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222화 (222/441)

# 222

힐통령 222화

77장 구원 투수(1)

“어릴 때부터 함께 살았다는 조그마한 정. 그게 방금 전 당신의 목숨을 살렸어.”

“히, 히익…….”

소라는 이래 봬도 코르도 마을 제일의 전사.

그의 기세에 눌린 마을 주민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연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머리끝까지 화가 난 주민들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이이…… 이놈이 감히 무기를 겨눠?”

“미안한 마음 때문에 오냐오냐 해줬더니 머리끝까지 기어오르는구나!”

“부모도 없는 고아 새끼들을 그렇게나 신경 써줬거늘,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으려 들어?”

“마을의 제일가는 전사라고 해도, 이 머릿수를 상대로 싸움을 걸다니. 정녕 미친 게로군.”

순식간에 험악해지는 분위기.

하지만 그 상황은 옆에서 지켜보던 카이에게는 희극이나 다름없었다.

‘재미있네.’

마을 주민들의 행태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헛웃음이 실실 흘러나올 정도다.

‘내가 보기엔 주민들이 화를 낼 입장이 안 되는데 말이야.’

가끔 이런 식으로 본인의 위치를 망각하는 이들이 있다.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말 몇 마디로 그것을 무마하려는 자들.

신기하게도 그런 자들은 똑같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바로 자신들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으면 도리어 화를 낸다는 점이지.’

자신이 자존심까지 버리면서 사과를 했는데 왜 안 받아주느냐.

그것이 저런 종류의 가해자들이 내세우는 공통적인 주장이다.

‘웃긴 놈들이라니까.’

피해자의 마음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

가해자가 툭 던진 말조차 피해자의 가슴 속 응어리가 되어 평생을 가는 법이다.

‘하긴, 그걸 알 만한 사람이라면 저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지.’

카이는 한 발자국 물러선 채 상황을 관망했다.

“후우.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더 이상 대화로 풀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게 되자, 마을 촌장은 뒤로 물러나면서 말을 이었다.

“어렸을 적 돌아가신 너희 부모님의 얼굴을 봐서 최대한 좋게 해결하려고 했지만…… 너희의 뜻이 완강하니 어쩔 수 없구나.”

말을 마친 그는 뒤쪽을 바라보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럼 위대한 전사분들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쯧. 그러게 처음부터 무력을 쓴다고 했거늘. 귀중한 시간만 버렸잖으냐.”

“죄, 죄송합니다.”

여우의 가면을 뒤집어쓴 근육질의 전사 두 명이 인파를 가르며 나타났다.

춥디 추운 설산에서도 팔뚝을 훤히 드러낸 변태들.

하지만 루나와 소라는 그들을 보는 순간 웃기는커녕,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가, 가면을 쓰고 있는 전사라면…….”

“지배자 일족!”

루나는 곧장 촌장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당신! 설마 이자들에게 저희를……?”

“오해하지는 말거라. 지배자께서 먼저 명령을 내리셨다. 사룡의 저주가 하루아침에 모두 사라졌으니, 사태 파악을 위해 낙인이 찍혀 있던 자들을 모두 데려오라고.”

“어찌됐든 우리를 팔아넘겼다는 소리잖아요!”

“……대화로 좋게 설득하려고 했는데 그 기회를 먼저 걷어찬 건 너희였다.”

“어떻게…… 어떻게 우리에게 이럴 수가……!”

루나와 소라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촌장을 노려봤다.

“흐음. 저 여자인가? 사룡의 저주를 받았다는 여자가.”

“예, 그렇습니다.”

“남자 쪽은 뭐지?”

“친동생인데…… 제 누이를 끔찍하게 아낍니다. 이번에도 사룡을 죽이겠다고 뛰쳐나갔을 정도였지요.”

“푸하하! 뭐? 사룡을 죽여?”

“웃기는 놈이로군. 아니, 주제 파악을 못 한다고 해야 하나.”

어깨를 들썩이며 낄낄거리는 두 전사의 얼굴은 여우 가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라는 그들의 시선이 자신을 훑는 것을 느꼈다.

“호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럭저럭 골격은 잡혀 있군.”

“하지만 아쉬워. 가르치기엔 나이가 너무 많아.”

소라를 마치 상품처럼 평가한 두 전사는 각자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창인가.’

카이는 그들이 꺼내드는 무기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산은 지역 특성상 몬스터들의 털과 가죽이 두껍다.

한 마디로 검이나 도 같은 베기류 날붙이로 그들을 상대하는 건 상당한 수준이 요구된다는 뜻.

‘그래서 설산의 전사들이 창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거겠지.’

소라도 그렇고, 눈앞의 동물 가면 친구들도 그렇다.

“누이를 생각하는 마음은 가상하나,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네 누이는 우리가 잠시 데려가도록 하지. 막는다면 죽음뿐이다.”

전사들의 위협에 소라는 이빨을 꽉 깨물면서 눈을 부릅떴다.

