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
힐통령 226화
78장 혼자 다 해먹는 놈(1)
“프리츠 공성전. 천화에게 먼저 양보하지.”
“……!”
“……!”
발칸의 선언이 떨어지자 자리의 모두가 얼어붙었다.
그건 천화 쪽 인물뿐만이 아니라, 워리어스의 간부진도 마찬가지였다.
‘뭐지?’
이후 워리어스 소속의 랭커들은 빠르게 표정을 수습했지만, 설은영의 날카로운 눈썰미를 피해갈 정도로 능숙하지는 못했다.
‘이 정도 딜을 던진다는 걸 아군도 모르고 있었다고?’
프리츠 성은 현재 천화와 워리어스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장소였다.
수베르 운하와 연결되어 있는 그 성을 손에 넣기만 하면, 힘들이지 않고 교역로를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대부분의 공성전은 영지가 소속된 나라의 국왕이 도전 순번을 결정한다.
그 결과 워리어스가 최초의 도전권을 손에 넣었고, 천화는 두 번째였다.
‘그런데 그 도전권을 우리 천화에게 주겠다고? 대체 왜?’
물론 자탄 레이드는 중요하다.
녀석은 어느 필드에서나 볼 수 있는 어중이떠중이 따위가 아니다.
무려 메인 에피소드 2의 대미를 장식할 레이드 보스 몬스터.
한때 국내에서만 이름을 날리던 천화 길드가, 에피소드 1의 보스였던 베이거스를 단독 공략하고 세계 레벨로 도약한 것을 떠올려 보면 절대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건 레이드를 성공시키고 나서의 이야기야.’
자탄이 아무리 중요하다고는 하나, 그녀의 말마따나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다.
만약 프리츠 영지까지 던졌는데 공략에 실패한다면?
그건 단순히 하나를 잃는 게 아니다.
워리어스가 자탄 공략에 실패하면 당연히 그 뒤의 순번은 천화.
그리고 현재 천화의 전력은 구성원 모두가 불법 토토라도 하고 있지 않은 이상, 도무지 공략 실패를 떠올릴 수 없는 라인업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괴물 플레이어, 유하린이 있다.
“보이드.”
설은영이 여전히 발칸을 쳐다보며 중얼거리자, 보이드가 다가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두보한테서 연락 왔습니다. 확인 끝났답니다.”
“뭐래?”
“마법사 랭커들의 행적은 모두 파악 중이고, 마검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유시인을 비롯한 비주류 마법 데미지 딜러들의 소재도 파악해봤는데, 이상 없답니다."
“확실해?”
“제가 조사한게 아니라 확실하진 않지만, 두보 부장 정도면 믿을 만 하죠?”
전직 FBI 정보부 소속이었던 두보 부장의 정보 장악력을 의심하면 이 세상에 믿을 이는 몇 없다.
한 마디로 상위 랭킹의 마법 데미지 딜러들 중에선 워리어스에 고용된 이들이 없다는 뜻.
이에 잠시 고민하던 설은영이 발칸에게 물었다.
“혹시 나중에 공략에 실패하면 다른 말을 할 생각은 아니겠죠?”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서릿발처럼 차가웠지만, 공격적인 느낌이 많이 줄어들고 사무적인 느낌이 더 묻어나왔다.
발칸을 단순한 경쟁자로 보는 것이 아닌, 비즈니스 상대로 보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표출한 것이다.
“물론이지. 원한다면 계약서를 작성해줄 수도 있고.”
“좋아요. 보이드, 서류 가져와.”
“넵.”
보이드가 부리나케 인벤토리에서 백지 서류를 채우기 시작하자, 발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이 왜 그러죠?”
“……아니, 정말 철두철미한 성격이라고 생각해서. 무례였다면 사과하지.”
“딱히.”
팔짱을 끼며 보이드가 내미는 서류를 확인한 설은영은 그것을 곧장 발칸에게 넘겼다.
“확인해 봐요.”
“괜찮군.”
두 마스터의 사인이 순식간에 계약서 하단에 새겨졌고, 계약서가 빛나기 시작했다.
띠링!
[맹약의 서가 빛나기 시작합니다.]
