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힐통령 202화
72장 성혈단(2)
성혈단
카이가 태양교의 본단에 도착하자 알버트 교황은 버선발로 뛰어나와 그를 맞이했다.
“오오, 카이 님! 연락도 없이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말씀 편하게 하시라니까요.”
“허허, 전 이게 편합니다. 영 마음이 쓰여서요.”
웃는 낯으로 알버트와 짧은 인사를 마친 카이는 방문 목적을 설명해주었다.
“사, 사룡 시네라스를 처치하셨다고요? 정말이지 대단하시군요!”
“당분간은 대외적으로 비밀입니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으으음…… 그나저나 드워프 일족이 뮬딘 교에게 붙잡혔다는건 큰일이군요.”
“그것 때문에 찾아온 것이기도 합니다.”
“음?”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번에 말씀하신 성혈단, 모두 준비됐나요?”
“아, 성혈단…… 끄응, 그게 말입니다…….”
알버트 교황은 카이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성혈단에 소속시킬 성기사들의 인원 편성은 이미 끝났습니다. 모두가 신성 왕국에서 나고 자란, 신앙심이 깊고 실력이 뛰어난 이들뿐이지요. 다만…….”
“잠깐, 잠깐만요. 그럼 성혈단의 단원들은 대부분 이 세계의 주민들이라는 말씁이십니까? 모험가들요?”
“아! 물론 지난번에 말씀하신 미네르바 성녀를 비롯해 프레이라는 세력에 속한 모험가들은 포함시켰습니다. 그들이 전부이긴 하지만요.”
“…….”
그 말은 프레이 길드를 제외하면 모두가 NPC들로 구성되었다는 소리다.
‘내가 너무 낙관적이었나?’
하긴, 조금만 생각해보면 성혈단이 유저들을 위주로 만들어질 리가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애초에 유저들은 접속 시간이 모두 제각각이야. NPC가 그런 이들을 한데 묶어서 단체에 소속시키는 건 아무래도 큰 제약이 따르겠지.’
물론 성혈단의 실력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신앙심이 깊은 성기사들이라.’
한 마디로 태양교 본단에서 차출해낸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이라는 뜻.
그런데 그들에게 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카이의 질문에 알버트 교황은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힘겹게 운을 띄웠다.
“그게…… 태양의 사제를 보필할 무력 집단이니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발생합니다. 최고의 인재, 난다 긴다하던 녀석들만 모아놓다보니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합니다.”
“……자존심? 다들 교에 소속된 성기사들인데도 자존심을 챙기나요?”
“성기사도 기사입니다. 자존심, 자긍심을 중히 여기는 아이들이지요. 물론 헬릭님을 향한 신앙심만은 진심입니다. 때때로 그 믿음이 너무 과해서 문제지만요. 웬만한 고위 사제들이 명령을 내려도 대충대충 듣는 척만 할 녀석들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나이도 있고, 교황이라는 직책이 있다 보니 잘 따라주기는 하지만…….”
알버트는 카이의 앳된 얼굴을 흘깃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녀석들이 카이 님의 말씀을 잘 따를지…… 솔직히 말해서 걱정이 됩니다.”
“흐음. 지금 이 순간에도 드워프들은 끌려가고 있습니다. 한시가 급해요.”
“끄응…… 그럼 어떻게, 성혈단 말고 이번에 새롭게 개편된 태양 기사단을 지원해 드릴까요?”
“태양 기사단이라…….”
지난번에 뮬딘 교의 마수로부터 알버트를 구할 때 본 기억이 있다.
물론 카이가 봤던 것은 그들의 주검뿐이었지만.
“태양 기사단과 성혈단의 무력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우위에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수준으로 따지면 아직은 태양 기사단 쪽이 훨씬 높습니다. 다만, 성혈단에 속한 아이들의 잠재 능력은 뛰어납니다. 개중에는 미래에 일개 단을 이끌어도 될 정도로 뛰어난 성기사들도 있지요.”
“후우. 솔직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렇다면 성혈단 쪽 애들을 컨트롤해 보겠습니다.”
“……이 시점에서 말씀이십니까?”
“어차피 한 번은 해야 될 일이예요. 어쩌면 교단의 주적인 뮬딘 교와의 전투를 통해 길을 들이는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하다못해 새 신발을 사더라도 길을 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아.’
상사가 부하의 능력을 끊임없이 검증하려고 하듯, 부하 또한 상사의 수준을 의심할 줄 안다.
