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
힐통령 225화
77장 구원투수(4)
“시작해.”
설은영 특유의 도도한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이에 천화 길드의 정보부를 이끌고 있는 두보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입을 열었다.
“다들 바쁘신 분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저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레이드 목표인 자탄 때문입니다.”
자탄.
과거 뮬딘 교가 만들어냈던 아오사와 같은 괴물이다.
비밀병기라고까지 불리는 자탄의 강함은 과거 아오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
“녀석의 간략한 이력을 설명해 드리자면, 12개의 중소 길드가 모인 길드 연합군이 녀석에게 패배하였으며, 영지전에서 큰 이득을 챙겨 9대 길드의 등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던 4개의 거대 길드들까지 예외 없이 패배. 이번에 9대 길드에 소속된 니혼이치의 공략마저 실패로 돌아가면서 화룡점정을 찍고 큰 관심을 받고 있는 녀석입니다.”
“설명 길어. 공략 방법만 간단히 설명해.”
설은영이 요구했다.
어차피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자탄에 대해 모르는 이는 없었으니까.
“자탄 레이드의 핵심은 총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제 1페이즈인 광범위 중력장. 그 속에서 놈의 공격을 회피하는 것과 동시에 어그로를 끌어줄 수 있는 근접 딜러나 탱커가 필요합니다.”
“그 정도도 못 하면 우리 길드에 소속될 자격이 없는거고.”
보이드의 목소리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정도는 니혼이치 길드의 근접 딜러들조차 해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송곳입니다. 자탄의 체력이 70% 밑으로 떨어지면 2페이즈에 들어서는데, 그 때 자탄은 두 마리의 강력한 하수인을 소환합니다. 놈들은 각각 350레벨의 네임드 몬스터. 하지만 이 놈들은 레벨과는 별개로 매우 까다로운 놈들입니다.”
두보의 말이 끝나자 모두의 고개가 동시에 끄덕여졌다.
그들 중에는 아예 질색한 표정을 짓는 이들조차 있을 정도였다.
“첫 번째 하수인의 이름은 라두스. 두 번째 하수인은 두라스입니다. 한 쪽은 물리 공격만이 먹히며, 다른 한 쪽은 마법 공격만이 먹힙니다.”
하지만 이것이 특징의 전부라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녀석들이다.
“문제는 이 녀석들을 동시에 격파해야 한다는 점이지요.”
동시 격파.
라두스건 두라스건, 한 놈을 격파하고 30초 이내로 다른 한 쪽을 죽이지 못하면, 이전에 쓰러트린 놈은 체력의 100%를 회복하면서 소생한다.
하수인을 베어낼 날카로운 송곳이 될 두 사람.
그들의 합이 잘 맞아야만 무사히 쓰러트릴 수 있다는 소리다.
송곳들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해도, 타이밍이 어긋난다면 놈들을 쓰러트릴 수 없다.
“실제로 쌍둥이 하수인이 나오는 2페이즈의 벽은 아직까지 어떤 길드도 넘지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자탄의 중력장이 펼쳐지는 순간 외부에서의 공격은 무용지물이 된다.
화살을 쏘건, 마법 주문을 날리건.
모두 녀석의 중력장의 외벽에 부딪치는 순간 궤도가 랜덤하게 변경되기 때문.
결국 하수인들을 처치하려면 자탄의 중력장 안에 들어가서 처치하는 수밖에 없다.
“흠흠. 물론이지. 중력장 속에서 활동 할 만한 피지컬을 갖춘 마법사는 하늘 아래에 몇 없지 않겠어?”
보이드의 콧대가 쭉쭉 올라갔다.
회의실의 모두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설은영은 대놓고 인상을 구겼지만 누구도 보이드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자탄 공략에서는 보이드 급의 마법사가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니까.
“마스터는 진짜 복 받은 줄 알아요. 우리 길드에 나 없었으면 또 막대한 돈 들여서 마법사 용병을 구할 뻔 했잖아요?”
“차라리 그쪽이 더 편할 텐데.”
설은영이 차가운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보이드가 실실 웃으며 두보를 재촉했다.
“에이, 마스터도 참. 아무튼 두보 부장은 계속 해.”