[설은영과 발칸의 맹약이 제대로 이루어지는지는 태양신이 주시할 것입니다.]
태양교에서 장당 10골드에 판매한다는 맹약의 서.
계약 내용을 불이행하는 순간 엄청난 페널티를 부과하는 이 맹약은 절대로 어길 수가 없다.
물론 계약을 맺는 당사자들끼리 패널티의 강약은 조절할 수 있다.
다만 설은영은 계약 내용에 그 부분을 건드리지 않았다.
다분히 발칸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함이었지만,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사인을 새겨 넣었다.
‘이 정도까지 하면 정말 뭔가를 믿고 있다는 소리인데…….’
맹약의 서를 한 부씩 나눠 가진 설은영은 찝찝한 표정으로 발칸을 쳐다봤다.
“그럼 프리츠는 그 쪽이, 자탄은 우리가 가져가겠군.”
“누군가가 실패할 수도 있지만요.”
발칸은 대놓고 저주를 흩뿌리는 설은영을 쳐다보며 낮게 웃었다.
“아, 그런데 혹시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
“뭔가요?”
발칸이 맹약의 서를 흔들었다.
“프리츠 공성전의 순서는 국왕인 베오르크가 직접 명한 것이기에 도중에 포기를 할 수 없다. 길드의 이미지는 물론이고, 공적치와 명성이 깎이기 때문이지.”
“계약이 다 끝난 마당에 딴 소리를……? 하지만 이미 늦었어요. 그리고 맹약의 서에 그에 관한 내용도 적혀있을 텐데요?”
눈매를 날카롭게 뜬 설은영이 곧장 반박했다.
발칸의 말도 맞았고, 설은영이 말도 맞았다.
공성전의 순서는 국왕이 직접 정한 것이기에 임의로 사고 팔 수가 없다.
만약 그런 정황이 발견되면 명성이 대폭 깎이고 제재를 먹는다.
하지만 본인들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포기’는 할 수 있다.
그 방법도 무척 간단하다.
“공성전 인원에 1명만 넣으면 된다고, 쓰여 있을 텐데요?”
“그래. 다른 길드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지. 하지만 궁금해서 말이야.”
발칸이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
“혹시 우리가 공성 측 인원으로 넣을 1명이, 공성전을 성공시켜 버리면 어떡하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설은영은 그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만약 1명이 프리츠 공성전을 성공시킨다면, 저희도 할 말은 없지요.”
발칸이 맹약의 내용을 어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역시 그렇군.”
그녀의 확답을 받은 발칸은 크게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싱겁네요.”
짧게 중얼거린 설은영은 고개를 휙 돌리며 아군에게 명령했다.
“전원 철수. 천화는 워리어스의 공략이 실패로 돌아가면, 그 때 공략을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발칸을 흘깃 쳐다본 설은영은 예의상 건투를 빌었다.
“그럼 후회없는 최고의 레이드가 되기를.”
“미녀의 응원이라, 최선을 다하도록 하지.”
발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
“마스터, 혹시 가까운 정신병원이라도 알아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천화 길드가 자리를 떠나자, 워리어스 길드의 간부진이 단체로 발칸 주위를 에워싸며 소리 질렀다.
“으아아아악! 진짜 망했어요, 망했다고!”
“아니, 대체 어쩌자고 프리츠 영지까지 양보한 겁니까?”
“거긴 저희 길드 스폰서들도 기대하는 노른자 땅이라고요! 뭐라고 보고 올릴 건데요?”
“노른자가 뭐야, 쌍 노른자…… 아니, 세 쌍 노른자는 되지!”
마치 아이들처럼 찡얼거리는 간부들 사이에 서있던 발칸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다들 우선 진정하고…….”
“아니, 어떻게 진정을 합니까? 이번 레이드 실패하면 저희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저희 지금 잃을 거 많아요. 괜히 세계 9대 길드겠어요? 괜히 그중에서 3강이라고 불리겠냐구요.”
“젠장, 믿을 만한 플레이어를 고용했다는 말만하고 누군지 말을 안 해주니까 이러잖아요!”