‘그럼 일단 깔끔하게 기부터 죽이고 시작할까.’
이 순간에도 고통을 받을지도 모르는 드워프 일족.
그들을 생각하는 카이의 눈이 매섭게 반짝였다.
***
“갑자기 무슨 일이지?”
“글쎄. 지급 명령이라고 해서 모이긴 했는데…….”
“신기하군. 차출 명령서만 받아봤지. 이렇게 모이는 건 처음이니.”
“그러고보니 서로 얼굴을 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인가.”
하나같이 몸이 좋은 300여 명의 남여 성기사들은 태양교 본단의 제14 연무장에 서있었다.
평균 레벨 350.
레벨만 놓고 본다면 랭킹 1위인 카이보다 높은 이들이 대다수!
당연히 일반 유저들은 함부로 보기는커녕, 우러러보아야 할 수준의 실력자들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들의 얼굴에는 감추지 못하는 자긍심이 철철 넘쳐흘렀다.
‘내가 최고다.’
자신이 최고라는 극강의 자신감.
전설이라 불리던 패트릭의 이름을 자신이 계승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지닌 이들.
성혈단이라 명명된 새로운 무력 집단에 차출된 성기사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구성원들을 살폈다.
그리고는 놀랐다.
‘뭐야. 지난번에 사고 친 것 때문에 좌천된 줄 알았는데…….’
‘이런 녀석들이 대체 어디 숨어 있다가 튀어나온 거지?’
‘……한두 명이 아니야. 심지어 하나같이 수준들이…… 상당해.’
강자는 강자를 알아보는 법.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성기사들은 기세를 끌어올렸다.
‘혹시 오늘 이 자리에 모이라는 게 단장을 뽑기 위함인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단장은 당연히 이 몸의 몫이지.’
‘라테르의 신성이라 불리던 나의 검술 솜씨를 보여줄 절호의 기회가 왔구나.’
교황 성하가 직접 내린 명령에 따라 한자리에 모인 태양교 최고의 엘리트 성기사들!
물론 그 자리에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구석에 찌그러져있는 이들도 있었다.
“……마스터. 아무래도 쟤네가 일반 성기사들 같지는 않죠?”
“예. 본단의 내원을 거닐 때도 저런 수준의 성기사들은 쉽게 볼 수 없었어요.”
프레이 길드의 마스터 미네르바는 자리에 모인 이들의 실력을 가늠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광휘의 성기사, 패트릭이 태양교의 전설적인 존재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직업을 계승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만한 지원을 해줄 정도라고요?’
웬만한 크기의 성 쯤은 가볍게 박살낼 수 있을만한 가공할 전력!
미네르바는 이들을 통솔할 수만 있다면, 바덴 성쯤은 반나절 안에 함락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카이 님이 이런 곳의 단장이라니…….”
“끄응. 그가 강한 건 압니다. 무려 랭킹 1위니까요.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성기사들을 상대하는 건…… 흐음. 잡음이 생기겠군요.”
“그가 이 잡음을 끊어내면 막대한 힘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물론, 끊어내지 못한다면 이 기회는 한여름밤의 꿈처럼 덧없이 사라질 것이다.
길드원 50인을 이끌고 묘한 눈빛으로 상황을 관망하던 미네르바가 돌연 입구 쪽을 바라봤다.
“……저기 오네요.”
“이 자리의 주인공답네요.”
이제는 카이와 제법 안면이 있는 프레이 길드원들은 피식 웃으며 그의 등장을 반겼다.
잠시 후 이 자리에 풍운을 몰고올 남자의 등장이었으니 어찌 기대가 되지 않겠는가.
마치 광고가 끝나고 영화가 시작하기 직전의 고요함이 연무장을 뒤덮었다.
“모두 좋은 하루입니다.”
카이를 대동하고 나타난 알버트 교황이 인사를 건네자, 자리에 있던 모두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췄다.
“허허, 모두 일어나시게.”
교황의 허락이 떨어지자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성기사들은 눈을 반짝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물론, 그가 데려온 모험가에 대한 관심은 끊이질 않았다.
‘저 남자는 누구지?’
‘사내자식이 비실비실하게도 생겼군. 한 대 치면 억 소리 내면서 쓰러지겠어.’
‘저 구석에도 모험가 녀석들이 있던데…… 그들의 동료인가 보군.’
‘흥. 수준 낮은 모험가 놈들이랑 같은 소속이라니. 기분 나쁘군.’
