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
힐통령 214화
75장 성스러운 검(3)
“카룬달 님. 이제 바로 돌아가면 되겠습니까?”
드워프 일족의 상태를 슬쩍 확인한 카이가 물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식구들을 돌아본 카룬달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네. 이 끔찍한 곳에서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으니.”
“하하. 갇혀계신다고 고생이 많으셨나 봅니다.”
“고생이라고 할 것은 딱히 없었네. 갇혀있는 시간은 오히려 편했지. 다만 작업 시간에…….”
무언가를 말하려던 카룬달이 돌연 말끝을 흐렸다.
‘음?’
카이는 그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무언가 말하기를 꺼려하거나, 두려워하는 표정.
이런 상태에 빠진 사람은 집요하게 캐물으면 오히려 멀리 도망가 버린다.
‘차라리 공감을 해주면서 스스로 입을 열게 만들어야 하지.’
괴롭힘을 당하던 친구들을 위로해주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
카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달래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해합니다. 많이 두려우셨죠? 하지만 이제 괜찮습니다. 사도인 제가 왔으니까요.”
“……자네, 설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고 있는 건가?”
“모를 수가 없지요.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아보지 않을 정도로 미숙하지는 않습니다.”
“허어, 그렇게까지 말해주니 고마워서 뭐라 할 말이 없군…… 그럼 전부 알고도 왔다는 것 아닌가?”
카룬달이 감격한 표정으로 카이를 쳐다봤다.
‘이렇게까지 감격할 일이라고? 그렇다는 건…….’
카이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가 알기로 드워프들은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한 존재들이다.
오죽하면 사룡이 잉가르트를 침공했을 때도, 항복은커녕 저들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무기를 들었던 일족이 아닌가?
‘심지어 카룬달은 그런 이들을 이끄는 왕이야. 아무리 강력한 무력으로 겁을 준다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안 했겠지.’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두렵게 만든 것일까?
카이는 그들의 지난 행동에서 그에 대한 힌트를 찾아낼 수 있었다.
‘역시 아이들인가.’
그들은 왕국이 침공 당하는 와중에도 아이들을 먼저 내보냈다.
게다가 카이가 이곳에 처음 도착해 자기소개를 했을 때도, 아이들의 안위를 먼저 물어보았다.
예로부터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다.
아무리 남녀 구분이 없는 드워프들이라 해도, 그건 똑같은 모양.
‘그렇다면 카룬달을 두렵게 하는 것은 훗날 자신의 아이들에게 위협이 될 만한 존재겠지.’
생각은 여기까지.
카이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생각할수록 큰일이군요. 이대로 두면 아이들의 미래가 어두워질 것이 뻔한데 말입니다.”
“……동감일세. 하지만 제단에는 부활 의식을 진행 중인 추종자들이 몇이나 있네. 아무리 자네라고 해도 맞서는 건 무리겠지.”
‘제단? 부활 의식? 추종자? 가만 있어봐…….’
마치 퍼즐 조각 같은 단서들이 머릿속에서 차례차례 맞춰진다.
카이는 그 동떨어진 파편들을 끼워 맞추는 순간, 머릿속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왕! 카룬달은 마왕의 부활을 위한 제단에 끌려간 거야. 추종자들은 틀림없이 마왕 추종자들일 터…….’
그렇다는 말은 이곳이 마왕의 부활 제단과 연결된 장소라는 소리.
‘젠장. 진짜 빨리 자리를 떠야겠는데?’
카이는 던전을 클리어하고 생성된 포탈을 통해 성혈단과 드워프들부터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카룬달이 그런 곳에 끌려간 걸까 아까 분명 작업 시간이라고 했는데.’
마왕 추종자들이 드워프에게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었으니 죽이지 않고 데려왔을 터.
그리고 정황상 그들은 드워프들이 무언가를 만들어주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카이는 다시 한 번 카룬달을 떠보았다.
“그런데 마왕 추종자들이 카룬달 님을 제단에 데려간 이유는 뭡니까? 혹시 뭔가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던가요?”
카이가 직접적으로 마왕 추종자들의 존재를 입에 담자, 카룬달은 한결 편안해진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카이의 눈앞으로도 메시지가 떠올랐다.
[카룬달이 당신을 의지하기 시작합니다.]