“아니. 대체 왜 레이드 당일까지 숨기냐고요!”
“그야 너희들은 표정 관리를 더럽게 못하기 때문이지.”
“…….”
합죽이가 된 간부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발칸이 마침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언노운. 카이. 랭킹 1위. 이번 레이드에서 내가 고용한 플레이어의 정체다.”
“……!”
처음으로 공개된 용병의 정체에 모두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발칸의 심복이나 다름없는 스티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힘겹게 말했다.
“마스터, 아니. 발칸 형님. 머리 다이죠부? 정말 정신 괜찮으세요?”
“음?”
생각지 못한 길드원들의 반응에 발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 그들의 반응은 아까보다 더욱 격렬해졌다.
“저희 길드에 물리 딜러들이 이렇게 짱짱한데, 대체 왜 언노운을……!?”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저희 길드가 마법사가 부족하지 전사가 부족합니까? 자탄의 하수인 중 하나인 라두스요? 걔는 마스터는 물론이고 스티드도, 저도 처치할 수 있다고요.”
“두라스, 그 빌어먹을 두라스를 잡을 송곳을 구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랭킹 1위면 뭐해? 그 새끼 성기사잖아요! 검 쓰잖아!”
“마, 망했다…… 와아아아아! 우리 진짜 망했다!”
“여보세요? 아! 거기 제네시스 길드죠? 저번에 몰래 스카웃 제의하셨었는데, 조건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요…….”
발칸은 패닉 상태에 빠진 길드원들을 빠르게 진정시켰다.
“모두 진정해라. 내가 전부 설명해 줄 테니까.”
“……설명이요?”
귀를 쫑긋거리는 길드원들.
발칸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길드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처음에 내가 언노운을 고용하려고 생각한건 홍보 차원에서였다.”
“아하, 판 좀 키우시려고?”
“그래. 과거 천화는 베이거스를 레이드할 때 유하린과 손을 잡았었지. 그때의 시너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모두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뭐, 확실히 그 때는 대단했죠. 모니터 너머가 뜨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만년 솔로 플레이어가 잠깐이지만 거대 길드와 손잡고 레이드를 할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
“요컨데, 마스터께서는 이번에 저희가 그런 효과를 누리기를 기대했다는거죠?”
“맞다. 그것도 현재 유하린보다 훨씬 더 유명한 언노운을 이용하여 노이즈 마케팅을 할 생각이었지. 그런데…….”
발칸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그런 제안을 들고 개인적으로 연락을 넣었는데, 언노운이 욕심을 내비치더군.”
“욕심이라하면……?”
“사실 두라스를 잡을 송곳으로는 마법사 플레이어인 하켄을 고용할 생각이었다.”
“하켄이면 예전에 검은 벌 소속이었던 녀석 아닙니까? 얼음송곳의 하켄.”
“맞다. 검은 벌이 해체된 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있는 빙결 마법사지. 이번에 겸사겸사 영입도 진행할 생각이었는데, 언노운이 이런 말을 하더군.”
척.
발칸이 손가락 세 개를 들어올렸다.
“언론 플레이, 두라스, 라두스. 이 세 가지를 자신이 한꺼번에 처리해 주겠다고.”
“그게 말이 됩니까?”
“확실히 성기사는 순정 기사보다야 마법 데미지가 조금 섞여 있다지만 마법사와 비교하기에는 급이 너무 떨어지잖아요.”
“하지만 내가 아는 언노운은 절대로 허언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만약 그가 성공한다면?”
“그야…….”
유저들의 반응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올 것이다.
천화와 유하린 때보다 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크게.
“확실히 그림은 될 것 같네요.”
“하지만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는 저희가 져야 합니다.”
“기억해라. 돌아오는 리스크가 크다는 건, 성공했을 때의 보상도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 위험 부담 없는 투자란 없어.”
발칸은 설은영의 예상대로 이번 레이드에 승부수를 던졌다.
‘성공하면 더 이상 3강이라는 말이 들려오지 않겠지.’
세계 9대 길드 중 유일한 1강.
그것이 발칸의 야망이자, 욕심.
발칸의 야욕이 만들어낸 주사위가 마침내 굴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