“감사합니다. 니혼이치 길드의 공략까지 포함하여 자탄의 페이즈가 밝혀진건 2페이즈까지입니다. 그 뒤에 추가 페이즈가 있을 지는 아직 모르는 상태입니다.”
“2페이즈가 마지막일 가능성은?”
“물론 존재합니다. 하지만 자탄이 레이드급 보스 몬스터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아마 숨겨진 한 수 정도는 더 있을 것 같다는게 정보부의 견해입니다.”
“흐음. 솔직히 2페이즈까지만 해도 좀 짜증나는데, 거기에 하나가 더 숨겨져있을 수도 있다라…… 기분이 굉장히 상큼해지는걸?”
“물론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아니야. 페가수스 이 녀석들은 워낙 변태잖아. 난 자탄이 셋으로 분열을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회의실의 모두가 각자의 생각을 활발하게 주고 받을 때, 설은영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1페이즈는 길드 공략팀이 해결 할 테니, 당신은 계약에 따라 2페이즈부터 활약해줘요.”
끄덕끄덕.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까만 투구를 뒤집어쓰고 있는 검사가 자신의 조그마한 고개를 끄덕였다.
투구의 이음새로 가닥가닥 흘러나온 은발은 전사의 신비로움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어주었다.
“우리 천화의 손을 잡은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해드릴게요. 유하린 씨.”
흑색의 전사는 여태까지 카이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유저에게도 얼굴을 공개하지 않은 유저, 유하린이었다.
설은영은 자신의 요구에 그 어떤 불평도 없이 따라주는 유하린이 마음에 들었는지, 은은한 미소를 알게 모르게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두보, 그럼 이제 문제될 건 없지?”
“아, 그게…….”
여왕님의 질문에 두보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이 여왕님의 심기에 거슬렸다.
“뭐야 그 반응은? 할 말 있으면 해. 사람 답답하게 만들지말고.”
“워리어스 녀석들 말입니다. 포기를 안 해요.”
“워리어스가?”
설은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천화가 유하린과 손을 잡았다는 기사, 아직도 안 뿌렸어?”
“그럴 리가요. 이미 오늘 아침에 다 뿌렸죠. 벌써부터 유저들은 자탄 레이드가 제2의 베이거스 레이드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어요. 천화와 유하린의 조합은 실패를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니까요.”
“그런데 아직도 포기를 안 한다?”
“워리어스도 이번에 투자한게 제법 되거든요. 포션이니, 장비니…… 아마 그것들이 아까워서 그런 것 아닐까요?”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설은영이 두 눈을 꼬옥 감으며 고민에 빠졌다.
길다란 속눈썹이 눈 밑살에 내려앉았고, 회의실의 모두는 이럴 때 그녀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입을 닫았다.
‘워리어스의 마스터 발칸은 똑똑하고 유능해.’
만약 돈으로 고용할 수 있는 유저였다면, 설은영은 천문학적인 돈을 뿌려서라도 그를 데려왔을 것이다.
매사에 깐깐하고 신중한 설은영이 그 정도의 평가를 내렸다는건, 발칸이 정말로 유능하다는 뜻이다.
‘그런 작자가 포션 값으로 돈 몇 푼 깨졌다고 안 될 일에 고집을 부린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거인이 쓰러진 뒤, 9대 길드라 불리는 길드들.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스폰서를 하나씩 물고 있다.
당연히 9대 길드는 꾸준히 성적을 내는한 자금줄이 마를 일은 없다는 소리.
‘나처럼 길드의 뒤에 가족의 기업이 있지 않은 이상, 9대 길드의 마스터들은 결국 일을 결정할 때 실적을 위주로 움직일 수밖에 없어.’
길드의 이미지가 조금씩 깎여나가거나, 계획했던 일이 실패하거나.
그런 것들이 하나씩 쌓이다보면 결국 9대 길드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마치 지금의 니혼이치 길드가 그렇고, 이전의 타이탄이나 검은 벌 길드가 그랬듯이.
‘더군다나 니혼이치 길드가 실패한 지금, 9대 길드 중 3강이라 불리는 워리어스가 실패한다면…….’
다른 경쟁자들만 좋은 일을 시켜주는 셈이다.
발칸 정도 되는 이가 그 정도의 미래도 못 내다볼 리는 없었을 터.
