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3
힐통령 243화
83장 뜻밖의 인연(1)
행복 보육원.
아버지가 보낸 문자에 쓰여져 있는 장소의 이름이었다.
‘쇠 뿔도 단김에 빼는 편이 낫겠지.’
정우는 문자를 받은 즉시 보육원에 전화해 원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방문 약속을 잡았다.
“후우. 긴장되네.”
보육원이 위치한 장소는 정우의 집에서 택시를 타고 30분은 달려야 나왔다.
‘이런 곳에 보육원이 있었구나.’
흔히 달동네라고 부르는, 언덕과 오르막길이 즐비한 동네.
그곳의 언덕길을 10분이나 올라가야만 행복 보육원의 문을 마주할 수가 있었다.
“음?”
문을 쳐다보던 정우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이 보육원 문, 왜 이렇게 고급이야?’
달동네와는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문.
그뿐만이 아니었다.
문을 지나쳐 내부로 들어서자, 고급스러운 잔디가 깔려 있는 운동장이 시야로 들어왔다.
“으응……?”
무언가 자신의 예상과는 크게 다른 느낌.
그 때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정우를 발견하고는 도도도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허리를 숙이며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아이들.
시간이 이른 오후인만큼, 모두 유치원생 정도로 보이는 어린이들이었다.
‘애들도 엄청 밝고…… 예전에 봉사활동 다녔을 때랑 많이 다른데?’
“아…… 혹시 아까 전에 전화 주신 한정우 후원자님 되십니까?”
누군가의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순진해 보이는 아저씨 하나가 시야로 들어왔다.
“예. 맞습니다.”
“전화상으로 들었을 때도 젊으실 것 같다는 생각은 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젊으시네요. 저는 행복 보육원의 원장인 김현식입니다.”
보통 나이가 어린 후원자들의 경우, 순간의 동정심이나 자소서에 기입할 스펙을 쌓기 위해 단발적으로 후원을 하는 일도 제법 빈번했다.
하지만 김현식은 정우의 앳되어 보이는 외모에도 전혀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쁜 듯한 미소를 만면에 띠었다.
“우선 안쪽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말을 마친 김현식은 무릎을 낮춰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더니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원장님은 잠시 이분이랑 이야기 좀 할 테니까, 여기서 놀고 있어라.”
“네에~”
“알겠어요~”
병아리들처럼 씩씩하게 대답을 한 아이들은 삭막한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다시 놀기 시작했다.
정우를 원장실로 안내한 김현식은 오렌지 주스를 한 잔 건넸다.
“아이들이 원장님을 참 잘 따르는 것 같네요.”
“하하……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저 아이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라고는 세상에 몇 안 되니 당연한 일이지요.”
그 당연한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보육원 원장들도 없지는 않다.
“그런데 보육원이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네요.”
“아, 시설이 너무 좋지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는 김현식의 말처럼, 행복 보육원의 시설은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많은 보육원들을 돌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했던 정우가 보기에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
“사실 저희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 중 한 명이 무슨 게임인가? 그걸로 돈을 벌더니 보육원을 많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게임이요?”
최근 돈이 되는 게임하면 떠오르는 건 미드 온라인 밖에 없다.
“예. 저야 게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후원자님은 아실 수도 있겠네요. 워낙 눈에 띄는 아이인지라…… 그러고 보니 오늘 간만에 들린다고 연락이 왔었으니 올 때가 되었는데.”
김현식이 시계를 쳐다보는 것과 동시에, 원장실의 문이 열렸다.
동시에 김현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반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녀석! 네 얘기하고 있었는데 오는 걸 보면 양반은 못 되겠구나!”
“제 얘기요?”
‘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나른한 목소리는 여자의 것이었다.
헌데, 정우는 알 수 없는 기분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
“이분은 누구예요?”
“아, 오늘 후원을 하고 싶다고 전화가 오셔서 말이다.”
“이제 후원 받지 말라니까요. 지난번처럼 이상한 사람들이면 애들 또 상처 받아요.”
“그, 그래도…… 항상 너에게만 손 벌리는 건 미안하잖냐. 염치도 없고.”