“가족을 데려간다는데 가만히 있을 멍청이는 세상에 없습니다. 보아하니 지배자 일족에서 나오신 분들 같은데, 어찌 저희를 핍박하십니까?”

“모든 건 설산을 지배하시는 샤크투스 님의 뜻이니 겸허히 받아들여라.”

“서, 설산의 지배자께서…….”

소라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때까지 상황을 관망하던 카이는 소라의 옆에 나란히 서며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겁을 상실한 듯한 저놈은 뭐지?”

업무를 방해받은 전사 중 하나가 불쾌한 목소리로 촌장에게 물었다.

“지나가는 모험가 사제입니다. 일전에 마을에 들려서 진료소를 열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군. 이제 기억이 나. 저 문양은 분명 태양인지 뭔지를 믿는 머저리들의 문양이었지?”

“따뜻하고 배부르니 별걸 다 믿는군. 우리가 숭상해야할 것은 압도적인 무력뿐. 태양 따위를 믿다니 멍청한 놈들이군.”

그들은 태양교의 존재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듯 카이를 비웃었다.

‘이거, 헬릭이 듣고 있다면 열 좀 받겠는데…….’

아니나 다를까.

하루 일과가 간식을 먹고 카이를 지켜보는 것이 전부인 헬릭은 그들의 말에 곧장 반응했다.

띠링!

[헬릭이 여우탈 전사들의 언행에 몹시 불쾌해합니다.]

[헬릭이 자신의 대리인인 당신에게 긴급 명령을 하달합니다.]

[퀘스트 : 괘씸한 작자들 혼내주기]

난이도 : B

헬릭은 자신을 무시하는 여우탈 전사들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들을 혼내 태양교의 위대함을 알리고, 헬릭의 불쾌한 기분을 달래주십시오.

성공 시 보상 : 선행 스탯 +1

실패 페널티 : 선행 스탯 -3

“…….”

정말 이 아이가 태양신이라는 중책을 맡아도 괜찮은 걸까?

카이는 어린 아이의 투정이나 다름없는 그녀의 요청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띠링!

[헬릭은 당신이 뱉어낸 한숨의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합니다.]

누가 여자아이 아니랄까 봐, 눈치 하나는 귀신 같이 빠르다.

카이는 곧장 어깨를 으쓱거리며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아, 물론 안 한다는 건 아니고. 우리 태양신님 욕하는 놈들은 모두 맴매 맞아야지.”

게다가 긴급 퀘스트는 선행 스탯 한 개를 무료로 주겠다는 뜻과 다를 게 없었다.

길 가다가 돌멩이를 걷어차는 것과 눈앞의 전사 두 명을 눕히는 것.

카이에게는 별반 차이가 없는 행위였으니까.

물론 눈앞의 전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하다.

“허? 지금 태양 잡신을 믿는 샤먼 따위가 감히 내 앞에서 검에 손을 올려?”

“돌아도 단단히 돌았군.”

[헬릭이 자신은 잡신이 아닌 태양신이라고 항변하며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아, 이런 대우 받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라 그런지 신선한데?”

카이는 저들이 자신을 대하는 차가운 태도에서 그리운 옛 추억들을 되살렸다.

‘언노운의 정체가 까발려지기 전에는 이런 대우 참 많이 받았었지.’

물론 얼굴이 팔린 지금은 도시에 출현하는 순간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정상적인 플레이가 불가능할 정도지만, 오크 토벌대에 참여했을 때만해도 레벨이 낮다고 알게 모르게 무시를 받았었다.

여우탈 전사 중 하나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오며 중얼거렸다.

“잡신을 믿는 사제라…… 산 아래쪽의 나약한 것들로부터는 존경과 대우를 받는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곳은 설산. 무력만이 통용되는 자연의 세계에서는 그런 대우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여우 가면 안쪽에서 전사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주제 파악을 못한 죄, 목숨으로 갚아라.”

쇄액-!

전사는 하체와 코어, 상체를 사용하여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구사했다.

그 결과는 한 줌의 거슬림도 없이 쭉 뻗어나가는 아름다운 창격.

마을 주민들은 물론이고 소라조차 그의 움직임을 한순간 놓칠 정도였다.

“신기하단 말이지. 너 같은 놈들이 폼이란 폼은 다 잡고 꼭 기습을 해요.”

카이의 검집에서 튀어나온 맹수는 순식간이 녀석의 창을 반으로 가르고도 모자라, 여우 가면마저 반으로 쪼개 버렸다.

주르륵.

눈을 부릅 뜬 전사는 이마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리자 이를 감싸며 뒤로 물러섰다.

‘이, 일격에 내 창술을…… 강적이다!’

자신은 일족 최고라 칭하기에는 부족하나,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한 속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공격을 정확하게 읽어낸 것도 모자라서 반격까지 해내다니?

전사는 땅에 떨어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무기였던 쇳덩이를 내려다보았다.

약간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확히 반으로 잘려나간 창!

꿀꺽.

