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203화 (203/441)

# 203

힐통령 203화

72장 성혈단(3)

태양교 본단에는 총 14개의 연무장이 존재하고 있었다.

태양 기사단처럼 교단의 중추를 맡고 있는 핵심 무력 집단부터, 신성 주문을 다루는 사제들, 혹은 이단 심판관처럼 우대받는 이들은 1번에서 3번까지의 연무장을 사용했다.

한마디로 14개의 연무장 중에서 끄트머리를 사용한다는 건, 교단 내에서 그만큼 단체의 입지가 좁다는 뜻.

때문에 대부분의 성혈단원들은 연락을 받는 순간 희망의 끈을 놓아버렸다.

하지만 이게 웬걸? 막상 연무장에 도착하고 보니 다른 단원들의 면면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 정도 수준의 신설 무력 단체가 14연무장을 배정 받았다고?’

‘지금 내가 파악한 녀석들 중 얼굴을 알고 있는 녀석들만 꼽아도…… 최소 8번 연무장은 사용해야 되는데?’

‘대체 이건 상황이 뭐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그들이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하기도 전, 알버트 교황이 성혈단장이라는 남자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동시에 성혈단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왜 이 정도 수준의 단원들이 모였는데도 14번 연무장을 배정 받았는지 알겠어.’

‘단장이라는 작자가 출신도 알 수 없는 모험가이니 그럴 수밖에.’

‘그나저나 어느 주교의 라인이지? 젊고 모험가인데 단장 직위를 배정받은 건 조금 신기하군.’

납득의 순간은 곧장 자포자기로 이어졌고, 그들은 갑자기 성사된 대결에도 큰 관심을 갖지 못했다.

‘철없는 도련님이 자존심 한 번 세워보겠다고 까불다가 된통 얻어맞겠어.’

‘라테르의 신성을 지목한 건 그나마 가장 어려 보이니까 만만해서겠지?’

‘곧 후회하겠군.’

‘몇 초 만에 결판이 날지 궁금할 지경이야.’

라테르의 신성 테페른.

그는 도시왕국 라테르에 위치한 태양교 지부에서 거둔 고아 중 하나였다.

깊은 신앙심과 천재적인 검술 실력 덕분에 그의 이름은 빠른 속도로 본단까지 들려왔다.

다만, 개편되기 이전의 썩어 있던 본단에서는 실력만으로는 인정을 받는 것이 몹시 힘들었다.

테페른은 그 부조리함을 견디지 못했고, 체제의 순응을 거부했다.

그 결과는 물론 좌천이었다.

성‘기사’인 그가 자존심을 선택한 결과는 참담했다.

‘하루 종일 서류 정리나 하고, 쓰레기 청소나 해야 했지.’

하지만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스스로가 성기사로써, 떳떳한 선택을 했다는 자긍심이 있었으니까.

때문에 부패한 주교, 사제들이 모조리 잘려나가고, 본단이 개편되었다는 소문이 들렸을 때 그는 몹시 큰 기대를 했었다.

‘알버트 교황님은 이 본단에서 유일하게 내가 존경하는 분. 그분이 감춰놨던 칼을 빼드셨다.’

그의 칼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칼이 몹시 날카롭고 매서워서, 본단을 장악했던 부패한 주교들을 소탕할 정도가 된다는 것만을 유추했을 뿐.

‘그런데 그 결과가 이거라니…….’

결국 권력을 얻게 되면 사람은 모두 같아지는 것일까.

테페른은 알버트 교황을 잠시 원망스러운 눈빛을 쳐다보다가, 검집에 손을 올렸다.

“경고 드리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물러나십시오. 부상자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부상자가 카이를 지칭하고 있다는 건 그 자리의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심지어 테페른의 그 말은 절대 허세 따위가 아니었다.

신성(新星).

태양교의 새로운 별이라고까지 불리던 어린 천재의 진심어린 경고였을 뿐.