[카룬달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협상 스킬의 효과로 인해 카룬달의 심리 상태가 표시됩니다.]
[카룬달 : 불안, 공포, 의지, ???.]
카이는 예전에 협상 스킬의 레벨이 올랐을 때부터 NPC의 기분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메시지 창이 말하는 것처럼, 카룬달은 카이를 의지하는 듯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제단은 몹시 낡아 있었네. 그들은 혹여 의식이 실패할까싶어 새로운 제단을 만들 것을 요구했지.”
“설마 만들어주셨습니까?”
“이곳에 도착한 건 불과 하루째야. 그럴 시간도 없었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자신의 부모님들이 마왕의 부활에 일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이들이 많이 슬퍼했을 거예요.”
아이들을 들먹이자 카룬달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평생의 수치를 껴안을 뻔 했네. 그래……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런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지.”
“아닙니다. 굳이 제가 오지 않았더라도 카룬달 님과 드워프 일족은 그릇된 선택을 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캐낼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캐낸 뒤, 자존감을 올려준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화술!
띠링!
[교묘한 화술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취득했습니다.]
[화술 스킬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카룬달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챙길 것은 모두 챙겼다.
성혈단원들과 드워프 일족은 몇 명을 제외하고 모두 포탈 건너로 넘어간 상태.
“카이 님. 그럼 저희도 건너가 볼게요.”
“예. 금방 가겠습니다.”
미네르바를 필두로 마지막까지 곁을 지키던 프레이 길드도 포탈을 건넜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카이가 카룬달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저희도 건너갈까요? 먼저 들어가시죠.”
“고맙네. 오늘의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하겠네. 드워프들은 절대 은원을 잊지 않아.”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기대되는데요?”
카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카룬달과 함께 포탈로 걸어가는 순간, 머리맡에서 스파크가 일어났다.
‘스파크?’
파지지직.
마치 점착된 폭탄의 도화선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소리.
머릿 속에서 울리는 경종이 카이를 행동하게 만들었다.
“카룬달 님!”
순식간에 카룬달을 감싸고, 옆으로 크게 물러나면서 성스러운 방어막을 몇 겹이나 시전했다.
결과적으로 그 행동으로 인해 죽음의 사신은 한 걸음 멀어졌다.
“정말이지. 눈치 하나는 비상하신 분이군요.”
지르칸.
아까와 마찬가지로 전신을 흑의로 뒤덮고 있는 녀석은 허공을 부유한 채, 붉은 눈동자를 드러내며 보스 룸을 훑었다.
“……정말 죽었네요.”
잠깐이지만 루시퍼의 시체를 주시하던 그는 곧 흥미를 잃은 듯 시선을 거두었다.
“뭐, 애초에 역겹고 무능력한 천사종 아니겠습니까. 마왕의 피를 머금었다고는 하나 솔직히 별 기대도 없었습니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머저리이기도 했고. 이른바 실패작이죠.”
녀석의 말을 들어주면서, 카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카룬달만 어떻게든 포탈로 내보내면…….’
아니, 설령 보내지 못해도 시미즈의 절대수호영역을 사용하면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지르칸이다.
‘애초에 지르칸은 흑마법사야. 방어력 자체가 높지 않은 직업이지.’
흑마법사의 방어력 자체는 모든 클래스를 통틀어 사제와 버금갈 정도로 허약한 편이다.
그 대신 주문력은 흔히 마법사라 부르는 백마법사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다만 긴 시전 시간은 둘째치고 흑탑에서 정기적으로 내려오는 퀘스트는 대부분 어렵다.
‘쉽게 말하면 돈이 많이 드는 퀘스트만 주지.’
한 마디로 유저들 중에서는 금수저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흑마법사.
심지어 그 고생을 해도 폐쇄성이 짙은 흑탑은 모험가를 반기지 않는다.
육성도 힘들고, 대우도 별로.
게다가 백마법사가 딱히 모자란 직업도 아니었기에 유저들의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지르칸은 흑마법사야. 하지만 네크로맨시 트리를 탄 것 같지는 않은데.’
실제로 아까 전에 그가 지휘한 몬스터들은 언데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싸워야 하나?’
그와의 일대일 대결이라면.
게다가 자신이 보호해야 할 NPC들도 없고, 그마저도 완벽하게 지켜줄 수 있는 상황이라면.
‘해볼 만해.’
