하고 다녀요?”
“일단 주변에 여자가 있는지부터 물어봐 주는 게 예의 아닐까? 그리고 넌 여자가 아니고 아이란다.”
카이의 처량한 표정을 안쓰럽게 쳐다보던 시드니는 자신의 무릎을 감싸 안으며 중얼거렸다.
“……아저씨는 친구들 많아요?”
“친구들은 왜?”
“저희 왕국을 공격했던 나쁜 놈들은 친구들이 많대요. 아저씨 혼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무리예요.”
“친구들은 많이 없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
시드니의 걱정 아닌 걱정에 빙그레 미소를 지은 카이는 고개를 돌려 울적한 분위기의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저기 있는 아이들 모두가 한창 뛰어놀아도 모자랄 나이 같은데…….’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지, 아이들은 카밀라가 처음 돌아왔을 때를 제외하면 쉽게 웃음조차 짓지를 않았다.
‘아이들의 입가에 웃음을 찾아주는 건 어른들의 몫이겠지.’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어른은 자신뿐.
결정을 내린 카이는 거침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드니가 슬쩍 고개를 올리며 물었다.
“……아저씨 어디 가요?”
“나쁜 놈들이랑 한바탕 드잡이질하러.”
“친구들도 없다면서요.”
“하하,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시드니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자리를 떠나는 카이에게, 아까부터 조용히 따라다니던 시미즈가 말을 걸었다.
-카이,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뿌리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잊지는 마세요.
“……저의 뿌리요?”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혹시 태양교 본단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하지만 그곳은 얼마 전까지 뮬딘 교에 의해 휘둘리던 곳입니다. 신뢰하기에는 조금…….”
-오히려 그런 과거가 있기 때문에 더욱 믿어도 되는 것 아닐까요?
“무슨 뜻입니까?”
-태양교의 본단은 현 교황인 알버트에 의해 모든 것이 개편되었어요.
“그야 그렇지만…….”
태양교가 발칵 뒤집힌 지도 시간이 제법 흘렀다.
‘그러고 보니 지금쯤이면 완성되었으려나?’
알버트 교황이 자신만을 위해 창설했다는 새로운 무력 단체, 성혈단.
그들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자신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상황이다.
물론 라시온 국왕인 베오르크에게 찾아가면 철혈 기사단을 지원해 줄 테지만…….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해.’
드워프들을 구하면 자신은 그들을 리버티아의 새로운 주민으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베오르크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
지원은 있는 대로 해줬는데 자신의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태양교 쪽이라면 잡음이 들려와도 나의 지위를 통해 충분히 무마시킬 수 있어.’
그렇지 않아도 인어와 엘프들을 계속해서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성혈단이라면 프레이 길드도 소속되어 있을 테니 유저들의 비중이 높겠지.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하지 않을까?’
시미즈의 조언에 따라 마음을 기울인 카이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그녀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결정하셨군요?
“예. 한 번 가보기나 하죠.”
몬스터들의 군대와 뮬딘 교의 정예들, 그리고 정체불명의 검은 남자까지.
그들을 모두 혼자 상대하겠다는 건 가능의 유무를 떠나 지나친 오만이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들을 처치해야 한다면 게릴라전을 해서라도 싸우겠지만…….’
그들에게는 수백의 드워프들이라는 인질이 잡혀 있는 상태였다.
카이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신변을 보호하면서 적들을 일망타진할 필요가 있다는 뜻!
한마디로 현재 카이에게는 전장에서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이 필요했다.
혹은, 부하들이거나.
“신출귀몰.”
카이의 신형이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