“부상자는 나오지 않아. 내가 적당히 봐주면서 할 테니까.”

카이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매가 약인 놈이군.’

‘뭐, 기분도 꿀꿀한데 나쁘지 않아.’

‘어느 정도 교육이 필요한 녀석이야.’

항상 일을 치루기 전, 참을 인(忍)을 세 번 되새기는 테페른조차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본인의 선택이니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시길.”

“물론.”

테페른이 검을 빼들자 카이는 검 손잡이 위에 슬쩍 손을 올려놓으며 생각했다.

‘나, 미움 많이 받네.’

카이는 무심한 표정으로 연무장의 성혈단원들을 스윽 쳐다봤다.

하나같이 곱지 못한 시선들 뿐.

우호적인 시선이라고는 구석의 프레이 길드원들이 전부였다.

‘태양교 본단에서 이런 눈빛을 받아보게 될 줄이야.’

하지만 저들의 태도도 이해는 간다.

눈앞의 성혈단원들은 모두 출신도 미비하고, 뒷배도 없는, 말 그대로 실력이 전부인 녀석들.

알버트에게 성혈단이 어떤 녀석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들었을 때, 오히려 카이가 부탁했다.

“연무장은 14번으로 해주십시오.”

“예? 1번 연무장을 비워놨습니다. 굳이 왜 14번 연무장을……?”

“태양교 본단이 너무 갑작스럽게 바뀌었으니까요.”

태양교 본단은 개편되어 다시 교단 특유의 맑고 깨끗함을 되찾았다.

하지만 과연 사람들의 인식은?

이번 개편은 과연 신도들의 의심까지 깨끗하게 씻어냈을까?

‘그럴 리가.’

사람은 항상 의심하고, 의심한다.

백 번 진실을 속삭여도, 단 한 번의 거짓을 속삭인다면 사람들은 그의 말을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알려줘야지.’

새로운 태양교의 모습을 그들의 눈과 귀, 피부와 뼈에 새겨주는 것.

그것이 카이가 성혈단의 연무장을 14번을 선택한 이유이며, 이 대련을 시작한 이유였다.

“그럼 먼저 갈까요? 단장님이니, 제 공격을 세 번 정도는 받아주시겠지요.”

테페른이 검끝을 흔들며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물었다.

그러자 연무장의 밖에서 그들을 구경하던 성혈단원들은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참았다.

‘테페른, 짓궂은 녀석이군.’

‘물론 대련을 할 때는 상급자가 하수에게 세 번의 공격을 양보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저 녀석은 직함만 단장이지, 아무리 봐도 나보다 약해 보인다고.’

한마디로 현재 테페른은 일반적인 대련 룰을 이용하여 카이를 비꼬고 있는 것이었다.

나의 검을 세 번이나 받아낼 수 있겠느냐고.

물론 카이는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오히려 그는 한 술을 더 뜨며 흔쾌히 말했다.

“선공 기회는 다섯 번 주지.”

“……진심이십니까?”

웃음기를 싹 지운 테페른은 정색을 하며 딱딱한 낯빛으로 물었다.

청소를 해도 좋았고, 쓰레기를 치워도 좋았다.

하지만 자신이 검을 들었을 때, 자신의 검을 모욕하는 것은 기사로써의 수치였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테페른의 눈이 한층 더 깊어졌다.

‘눈빛 좋은 걸.’

입꼬리를 슬쩍 들어 올린 카이는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것이 신호가 되어 테페른의 신형이 빛살처럼 앞으로 튀어나왔다.

‘알버트 교황님의 얼굴을 봐서 적당히 해주려고 했지만……!’

자신의 검, 자신의 노력을 우습게 여기고 무시한 자를 용서할 수는 없다.

테페른은 검의 옆면으로 카이의 옆구리를 박살 내려고 했다.

‘아마 두 달 정도는 요양해야 할 거다. 아, 모험가라서 그렇지도 않으려나.’