카이는 지금 당장 싸움이 일어나도 할 만하다고 판단했다.
물론 싸우지 않고 서로 갈 길을 가는 것이 최고지만, 딱히 주눅들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할 말은 그게 끝이야?”
“……지금 저를 도발하시는 겁니까?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내가 뭘 했다고 도발이야?”
“흐음. 역시 당신은 다른 모험가들과는 다르군요. 절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내가 두려워해? 너를?”
카이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글쎄. 솔직히 말하면 너는 나에게 은인이나 다름없거든.”
“……무슨 소리죠?”
지르칸이 불쾌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적이나 다름없는 상대가 자신은 은인이라 칭하다니?
‘마치 나를 알고 있다는 말투…… 기분 나쁘군요.’
지르칸의 주변으로 칠흑의 구가 몇 개나 생성되었다.
그것들은 곧장이라도 카이를 향해 쇄도할 것처럼 이글거리며 어둠을 피워냈다.
“무슨 소리겠어.”
카이는 사막의 따가운 태양의 피하기 위해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동시에 지르칸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당신은…….”
마법사들은 대개 머리가 좋다.
애초에 머리가 나쁘면 입문조차 힘든 학문이 바로 마법.
그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최상위 존재가 되었다는 건 머리가 비상하다는 뜻이다.
그 때문인지 지르칸은 카이의 얼굴을 보고 단숨에 그를 기억해 냈다.
“맙소사. 설마 당신, 프리카 마을의 그 애송이 신관, 카이입니까?”
“와, 이름까지 기억해? 솔직히 이건 좀 감동인데.”
“마. 말도 안 되는…….”
지르칸은 카이가 박수를 치며 자신의 기억력을 칭찬하던 말던,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1년 반 정도밖에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이만큼이나 성장을 했다고요? 그때 그 풋내기가?’
모험가들의 성장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지르칸도 알고 있다.
자신을 귀찮게 하는 이들을 몇 명이나 죽여봤기에 모를 리가 없다.
매일매일 강해지는 그들은 며칠 뒤에 보면 훌쩍 강해져 있게 마련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속도는 비정상적입니다.’
1년 반 만에 자신의 마기를 버텨낼 정도까지 성장할 줄이야.
그 말은, 과장을 조금 더 보태면 자신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수준에 올라섰다는 소리다.
‘위험 요소.’
지르칸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2년도 안 되는 시간에 이렇게 눈부신 성장을 이뤄낸 녀석이다.
만약 앞으로 2년이라는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아니, 하다못해 1년. 혹은 반년이라는 시간만 더 주어진다면?
‘그때는 제 힘으로 막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문제가 된다.
그것도 아주 큰 문제가 된다.
‘제 실력은 추종자들 사이에서도 상위권. 그런 제가 막을 수 없다는 건…….’
마왕 추종자 세력이 약간이나마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뜻이다.
지르칸은 싹이 자라기 전, 미리 밟아놓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카이의 재능을 높이 샀기에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혹시 저희와 함께 앙골 모아 님을 부활시켜 대륙을 공포로 지배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없는데.”
“…….”
단 1초의 고민조차 없이 단칼에 거절하는 카이!
그 모양새는 마치 길을 걷다가 만난 사이비 신도에게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사람과도 같았다.
하지만 지르칸은 카이가 그럴 것이라고 예상을 하고 있었는지,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아쉽군요. 조금만 더 모자란 모습을 보여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뭐?”
“오늘의 죽음을 교훈 삼아 깨달으십시오. 때로는 너무 뛰어난 것이 독이 된다는 사실을요. 튀어나온 돌부리가 가장 먼저 매를 맞는 법입니다.”
우우우우웅.
던전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르칸의 눈치를 살피던 카이가 카룬달에게 은밀히 속삭였다.
“카룬달. 제가 신호주면 포탈로 뛰어요.”
“괘, 괜찮겠는가? 그럼 자네는…….”
카룬달은 감동과 걱정이 한데 섞인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에 카이는 누가봐도 듬직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당당히 폈다.
“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의 축복을 받…….”
“아, 우선 번거로운 포탈부터 치우고 시작할까요.”
콰아아앙!
지르칸의 마법 한 방에 깨끗하게 파괴되는 포탈!
그는 허망한 표정을 짓는 카이를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자, 매 맞으실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