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
힐통령 224화
77장 구원 투수(3)
“흐음. 니혼이치 녀석들. 타격이 크겠어.”
한정우는 익숙한 향기를 뿜어내는 믹스 커피를 한잔 마시며 아침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가 게임에 접속하지 않고 이렇게 거실에 앉아 뉴스를 보는 이유는 간단했다.
‘언제쯤 오려나?’
기다리는 연락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어젯밤에 갑작스럽게 잡힌 약속이기 때문에 아직도 얼떨떨하기는 하다.
띵동!
오피스텔의 초인종이 울렸다.
“음?”
슬쩍 시계를 확인해 보니 아침 9시.
이 시간부터 자신의 집을 찾아올 사람은 없다.
‘반찬 가게에서 김치 주러 오셨나?’
서둘러 인터폰으로 다가간 정우는 버튼을 누르며 물었다.
“누구시죠?”
“설은영이에요.”
“누구요?”
“설은영이요.”
자신의 눈을 부빈 한정우는 인터폰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고민했다.
‘진짜 설은영이네. 이 여자가 내 집에는 왜 왔지?’
물론 그녀가 자신의 집에 못 올 이유도 없다.
그녀는 형식상으로나마 한정우가 소속된 매니지먼트의 대표이니까.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어떤 터치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바꿔 말하면 그녀가 자신의 집에 올 이유도 없다는 소리.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정우는 현관문을 열었다.
“일단 들어오세요. 밖에 추우니까.”
“그럼 실례를.”
구두를 벗고 도도하게 현관을 지나친 설은영이 돌연 깜짝 놀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렇게 놀라요?”
“아니…… 예전에 왔을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서요.”
“그야 바꾼 게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이사도 안 끝난 집에서 생활하는 건…… 힘들지 않나요?”
“예? 이사 끝난 지가 언젠데요?”
두 사람은 눈을 깜빡거리며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그러기를 잠시, 설은영은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게 이사가 끝난 거라고요?”
“그, 그런데요.”
정우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자, 설은영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제 입가를 가렸다.
“이럴 수가…… 가죽 소파도, 샹들리에도, 벽에 걸린 그림마저 없는데 이사가 끝났다니…….”
“…….”
오피스텔에서 그런 걸 찾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그건 설은영 씨처럼 오피스텔 한 층을 죄다 뚫어놓은 사람만 가능한거구요. 일단 앉으세요. 커피로 하실래요, 차로 하실래요?”
“에스프레소 주세요.”
“……믹스 커피밖에 없습니다.”
“차로 할게요.”
그녀에게 자리를 권한 정우는 금세 차를 내왔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
“한 번쯤 보고도 드릴 겸 오려고는 했어요. 우선 한 번 보시죠.”
정우는 곧장 그녀가 건넨 서류를 읽어 내렸다.
[언노운, 연예계의 거대 매니지 중 한 곳인 CL과 독점 계약 완료.]
[중국의 틴텐츠, ‘언노운이 자사의 광고 모델이 되었으면 좋겠어’ 발언 화제.]
[Cl 매니지, ‘언노운은 당분간 그 어떤 대외적 활동도 하지 않고 싶어해’ 공식 입장 발표.]
…….
서류는 신문이나 기사 따위를 스크랩해 놓은 형태였는데, 대충 정우가 천화와 계약을 맺은 이후의 이야기들이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타악.
“잘 봤습니다. 일 잘해주셨네요. 그럼 이거 말씀해 주시려고 온 건가요?”
“겸사겸사요. 요즘 뭐하나요?”
“그냥 사냥하고, 퀘스트하고…… 애도 하나 돌보면서 게임하고 있어요.”
“……애요?”
설은영이 집 안을 스윽 둘러봤다.
애는 커녕 사람이 살고 있는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삭막한 인테리어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아, 게임에서요. 크게 신경 쓰실 부분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묻습니까?”
“일정에 큰 문제가 없다면 저희와 일 하나 같이 해요.”
“천화랑요? 아아…….”
정우가 말 끝을 흐리며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나마나 자탄 레이드겠네.’
니혼이치를 포함하여 몇 개의 길드.
심지어는 중소 길드 몇몇이 연합을 하면서까지 자탄 공략을 시도했으나 모조리 실패했다.
결국 메인 에피소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은 9대 길드의 역할이라는 것이 세간의 목소리.