“저 대학 갈 때까지 키워주신 분이 원장님이에요.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단호하게 말을 내뱉은 목소리의 주인은 천천히 걸어와 정우의 맞은편 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
“앗……?!”
정우의 얼굴을 확인한 여인의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마치 석화라도 걸린 것 같은 모습.
그러기를 잠시,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드러내더니, 테이블 위의 신문지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하린아, 후원자님 앞에서 지금 뭐하는 거니?”
그녀의 이해 못 할 행동을 바라보던 김현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두 사람이 초면이 아닌 것을 깨달은 김현식은 갑자기 급한 용무가 생겼다며 방을 나섰다.
그 어색한 상황에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정우였다.
“설마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저도요.”
유하린.
설마 그녀를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 그것도 이렇게 예고도 없이 만나게 될 줄이야.
정우도 내색은 안 했지만 그녀와 마찬가지로 머릿속이 매우 복잡한 상태였다.
‘우리가 딱히 현실에서 대화를 나눌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닌데…….’
김현식 원장의 쓸데없는 배려가 만들어낸 어색한 공기!
그 무거운 압박을 이겨내지 못한 정우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평소에 행복 보육원을 많이 후원하시나 봐요?”
“아, 네. 제가 여기서 자랐거든요.”
“그렇군요.”
다시 어색해지는 공기.
하지만 정우와의 짤막한 대화에서 용기를 얻은 것일까.
슬그머니 덮어쓰고 있던 신문지를 내린 유하린은 신문지 위로 눈만 빼꼼 내밀었다.
“그…… 언노운 님은 어쩌다가 후원을 하실 생각을 하셨나요?”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돕고 싶어서요.”
“……혹시 정우 님도 보육원 출신이신가요?”
“그건 아닙니다.”
정우의 짤막한 대답에 할 말을 잃어버린 유하린은 안절부절못했다.
게임에서는 항상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였지만, 실제로는 생각보다 덜렁이 같았다.
“후원을 하고 싶으시다는 말씀은 감사해요. 하지만 정중하게 사양할게요.”
“음, 알겠습니다.”
정우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빠르게 포기했다.
자신에게 밀려 랭킹 2위가 되었다지만, 그녀는 일반인이 상상하기 힘든 고소득자일 터.
‘그녀가 작정하고 행복 보육원을 돕겠다면 굳이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지.’
생각을 마친 정우는 난처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음. 그럼 이제 후원을 해야할 새로운 곳을 찾아봐야겠네요.”
“……후원이 그렇게 하고 싶으세요?”
“저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잖아요.”
자신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기쁘게 만들 때 느껴지는 뿌듯함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으음…….”
정우의 대답에 무언가를 진지하게 고민한 유하린은 신문지를 곱게 접더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와.’
온전하게 드러난 그녀의 얼굴에 정우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녀의 얼굴을 본 것이 처음은 아니다.
오히려 게임에서는 두 번이나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매력 스탯을 올렸거나, 당연히 커스터마이징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게임의 그래픽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인간 본연이 지닌 생동감은 그녀의 미모를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떠세요?”
우물쭈물.
유하린이 신문지 모서리를 잘게 구기며 입을 열었다.
“저, 저는 매주 화요일마다 보육원에 와서 아이들이랑 놀아줘요.”
“예…….”
“정말로 아이들을 돕고 싶으신 거라면…… 금전적인 도움보다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저와 함께 보육원에 나와서 아이들과 놀아주시면 안 될까요?”
“아이들과요?”
“네. 한창 자라나야 할 아이들인데, 의지할 어른의 수가 너무 부족해요.”
“의지할 어른이라…….”
잠시 고민하던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금전적인 도움만이 후원은 아니겠지요.”
물론 돈으로 후원을 하게 되면 몸과 마음이 편해질지도 모른다.
굳이 시간을 내서 보육원을 방문하지 않아도 되니 그만큼 시간이 절약되는 셈이다.
‘하지만 미드 온라인을 하면서 깨달은 점이 있지.’