‘그렇다면 워리어스 쪽에서 노리는 건 하나.’
승부수를 띄우려는 것이다.
어차피 레이드는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다.
얼마나 압도적인 전력을 지니고 있는지는 상관이 없는, 경쟁자보다 빠르게 자탄을 공략하면 끝나는 제로섬 게임.
‘정면 승부라면 피할 이유가 없어.’
하지만 상대방은 자신의 패를 아는데, 이쪽은 상대방의 패를 모른다.
“워리어스 쪽 감시 인원 더 늘려.”
설은영이 차갑게 명령했다.
***
예로부터 MMORPG 게임에는 풀리지 않았던 난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사냥터에서 필수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분쟁.
바로 자리싸움이다.
대다수의 게임에서는 몬스터를 선제공격한 사람의 기여도를 높여주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왔다.
하지만 이 방법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드 온라인이 가상현실게임이라는 것.
아무리 게임이라고는 하나,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는 상황에서 몬스터를 가로채가는 행위는 여러모로 시비가 일어날 요소가 다분했다.
일반적인 몬스터조차 이럴진대, 과연 레이드 보스 몬스터는 어떨까?
-와, 이거 실화야? 이런 상황은 처음봐서 뭐라고 말을 못 하겠네.
-천화 대 워리어스, 워리어스 대 천화…… 말도 안 되는 대치 상황이다.
-그런데 둘이서 붙는다면 천화 쪽이 이기지 않으려나? 전력 자체는 천화 쪽이 더 뛰어나잖아. 철혈 여왕 설은영을 비롯해서 악동 보이드, 게다가 이번에 고용된 유하린은 무려 랭킹 2위인데?
└그렇게 따지면 워리어스도 꿇릴 건 없지. 마법사 쪽은 몰라도, 기사 클래스 쪽은 워리어스 쪽 랭커 라인이 훨씬 빵빵한데?
└그러면 뭐하냐? 자탄이 하수인 소환하면 어차피 마법 데미지가 필요해. 워리어스에 그 정도 수준의 마법사가 있던가? 난 천화 쪽 한 표.
└나도 천화 쪽 한 표. 이번 건 아무리봐도 발칸이 무리수를 던진 것 같다. 아마 최근 뚜렷한 사건이 없어서 옅어지는 존재감을 의식한 거겠지.
유저들의 의견이 분분해졌다.
물론 그 시각, 천화와 워리어스는 그들이 무어라 떠드는지에 관심이 없었다.
“오랜만이군, 설은영.”
“당신도.”
-고오오오오오오오!
저 멀리서 울부짖는 자탄을 배경으로 둔 채, 두 길드의 마스터가 대화를 나누었다.
“이번 레이드, 워리어스에 양보하는 게 어떤가.”
“헛소리하지 마. 오히려 그쪽이야말로 무리하고 있는 거 같은데.”
“무리라고?”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발칸이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자탄을 돌아봤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공략을 시도해도 되겠군. 당신 말이 맞다면 어차피 우리 전력으로는 ‘무리’일 테니까. 그렇지 않나?”
“어지간히 자신 있나 봐?”
“난 항상 자신이 있었다.”
발칸의 당당한 음성에 설은영이 그의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대체 뭘 믿고…….’
천화 길드의 정보부를 며칠 동안 굴려봤지만, 발칸이 왜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지는 못했다.
“마스터, 예전부터 말씀드렸지만, 워리어스 현재 전력으로는 절대 자탄 못 잡아요. 저놈들 먼저 죽게 놔두고, 자탄 패턴 파악한 뒤에 안전하게 공략하는 게 낫다니까요?”
“저도 동감입니다. 마스터. 워리어스에서 뛰어난 마법사라고 해봐야 클로이 밖에 없는데, 그녀는 하수인을 단독으로 처치하기에 부족합니다.”
“음.”
부하들의 설득에 설은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들의 말대로 하는 것이 백 번 옳다.
자탄에 대해 밝혀진 건 고작 2페이즈까지.
베이거스조차 3페이즈가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자탄은 그보다 까다로우면 까다로웠지 더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이게 옳아. 하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물론 맨 입으로 양보해 달라는 건 아니다.”
“무슨 뜻이지?”
설은영이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발칸은 그 위에 쐐기를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