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
힐통령 241화
82장 더 큰 거래 (1)
카이는 저도 모르게 제 볼을 꼬집어보았다.
꾸우욱.
“아…….”
손가락에 꼬집힌 볼살은 실제 피부처럼 짓눌렸다.
게임이라서 크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준은 되었다.
‘꿈이 아니구나.’
420만 골드.
두 제국의 황제는 경매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대금을 지불했다.
‘물론 420만 골드를 온전히 받은 건 아니었지만.’
경매장 수수료 10%인 42만 골드를 경매장 측에 지불했기 때문이다.
420억이라는 거금이 수수료로 빠져나간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배가 아플 정도까지는 아니다.
로또 1등 당첨자가 세금으로 몇 억을 낸다고 슬퍼하지는 않는 법이니까.
‘지금 내 손에 수 천억이 있는데, 수수료가 문제겠어.’
378만 골드, 한화로는 3,780억 가량 되는 돈이다.
카이가 이 돈을 받자마자 가장 떠올린 생각은 세금이었다.
하지만 인터넷 기사를 검색하기를 잠시, 그의 안색은 빠르게 밝아졌다.
‘다행히 아직 가상현실게임 화폐의 세금 관련 법안이 시행되지 않고 있구나.’
세금을 뜯어낼 수만 있으면 눈을 빨갛게 뜨고 달려드는 것이 정부다.
하지만 가상현실은 이미 국민들의 생활 전반에 깊숙하게 스며든 상황이다.
잘못 건드리는 순간, 지지율을 포함하여 차기 대선에 심각한 지장을 줄게 불 보듯 뻔했다.
그 때문에 정부는 가상현실게임 관련 법안을 아기 다루듯 조심스럽게 대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명분도 찾아야하지.’
정부에서 세금을 걷으려면 당연히 그에 걸맞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정부가 방구석에서 게임하는 플레이어들에게 뭘 해줬을 리가 없다.
때문에 세계의 각 정부는 지난 1년 동안 명분을 찾느라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뭐, 아예 플레이어 자체를 하나의 직업으로 만들겠다는 소리도 들리긴 하지만.’
지금 당장은 게임에서 얼마를 벌든 대한민국 정부에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
“허허.”
몇 번을 생각해도, 인벤토리의 보유 골드를 몇 번이나 확인해도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바람이 시린 날의 폭신한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온몸이 붕 떠 있는 기분.
“……무서워서 로그아웃도 못하겠네.”
혹시라도 로그아웃을 하게 되면 이 돈들이 사라질까봐, 해킹이라도 당할까봐 두려울 정도.
이것도 일종의 병이다.
‘일단 얼마 정도라도 골드를 현금으로 바꾸자.’
하지만 이 큰 돈을 한 번에 환전 시장에 내놓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개인이 4천억에 가까운 골드를 한 번에 풀어버리면, 눈에 띌 수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카이가 신경써줘야 할 의무는 없지만 골드 시세에도 어느정도 영향은 가게될 것이다.
‘그러니 환전은 대충 200만 골드 정도만 할까.’
카이는 여태까지 리버티아라는 장소에 큰 기대나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다달이 쏠쏠하게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영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총알이 이 정도로 두둑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이번에 제국의 주인들이 지닌 씀씀이를 보고 깨달았다.
‘황제들은 220만 골드를 1시간도 안 되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을 수 있어.’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제국의 황제들이기 때문이다.
‘제국의 힘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는 숱하게 들었지만, 그 정도일 줄이야.’
쉽게 설명하자면, 제국을 현대의 미국에 대입시키면 이해하기가 쉽다.
다른 나라들의 몇 배, 많게는 몇 십배나 되는 돈을 오직 국방비로만 쓰고 있는 나라.
당연히 매년 국가 예산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심지어 여긴 현대가 아니지.’
대를 이어서 국가의 권력과 재력을 세습할 수가 있다.
황제들의 힘은 한 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두 제국의 수백 년 역사에서 비롯된다.