‘새로운 에피소드로 넘어가야 즐길 거리가 더 다양해지니까.’
새로운 에피소드가 열리면 지금은 락(Lock)이 걸려있는 지역이 해제되기도 하고, 새로운 직업이나 퀘스트, 아이템들이 풀려난다.
당연히 일반 유저들 입장에서는 즐길 컨텐츠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것이 사람들이 메인 에피소드를 앞장서서 공략하는 9대 길드를 응원하는 이유이다.
‘흐음. 천화와 일을 하는 것 자체에는 불만이 없는데 말이지.’
오히려 자신의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천화는 돈 계산 문제로 구질구질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정산율을 잘 쳐줬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가 고려해야할 문제는 이런 것들이 아니지.’
가장 신경써야할 것은 세간의 인식이다.
자신이 천화와 교류한다고 생각되는 건 좋으나, 한 배를 탔다고 여겨지는 건 사양이니까.
‘혹시라도 나중에 귀찮아질 수도 있어.’
훗날 누군가가 천화와 싸우는데, 자신까지 귀찮게 구는 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도 안 붙잡아. 사람 됨됨이만 된다면 말이지.’
시선에 따라 조금 이기적인 플레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세력에 소속되지 않은 개인의 가장 커다란 무기였다.
때에 따라서 그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큰 장점이니까.
‘천화랑은 검은 벌 사냥 때도 함께했고, 비르 평야 전쟁 때도 함께했지.’
벌써부터 천화와 자신을 한데 묶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그건 위험하다.
‘프레이 길드처럼 아예 내 밑으로 들어온다면 모를까.’
애초에 그들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뿐이다.
그러니 눈앞의 철혈 여왕이 그럴 리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았다.
결국 정우는 고심 끝에 결정을 내렸다.
“죄송하지만 이번에는 거절하겠습니다.”
“……이유가 뭐죠? 아직 구체적인 건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설마 자신의 제안이 단칼에 거절당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그녀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어차피 자탄 레이드 말씀하려고 하신 거 아닙니까?”
“맞아요. 그쪽 입장에서도 나쁠 건 없을 거예요.”
“네, 나쁠 건 없죠. 인지도도 오르고, 돈은 또 넘치도록 들어올 테고, 레벨이랑 명성도 오르고.”
“그런데 왜 거절하는 거죠?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
“아뇨. 사실 이제 돈은 별로…….”
정우가 입을 여는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잠시 실례 좀.”
화면에 떠오른 메시지를 읽은 정우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 연락으로 확실해졌습니다. 제가 당분간 다른 일정을 소화해야 될 것 같아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설은영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나즈막히 경고했다.
“최근 길드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길드들이라면…….”
그녀가 이렇게 직접 언급을 할 정도라면, 세상에는 아홉 군데밖에 없다.
“세계 9대 길드요?”
“저희를 빼고 8개…… 아니. 저희를 제외하고 10곳.”
“음?”
이번에는 정우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이상하네요. 제가 신경써야 할 곳이 10곳이나 되었던가요?”
“부자는 망해도 3년을 간다는 말이 있어요.”
“그건 현실에서나 통용되는 이야기죠. 게임에서는 아무리 세력이 굳건해도 성장이 뒤쳐지는 순간…….”
“그 부분이 심상치 않다는 거예요.”
“예?”
“스팅과 골리앗. 당신에게 패배한 이후 쭉 내리막길을 걷던 두 사람이 최근 들어 다시 페이스를 올리고 있어요. 그들의 심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레벨링 속도도 전성기 수준만큼 올라간 상태죠.”
“잠시만요. 확인 좀.”
휴대폰을 들고 랭킹을 쭉 훑어본 정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스팅 레벨 299. 골리앗 레벨 305…… 제법 오르긴 했는데, 딱히 위협이 되지는 않습니다만.”
“그들이 손을 잡았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어요. 그리고 세상에는 목적 없는 동맹이 없어요.”
“그 목적이 설마 저라는 겁니까?”
“글쎄요?”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것에 심통이라도 난 것일까.
은은하게 웃어 보인 설은영은 차를 비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잘 마셨어요. 그럼 다음에 또.”
“아마 그 다음은 조만간이 될 것 같네요.”
“그게 무슨 뜻이죠?”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예요. 그때 가서 저 너무 미워하지는 마시고…….”