선행이란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받는 사람의 마음을 고려하고 이를 배려하면서 베푸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선행이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라면…….’
자신이 그러한 존재가 되어줄 것이다.
정우의 힘찬 끄덕임을 쳐다본 유하린이 활짝 웃었다.
그러자 봄날에 화사한 꽃들이 피어나는 순간처럼, 방 안이 밝아지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정말 감사해요! 아이들도 무척 좋아할 거예요. 다들 밝고 착한 아이들이라서 정우 님도 좋아하시게 될 거예요.”
잔뜩 신이나서 밝게 웃는 유하린을 쳐다보던 정우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제법 무뚝뚝한 이미지인 줄 알았는데, 완전 착각이었잖아.’
이렇게나 밝은 사람에게 그런 실례가 되는 생각을 하다니.
정우는 속으로 깊게 반성했다.
***
매주 화요일, 오후 시간에 보육원을 방문하기로 약속한 정우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그럼 다음 주 목요일에 뵐게요.]
휴대폰에 저장된 유하린의 전화번호.
몇 번을 쳐다봐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영상으로만 볼 수 있던, 동경하던 플레이어였는데 말이지.’
자신과는 그 어떤 티끌만 한 접점도 없을 것 같던 그녀가 자신과 현실에서 만났고.
이렇게 전화번호까지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감상도 잠깐이었다,
정우는 자신의 본업에 충실하기 위해 게임에 접속했다.
“흐음. 영지 컨셉이라.”
카이가 턱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영지의 등급을 올리면 얻게 될 각각의 혜택들.
강민구 사장으로부터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들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커뮤니티에선 영지 등급이 유명무실하고, 올리는데 돈만 많이 든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등급은 올릴 수 있으면 무조건 올리는 게 좋다.’
우선 영지가 A등급이 되어 도시로 승격하면 걷어 들이는 세금의 액수부터 달라진다.
게다가 주민들의 행복도 또한 높아지며, 그것은 새로운 이주민들을 끌어당긴다.
이른바 무한 선 순환 루프.
“흐음. 그럼 다른 영지의 컨셉들은 뭘로 잡아야 할까…….”
잠시 고민을 하던 카이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역시 사제라면 고민이 있을 때 신의 지혜를 빌리는게 정석이겠지. 신출귀몰.”
이제는 제법 익숙한, 몸이 붕 뜨는 기분과 함께 주변 풍경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었다.
그렇게 천상의 정원에 도착한 카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쯧, 그것들 좀 저리 치워라. 나는 달달한 것 안 먹는다니까 그러네.”
“안 먹어도 되느니라. 그냥 나중에 내 대리인이 혹시라도, 혹시 만에 하나라도 묻게 되면, 같이 먹었다고 말만 해주면 그걸로 충분하니라. 이렇게 부탁하겠느니라.”
“하아, 이런 녀석을 신이라고 모시는 인간 놈들이 불쌍하다.”
“헤헤. 이 과자 맛있다.”
테이블 한 가득 과자와 사탕 더미를 올려놓은 채, 혼자서 열심히 먹고 있는 글러먹은 신 하나.
그리고 그녀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근육질의 남성 한 명이었다.
그는 고결해 보이는 백색의 수염과 머리카락은 바닥에 쓸릴 정도로 길고, 부드러워 보이는 것이 특징인 드워프였다.
“음?”
먹을 것에 온통 정신이 팔린 헬릭과는 다르게, 인기척을 느낀 드워프 남성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카이를 발견하는 것과 동시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 이게 누구야? 나의 아이들을 구해준 녀석이잖아?”
“태양교의 사도, 카이가 대지의 신 호른 님께 인사를 올립니다. 그리고…….”
“히, 히끅!”
양 쪽 볼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빵빵하게 과자를 머금고 있던 헬릭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두려움이 한 아름 담겨있는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약속을 어겨, 앞으로 두 번 다시 군것질을 못 하게 된 우리 태양신님께도 인사 올립니다.”
“흐, 흐아아아아아앙!”
헬릭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눈물은 곧장 그녀의 입으로 흘러들어가, 바삭바삭한 과자들을 눅눅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