그는 자신의 검에 얻어맞은 카이가 연무장 저 편으로 날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때문에,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는 순간 테페른의 머리는 의문으로 가득 찼다.

“어?”

이게 무슨…….

뒷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테페른은 전신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고통에 비명을 토해냈다.

“커헉!”

이런 고통을 느껴보는 게 얼마만인지!

눈만 멀뚱멀뚱 뜨던 테페른이 쓰라린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카이를 쳐다봤다.

“이제 네 번.”

까딱까딱.

테페른은 아까처럼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는 카이를 더 이상 무시할 수가 없었다.

***

“…….”

“…….”

“…….”

정적.

고요하며 괴괴하다는 뜻으로, 이 상황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커허억……!”

거구의 사내, 데크가 눈을 까뒤집으며 넘어가자 카이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전에 64번이나 뱉어냈던 말을 다시 한 번 뱉어냈다.

“다음.”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소리만이 연무장을 떠다녔다.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만 부릅 뜬 성혈단원들은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게 대체…….’

‘말이 돼?’

라페르의 신성을 포함한 63명의 성기사들은 카이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오히려 비실비실하게 보였던 카이는 결투에 돌입하는 순간, 전장의 화신과도 같은 위압감을 뿜어내며 그들을 상대했다.

‘64명을 상대하는 것도 놀라운데…….’

‘그것도 휴식 시간도 없는 스트레이트! 대체 스테미너가 얼마나 괴물인거지?’

‘저 남자의 수준이 형편 없었던 게 아니다…….’

‘눈! 우리들의 눈이 썩은 동태마냥 형편없었을 뿐이야!’

더 이상의 도전자는 나오지 않았다.

이미 카이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전투 실력은 충분히 보임으로써 증명했다.

자신이 이 무리를 통솔할 자격이 있음을.

‘나쁘지 않아.’

한 점 흐트러지 않은 숨을 가볍게 뱉어낸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 야금야금 스페셜 칭호를 모아놓은 효과가 이렇게 발휘하는구나.’

카이는 슬쩍 시선을 내려 자신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스페셜 칭호들의 효과를 확인했다.

[용맹한 전사 :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적을 상대할 시, 모든 스탯이 10만큼 상승합니다.]

[전장의 사신 : 적을 공격할 때마다 일정 수준의 스테미너를 회복.]

[최초의 용살자(龍殺者) : 사용자는 항시 드래곤 피어를 두르게 됩니다.]

현재 성혈단원들에 소속된 NPC들의 레벨은 한 명도 빠짐없이 카이보다 높다.

‘프레이 길드원들 때문에 평균 레벨은 조금 깎이지만 말이지.’

한마디로 그들과 대련이 시작되어 적대 상태가 되면 용맹한 전사는 어김없이 발산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타이탄 길드를 홀로 박살 내고 얻은 칭호, 전장의 사신은 지금처럼 1대 다수의 대결에서 절대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효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공격을 성공할 때마다 스테미너가 올라. 하지만…….’

전장의 사신에는 표기되지 않은 숨겨진 효과가 부가적으로 숨어 있었다.

띠링!

[라테르의 신성, 테페른과의 결투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전장의 사신 효과로 전체 스테미너의 15%가 회복됩니다.]

바로 승리.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머쥐면 전체 스테미너가 매우 큰 폭으로 회복되었다.

‘이건 아마 적을 죽일 때도 마찬가지겠지.’

전장의 사신 효과만 있다면, 자신은 이제 사냥이나 레이드, 전쟁에서 지칠 일이 없다는 소리.

‘이것이 한때 과학자들이 주장하던 무한동력이라는 건가?’

절대로 체력이 떨어지지 않는 파괴전차!

카이는 아무 말 없이 연무장을 스윽 돌아보았다.

그런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도 드래곤의 피어와 같은 힘이 깃들어 있었다.

“으음…….”

“큼큼.”

자연스레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피하는 성혈단원들!