‘그럼 만약 내가 지닌 영토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한다면?’
굳이 제국이나 왕국처럼 멀리갈 것도 없다.
자신이 보유한 세 개의 영지, 리버티아와 아르칸, 하베로스만 잘 키워도 남부럽지 않게 잘살 수 있다.
‘아, 물론 지금도 남들이 부럽지는 않지만.’
하루아침에 수천억 대 자산가가 된 슈퍼리치가 대체 누굴 부러워하겠는가.
만약 카이가 돈이 삶의 목적인 사람이었다면, 오늘 당장 지닌 아이템들을 모두 처분하고.
수천억을 현금으로 환전하여 떵떵거리며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싫어.’
카이는 미드 온라인이라는 세계가 좋았다.
만들어진 인공의 세계라는 건 알지만, 망가진 자신의 인생을 뒤바꿔준 세계다.
‘이 세계의 끝을 보고 싶다.’
물론 MMORPG에 엔딩 따위는 없겠지만.
피식 웃음을 흘린 카이가 돌연 신음을 뱉어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유저…….”
다크 스피어 입찰을 했던 흑색 로브를 입은 유저.
그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려고 했는데, 수천억이라는 액수에 정신이 팔려 잊어버렸다.
‘뭐. 인연이 된다면 다음에 또 만나게 되겠지.’
쿨하게 몸을 돌린 카이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환전소였다.
***
카이는 우선 3천 골드.
가볍게 3억 정도만 환전했다.
‘이렇게 하루에 몇 억씩 소소하게 환전해야지.’
그래야 혹시라도 모를 의심의 눈길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환전소의 직원만 하더라도, 3천 골드라는 액수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내가 루시퍼의 날개와 심장 판매자라는 게 들키면 굉장히 피곤해져.’
경매에 참여한 랭커들을 통해 수 천억대 아이템에 대한 소문은 커뮤니티에 퍼진 상태였다.
대다수의 유저들은 대체 무슨 효과를 지니고 있기에 그 정도 가격에 팔리냐고 궁금해했다.
그 때문에 카이는 미네르바에게도 프레이 길드원들 입단속을 시키라고 신신당부를 해두었다.
“리버티아를 제대로 키우려면 역시 영토부터 늘려야…….”
카이가 영지의 발전 방향을 고민하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비명을 터뜨렸다.
“아이고오! 카이 님!”
“음?”
뒤를 돌아보니, 잔뜩 울상을 지은 남자 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어? 이 남자 이름이 분명…….’
그의 이름을 떠올리려다가 실패한 카이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
“김준표 대리입니다.”
김준표 대리.
예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자신이 일주일짜리 불사 버프를 걸고 도장 깨기를 하면서 버그 의혹에 휩싸였을 때.
페가수스는 자사의 이미지를 위해 카이의 녹화본을 구매, 버그 의혹을 종식시켰다.
‘다시 만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물론 이렇게 숨까지 헐떡이면서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예상이 된다.
“저, 카이 님. 그 혹시…….”
환전소와 카이를 번갈아가면 쳐다보던 김준표 대리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호, 혹시 골드 환전하셨나요?”
“네.”
“으, 으아아아……!”
작품 명 절규, 작가는 에드바르트 뭉크.
그 유명한 작품은 김준표 대리의 몸을 통해 행위 예술로 승화되었다.
“난 끝났어…… 으아, 시말서? 아니면 해고? 뭐가 되었든…….”
혼자 중얼거리며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김준표 대리.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카이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놀리는 건 이 정도로 해둘까.’
김준표 대리가 이곳에 왔다는 건 페가수스 사에서 자신을 찾고 있다는 소리다.
수백만 골드를 한 번에 시장에 풀어버리는 건 회사 입장에서 절대로 좋을 게 없었다.
당연히 카이를 달래줄 먹이를 던져준 뒤, 환전에 관한 협상을 하고 싶을 것이다.
‘페가수스 사를 상대로 갑질을 하는 건 지난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말이지.’