그 모습을 확인한 전사는 저도 모르게 오한이 드는 것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 무슨!”

동료 전사가 황급히 카이를 위협하며 피를 흘리는 동료를 보호했다.

“네 놈, 실력을 숨기고 있었구나!”

“딱히 감춘 적은 없어.”

“이래서 산 아랫것들과는 상종을 하면 안 되는 것이거늘! 비열한 잡신의 샤먼 같으니!”

[헬릭이 저 작자는 한 대 더 때리라고 요구합니다.]

“분부대로.”

카이가 가볍게 왼손을 들어 올리자, 소매에서 두 갈래의 사슬이 튀어나가며 그들의 목을 휘감았다.

“컥!”

“쿨럭……!”

그 뒤로 전사들을 골고루 때려주기를 잠시, 알림창이 떠올랐다.

띠링!

[헬릭은 대리인의 복수 내용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합니다.]

[선행 스탯이 1 증가했습니다.]

[태양 목격자의 효과로 인해 선행 스탯 1개가 추가적으로 상승합니다.]

‘어? 잠깐만.’

태양 목격자는 선행 스탯이 증가할 때 50%를 추가적으로 주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증가한 선행 스탯이 홀수일 때는 항상 반올림이 된 상태로 증가했다.

‘선행 스탯이 1개만 오르면…… 50%는 0.5개야. 이것도 반올림되는 거구나?’

눈을 반짝인 카이는 자리에 쭈그려 앉으며 전사들에게 물었다.

“이봐. 너희들 마을로 나 좀 안내해 줘.”

“웃기지 마라! 적 따위에게 마을의 위치를 드러낼 수는 없다!”

“아까는 무력을 숭상한다며? 내가 이겼으니까 날 숭상해야 하는 거 아니야?”

“크큭. 네놈 따위는 설산을 지배하시는 샤크투스 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왕께서는 무려 사룡과 대화까지 나눈 뒤 살아오신 전설적인 영웅이지.”

“…….”

참고로 그 사룡이란 녀석은 잘 정돈되어 카이의 인벤토리에 들어있는 상태다.

“그래? 그럼 안내해 줘도 되는 거 아니야? 너희의 말이 맞다면 그 설산의 지배자인지 뭔지가 날 혼내주겠지.”

카이의 제안에 서로를 쳐다보던 전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큭, 이런 걸 두고 제 무덤을 스스로 판다고 하는 거군.”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났는데 말릴 이유는 없지.”

얻어맞은 주제에 뭐가 그리 당당한지, 지배자 일족의 전사들은 벌떡 일어나 카이를 안내했다.

“서둘러. 해 지겠다.”

카이는 부푼 마음을 껴안은 채 그들을 따라갔다.

***

지배자 일족이라 불리는 이들의 마을은 설산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네 개의 봉우리가 감싸고 있는 거대한 산맥의 정상.

일반인은 호흡마저 힘들어할 구름의 끝자락에 걸친 마을.

“호오.”

마을의 건물은 드워프들의 대피처와 마찬가지로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드워프의 그것처럼 아름답지는 못했으나 투박한 디자인에선 전사의 기개가 느껴졌다.

척! 척!

카이가 두 명의 전사를 인질로 삼은 채 마을 입구를 통과하는 순간, 백 명이 넘는 전사들이 그를 포위했다.

‘많기도 해라.’

레벨은 최소 350에서 높으면 400가량.

카이 입장에서는 크게 어렵지 않은 상대들이었다.

“뭐라? 지금 태양 잡신을 믿는 샤먼 따위가 감히 나의 왕국에서 행패를 부려?”

어깨 위에 하얀 모피를 올린 근육질의 남성이 매섭게 호통을 치며 자리에 등장했다.

“데자뷰인가? 저거 어디서 들어본 대사인데.”

카이가 여섯 시간이나 공을 들여가면서 이곳까지 온 이유는 간단했다.

“태양 잡신을 믿는 샤먼!”

“설산에서 태어났다면 열 살을 넘기지 못했을 머저리가 감히.”

“이곳으로 들어온 이상, 잘난 너의 신도 널 보호해 주지 못할 것이다.”

카이를 향해 폭언을 일삼는 수백의 설산 전사들!

‘과연?’

카이가 눈을 반짝이며 무언가를 기다리기를 잠시.

그가 기다리던 알림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띠링!

[헬릭은 끊이지 않는 폭언을 듣고는 결국 눈물을 글썽거립니다.]

[헬릭은 자신의 대리자에게 저들 모두를 혼내줄 것을 명령합니다.]

[퀘스트 : 괘씸한 작자들 혼내주기Ⅱ]

난이도 : A

헬릭은 자신을 태양 잡신으로 생각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헬릭의 분이 풀릴 때까지 그들을 혼내주십시오.

성공 시 보상 : 선행 스탯 +10

실패 페널티 : 선행 스탯 -20

“……빙고.”

카이는 날이 갈수록 자신의 신을 다루는 법을 터득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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