물론 카이를 빠르게 훑은 성기사들은 금세 그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자신들보다 레벨도 낮을 뿐더러, 카이는 사제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기껏해야 새로운 단체의 창설을 기념해 기도문이나 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예상이 깨지는 건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다들 인사하시게. 이 시간 부로 그대들을 이끌 성혈단장, 카이라고 하네.”
인자한 미소를 지은 알버트는 카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것은 모두 연출된 모습이었다.
카이를 대놓고 밀어준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었으니까.
그의 소개를 받아 한 걸음 앞으로 나선 카이는 미묘한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는 기백 명의 성기사들을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피 끓는 청춘들인데?’
성혈단에 소속된 성기사들의 나이 대는 다양했다.
16살짜리 어린아이부터, 많으면 서른 중반까지.
모두 제각각인 인간 군상들이었지만, 그들은 현재 한 마음, 한 뜻을 품고 있었다.
‘이렇게 비실비실한 녀석을 믿고 따르라고?’
‘젠장. 본단이 개편된다기에 기대했더니…… 결국 이전과 마찬가지로군. 이 녀석도 위에서 내려온 낙하산인가?’
‘그럼 그렇지. 한 번 썩은 웅덩이는 스스로 정화될 수 없어.’
능력은 출중하지만 정치력이 부족해 좌천된 성기사들은 금세 관심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약간이나마 기대했던 실낱같던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 사람은 모든 걸 내려놓게 마련이니까.
물론 개중에는 강력하게 반발심을 드러내는 호기로운 이들도 있었다.
척, 척, 척!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성기사들만 무려 140여 명.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카이를 쳐다보는 그들은 마치 발표를 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처럼 알버트의 호명을 기다렸다.
“흐음. 혹시 그를 단장으로 선임한 나의 결정에 불만이…….”
“교황님. 여긴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카이는 앞으로 나서려는 알버트 교황을 제지하며 정중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이 자리를 교황님이 원만하게 풀어주신다고 해도, 결국 같은 일이 반복될거야.’
지금 저들에게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머리 위에 올라타 고삐를 쥐고 있는 이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자신들이 따라도 될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 믿을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한 것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복잡하게 머리 굴릴 필요가 없어.’
오히려 단순하고, 명쾌한 방법이야말로 저들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의 빗장을 여는 순간, 자신은 태양교 최강의 세력을 손에 넣을 수 있을 터.
저벅, 저벅.
걸음을 크게 내딛은 카이는 가장 가까이에서 손을 들고 있는 성기사 한 명을 내려다봤다.
앳된 얼굴의, 아직 소년의 티를 벗어내지 못한 어린 친구였다.
붉어진 얼굴에 떠오른 분하다는 표정은 그의 생각이 어떤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너, 이름은?”
“……라테르의 신성이라 불리던 테페른입니다.”
“내가 단장이 된 것에 굉장한 불만이 있는 표정인데, 맞나?”
“예. 많습니다. 불만.”
“그래. 불만이 있으면 풀어야지.”
우둑, 두두둑.
천천히 목을 돌린 카이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다른 성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무대를 만들어라. 오늘 하루, 내가 성혈단의 단장 직을 맡는 것에 불만이 있는 놈들에게 도전권을 주지. 나를 이기는 놈에게 단장 직을 주겠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덤벼.”
“……!”
“……!”
카이의 돌발적인 언사에 모두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돌았나?’
‘라테르의 신성이라면 나도 이름 정도는 들어봤어. 나이가 어리다고 괄시할 만한 친구가 아닌데?’
‘아니, 어찌어찌 몇 명은 이긴다고 하더라도…….’
‘설마 우리 모두를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건가?’
‘무모하군.’
‘미친놈이거나, 또라이거나. 둘 중 하나겠어.’
뒤로 물러나며 대련장을 만드는 성기사들이 모두 카이의 결정을 안타까워 할 때, 오직 미네르바만이 빙그레 웃었다.
“라즐리, 우리 내기할래요? 어느 쪽이 이길지.”
“좋죠. 그럼 전 카이한테 100골드 걸겠습니다.”
“저는 카이한테 50골드요.”
“아, 난 요즘 장비 바꾸느라 지갑이 다이어트를 해서…… 카이한테 20골드만 걸게요.”
“……뭐예요. 그냥 없던 일로 해요. 이래서야 내기 자체가 성립 안 되잖아요.”
거짓말처럼 한쪽으로만 몰리는 프레이 길드원들의 배팅!
결국 미네르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쉽네요.’
물론, 그녀도 내기를 한다면 카이에게 배팅을 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