그들 모두 강자들인지라 드래곤의 피어에는 어느 정도 저항을 할 수 있을 터.

하지만 눈앞에서 압도적인 강함을 보여준 터라 이미 정신력이 크게 붕괴된 상태였다.

때문에 공포를 느끼지는 않을지언정, 그들은 카이의 모습에서 절대자의 면모를 보았다.

‘이토록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뽐내지도 않을 뿐더러, 오만하지도 않아.’

‘가벼운 입으로 상황을 넘기려고 하지도 않고, 리더처럼 묵묵하게 자신의 실력을 입증할 뿐.’

‘우리의 눈이 잘못되었음을 탓하지 않는 대인배의 기질 또한 엿보인다.’

원래 사람이란 한 번 콩깍지가 쓰이면 단점조차 좋게 보이기 마련!

성혈단원들은 카이에게서 따르고 싶은 리더의 모습을 하나씩 찾아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도전할 사람은?”

카이의 물음에 성혈단원들은 침묵을 고수했다.

그러기를 잠시, 정신을 차리고 뒤에서 쉬고 있던 테페른이 연무장 위로 올라왔다.

“호오. 재도전인가?”

“아뇨. 그게 아닙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인 테페른이 쿵! 소리가 날 정도로 한 쪽 무릎을 강하게 찍었다.

그 충격에 연무장의 바닥에 실금이 생길 정도.

“단장의 수준을 알아보지 못하고, 겁도 없이 덤벼들었든 저의 부족함을 탓해주십시오! 앞으로 군말 없이 믿고 따르겠습니다!”

테페른을 시작으로 300여 명의 성혈단원들이 차례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제 가슴이 주먹을 가져다대며 존경의 표시를 띄웠다.

“…….”

카이를 원형으로 둘러싼 성혈단원 300여명의 맹세!

가슴이 벅차오를 것 같은 그 모습에 미소를 지은 카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서럽고 억울했을 것이다. 부조리함과 싸우고 싶었으나 지닌바 힘이 부족했을 것이고, 하소연을 하고 싶었으나 마땅히 말을 들어줄 이가 없었을 테지.”

“…….”

조용하게 시작된 카이의 말은 성혈단원들의 가슴 속 깊이 담겨 있던 감정을 툭툭 건드렸다.

조곤조곤하게,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야말로 사람과 친해질 수 있는 최고의 화법!

‘고아원에 봉사활동 갔을 때 애들이랑 친해지려면, 녀석들을 ‘이해’해 주는 게 가장 중요했지.’

그들이 왜 힘든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를 깨닫고 진심으로 공감해주는 것!

그것이 카이. 한정우가 사람에게 다가갈 때 가장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조용조용하던 카이의 목소리가 성난 황소의 그것처럼 돌변했다.

“개편된 태양교는 부정, 부패를 멀리하고, 개개인의 실력과 신앙심만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설 수 있는 맑고 투명한 세력이 될 것이다. 썩어문드러진 부분을 과감하게 잘라낸 태양교의 새로운 시작은 우리 성혈단이 짊어지게 될 것이다.”

“아아……!”

“성혈단은 약자들의 검과 울타리가 될 것이며, 부패한 자들의 목덜미를 노리는 차가운 비수가 되어 대륙 전역에서 활동할 것이다. 성혈단의 일부가 되어 태양신 헬릭의 가르침을 이 땅에 전파하고자 하는 자는 남고, 싫은 자는 떠나라.”

카이는 고개를 돌리며 성혈단원 한 명 한 명과 천천히 시선을 마주쳤다.

띠링!

[테페른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데크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살라딘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뒤타로스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

…….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떠오르는 알림 폭탄!

카이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그럼 지금 바로 성혈단에게 첫 번째 임무를 내리겠다.”

물론 그 임무의 내용은 간단했다.

‘드워프 구출 작전.’

성혈단이라는 날카로운 검을 손에 넣은 카이는 매력적인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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