사람 앞일은 모르는 것이라더니, 이렇게 큰 기회가 또 찾아올 줄이야.
카이는 바닥에 널브러진 김준표 대리의 등을 두드렸다.
“일어나십시오. 환전은 아직 3천 골드밖에 안 했으니까.”
“헛!”
김준표 대리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바라보는 표정으로 카이를 쳐다봤다.
눈을 크고 동그랗게 뜬 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예. 이게 현실이라는게 아직 믿겨지지가 않아서 조금만 해봤습니다. 지금 막 나머지도 환전하려던 참이었어요.”
물론 거짓말이다.
하지만 골드 문제로 곧 페가수스와 거래를 해야되는데, 자신이 골드를 전부 환전할 생각이 없다는 걸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그 반응은 빠르게 찾아왔다.
“아, 안 됩니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시간을 좀 내주십시오. 네? 제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두 손을 한데 모은 김준표 대리가 연신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부탁했다.
“이번에도 강민구 사장님입니까?”
“예, 제 얼굴을 봐서라도 부디…….”
“으으으음.”
카이는 최대한 뜸을 들였다.
“생각해 보니까 그리 내키지는 않는데요? 만나봤자 환전하지 말라고 할 텐데.”
“그, 그건…….”
정곡을 찔려 할 말을 잃어버린 김준표 대리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에 상응하는 값은 꼭 치루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딱히 부족한 게 없는데요?”
“…….”
이번에도 김준표 대리는 할 말을 잃었다.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가.
미드 온라인 랭킹 1위이자 최고로 잘 나가는 게이머.
그리고 오늘을 기준으로 수천억 대 자산가가 된 인물이다.
그의 말처럼 부족한 게 있을 턱이 없다.
아니, 설령 있더라도 스스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그래도 최대한 조건을 맞춰드리겠습니다. 일단 가셔서 얘기 나누시죠.”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마음이 조금 약해지긴 하는데…….”
말을 하는 카이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 녀석들, 아주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네.’
가셔서 이야기를 하자는 말은, 자신보고 오라는 소리다.
우물은 목이 마른 사람이 파야하는데 왜 자신이 그 옆에 가서 우물까지 같이 파줘야 할까?
‘하긴, 강민구 사장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야.’
30대 초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당연히 주변에는 아랫사람 밖에 없을테니 상대방을 부르는 것이 습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러면 안 되지. 이번 기회에 그걸 알려줄까.’
카이는 서열 정리를 확실하게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럼 특별히 시간을 내어드리지요. 길게는 못 내드리고, 한 15분 정도?”
“저, 정말이십니까? 그것만으로도 감사하지요!”
15분이면 대략적인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충분했기에 김준표 대리의 안색이 환하게 물들었다.
그는 정중한 자세로 카이에게 텔레포트 스크롤을 건넸다.
하지만 스크롤을 쳐다보는 카이는 턱을 어루만지며 낮게 신음했다.
“음…… 이건 지난번에 그 사무실로 향하는 스크롤입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날씨도 화창하고 좋은데, 밖에서 얘기하시죠. 저기서 기다릴 테니 오라고 전해주십시오.”
카이가 아쿠에리아의 인적이 드문 해변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이에 당황한 김준표 대리는 저도 모르게 카이의 어깨를 잡았다.
“자, 잠시만요!”
“……왜 그러시죠?”
사장님에게 오라가라 할 수는 없다는 말을 뱉으려던 김준표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잠깐, 그럼 카이는?’
현재 아쉬운건 자신들이지 카이가 아니다.
그 단순하고도 간단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는 자신의 실수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해야하는 법.
김준표는 깔끔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은 곧 모셔오겠습니다.”
“천천히 모셔오세요. 15분은 해본 말이었으니까.”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친 김준표 대리는 스크롤을 찢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잘 알아들은 것 같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카이는 해변가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러기를 잠시, 등 뒤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페가수스 사의 한국지사장.
강민구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