정우의 아리송한 말에 고운 미간을 찌푸린 설은영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도도하게 집을 나섰다.
그녀는 떠나기 전,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참여하지 않은 건 아쉽지만, 자탄이 천화 손에 쓰러진다는 건 변하지 않아요.”
“유하린이랑 계약이라도 하셨나 봐요?”
“…….”
이 바닥 인물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다.
게다가 천화와 유하린은 이미 한 번 손발을 맞춰본 적이 있는 조합.
‘확실히 유하린과 천화가 함께한다면 자탄을 무리 없이 잡을 수 있겠지.’
물론 변수가 없다는 가정하에서 말이다.
“그럼 이만.”
설은영이 위층의 집으로 돌아가자 정우는 곧장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신이 늦어서 미안합니다. 집에 손님이 오셔서요.”
-아닙니다. 약속 시간을 명확하게 정하지 않은 제 잘못이 크죠.
“보내주신 메시지는 봤습니다.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셨던데, 사실입니까?”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성격은 아닙니다. 그리고 랭킹 1위를 용병으로 고용하는 건데 이 정도 조건은 당연하지요.
“좋습니다. 그럼 바로 계약 진행하도록 하지요.”
정우는 상대방의 파격적인 조건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유하린은?”
“한다고 하더군요.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맹한 구석이 있는 여자입니다.”
“설령 그렇게 느끼더라도 티내지 마.”
“물론입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 여자는 유하린인걸요.”
제대로 맞붙으면 3분이나 버틸 수 있을지.
보이드는 과거 언노운과의 대결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 저도 마법사 캐릭 삭제하고 전사나 키울까요?”
“꿈 깨. 넌 마법사라서 그 정도 위치나 지키고 있는 거니까.”
설은영의 냉혹한 팩트에 보이드가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 위치가 뭡니까? 그 정도 위치가. 그나저나…… 언노운은 불발이라고요?”
“안 한대.”
“거,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제법 매정하네.”
“계약에 사적인 감정 대입하지 마. 프로는 조건 안 맞으면 거절하는 게 당연해.”
“우리 여왕님 언노운한테 제대로 빠지셨나 보네. 까이고 돌아와서도 편 들어주시는 걸 보니.”
“시끄러워. 다른 길드들은?”
“항상 똑같죠 뭐. 프레이 녀석들이 태양교 본단에 틀어박혀 있어서 파악이 잘 안 되는 것 빼면 다 괜찮아요.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음…….”
걱정하지 말라는 조언에도 불구하고, 설은영은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왜 이러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온몸을 엄습하는 기분.
그녀는 가만히 자료들을 정리하며 자신이 무엇을 빠트렸는지 체크했다.
‘길드의 사냥터들은 문제없고, 이번에 손에 넣은 영지들도 잘 관리되고 있어. 사고 친 길드원들도 없고 다른 길드도 대부분 자탄 레이드는 포기했어. 아, 혹시?’
설은영이 입을 열었다.
“워리어스는? 인터뷰보니 참여 의사를 드러낸 것 같던데.”
“예. 아시다시피 걔네랑 저희랑 전력 차이가 비슷하잖아요. 그나마 거긴 날쌘 전사 애들이 많으니 우리보다 상황은 조금 더 좋지만, 그래도 믿을 만한 실력자 한 명 정도는 용병으로 계약했을 걸요?”
“레이드 준비하고 있는 것 맞아?”
“예. 지원과에서 보고 올라온 걸 보니, 요즘 경매장에서 워리어스 애들이랑 마찰 심하다고 하던데요. 서로 포션을 쓸어담아야 하니까요.”
“……이번 레이드. 우리가 먼저 진행할 수 있도록 준비해.”
“예? 아무리 워리어스라고 해도 자탄을 단번에 공략하진 못할 텐데, 패턴 좀 더 수집하고 천천히 하시죠?”
“느낌 안 좋아. 하라면 해.”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불안하게 하는 걸까.
하지만 그녀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괜찮아. 이쪽에는 유하린이 있어.’
카이가 압도적인 1위로 군림하는 지금은 예전만큼의 포스가 없지만.
그녀는 랭커들의 랭커라 불릴 정도로 강렬한 실력을 자랑하던 플레이어다.
“그래, 걱정할 필요는 없어.”
마치 자기 최면이라도 걸듯, 설은영이 반복해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