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250화 (250/441)

# 250

힐통령 250화

85장 베이스커 남작(2)

“말씀하신 대로 남작님께서 영지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자, 아르칸의 주민들은 모두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수성을 할 만한 병력은 전무한 상태고요.”

“흐흐. 예상대로군. 이래서 사람이 머리를 써야 하는 법이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역시 베이스커 남작님은 라시온 왕국의 지보(至寶)이십니다.”

“거, 듣자하니 사람 참!”

부하의 보고를 듣고 있던 베이스커 남작이 뜬금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그의 충실한 오른팔, 바튼은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눈앞의 욕심 많은 남작은 찰나의 기분에 행동 양식이 바뀌는 인간이었으니까.

“피곤하게 사는 것 같군. 어찌 그리 맞는, 바른 말만 하고 살 수 있는가? 허허.”

“아, 아하하하…….”

만족스러운 미소를 만면에 띤 베이스커 남작은 자신의 염소수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서, 신임 영주에 대한 소식은 아직인가?”

“예. 아르칸 영지에 보낸 세작들이 꾸준히 정보를 보내오고는 있지만 영주라고 생각되는 자는 아직…….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오후에 영주의 저택에 방문한 모험가가 하나 있었습니다.”

“모험가?”

베이스커 남작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나? 아르칸 영지의 주인은 모험가라는 걸 까먹은 겐가?”

“아, 아니 그게…… 아마 영주는 아닐 겁니다. 그는 태양교의 신관이었습니다.”

“신관? 확실한가?”

“예. 세작으로 보낸 이들의 실력이 상당합니다. 이쪽 업계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이들이기도 하니 믿으셔도 좋을 겁니다.”

“흐음.”

잠시 고민을 하던 베이스커 남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세력도 없는 신관을 한 영지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힘들다.

생각을 끝낸 남작은 서랍에서 은화 하나를 꺼내 바튼에게 튕겼다.

“수고했네. 오늘 밤은 이걸로 좋은 술이나 한잔하게.”

티잉!

허공에서 은화를 낚아챈 바튼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꼴랑 은화 하나로 생색은…….’

은화 한 닢이면 시원한 맥주를 한 잔 사 마시면 동이 나는 액수다.

돈에 빠삭한 남작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음? 표정이 왜 그러나? 별로 기쁘지 않은 것 같은데?”

뭐 뀐 놈이 성낸다고.

자신이 얼마나 속 좁은 짓을 했는지를 알고 있는 남작은 도리어 화를 냈다.

이 상황에서 바튼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한 가지뿐이었다.

“헤헤. 당연히 기쁩니다. 이 돈으로 어떤 술을 마실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허허. 난 또 오해를 했지 뭔가. 다음부터는 오해하지 않게 표정 관리를 좀 잘하게나.”

“명심하겠습니다, 남작님.”

“늦었으니 나가보게.”

“예. 남작님 좋은 밤 보내십시오.”

고개를 꾸벅 숙인 바튼이 집무실을 나가자, 베이스커 남작이 혀를 찼다.

“쯧쯧, 저놈도 욕심이 많아졌어. 예전엔 동화 하나만 던져줘도 간이고 쓸개고 다 내놓을 것 같더니. 슬슬 갈아치워야 하나…….”

투덜거리던 베이스커 남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갈 준비를 했다.

그때였다.

끼이이익. 위이이잉.

굳게 닫아놓은 창문이 삐걱대면서 열리고, 파리가 날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일반인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남작은 그럴 수 없었다.

‘이, 이 소리는…….’

얼음장처럼 꽁꽁 얼어버린 몸을 천천히 돌린 베이스커 남작이 창가를 눈에 담았다.

위이이잉.

열심히 날갯짓을 하며 빛살처럼 빠르게 움직이던 파리 한 마리는 곧장 사람의 형상을 취했다.

“오, 오셨…….”

“알아보라 했던 건 알아보았느냐.”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카만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다짜고짜 하대했다.

“예, 예. 물론입니다.”

이에 황급히 두 무릎을 바닥에 꿇은 베이스커 남작은 쩔쩔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자신의 영지에서만큼은 황제 저리가라 할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그가, 제 집무실에서 공포에 질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읊어라.”

영주만이 앉을 수 있는 의자에 자연스럽게 앉은 흑의인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일전에 말씀드린 아르칸 영지가 조건에 부합됩니다.”

“모험가들이 차지했다는 그곳 말이냐?”

“예.”

“하지만 지난번에 듣기로는 그곳을 차지한 모험가들의 세력이 강력하다고 들었다. 누누이 말했지만 이 일은 안전이…….”

“걱정하지 마십시오! 본래 아르칸 영지를 차지한 곳은 워리어스라는 모험가 세력이었으나, 지금은 아닙니다.”

“흠?”

새카만 로브를 뒤집어쓴 자가 흥미롭다는 목소리를 뱉어냈다.

“그들은 치열한 경쟁 끝에 아르칸 영지를 차지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걸 쉽게 포기했다고?”

그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누구라도 힘겹게 손에 쥔 보물을 이유 없이 놓지는 않을 테니까.

“자,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영지를 팔았다는 소문이 유력합니다.”

“그래서, 새롭게 들어온 자는 누구지?”

“아직 모릅니다.”

베이스커 남작이 고개를 휙 들어 올리더니, 당당한 목소리로 답했다.

“……모른다? 그런데 뭘 믿고 그리 당당하지?”

검은색 후드 아래에서 살짝 비친 그의 눈동자는 살벌했다.

그의 살기를 정면에서 마주한 베이스커 남작은 고개를 다시 바닥에 처박으며 떠듬거렸다.

“마,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이전의 주인은 진작 떠나갔는데, 아직 새로운 주인이 들어서지 않았기에 정체는 모, 모릅니다.”

“새로운 영주가 아직도 영지에 방문하지 않았다고?”

“예. 여기저기 사람을 풀어 정보를 모아보기는 했습니다만…….”

흑의인이 계속해 보라는 듯 턱을 까딱이자, 남작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새 주인도 모험가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것도 변변한 세력이 없는 자 같았습니다.”

“아아, 무슨 경우인지 알 것 같군.”

흑의인은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이 일을 하다 보면 그런 경우는 제법 자주 보게 된다. 돈이 많은 모험가가 귀족이 된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영지를 구매하는 경우 말이다. 물론 그것도 며칠 안 가 흥미를 잃는 것 같지만 말이지.”

“그렇군요. 하여튼 모험가 놈들이란 정말 제멋대로입니다…….”

“그들의 제멋대로인 성정 덕분에 우리가 이리 재미를 보고 있는 것이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베이스커 남작은 간신배처럼 흑의인의 비위를 열심히 맞췄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오후에 영지에 방문한 모험가가 하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영주는 아닌 것 같지만…… 영주의 저택에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영주의 저택에 모험가가?”

“예. 태양교의 신관이라고 하더군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흑의인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놈은 영주다.”

“예? 하지만 그걸 어떻게……?”

“이유는 모르겠지만 모험가들은 영주의 저택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해.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는 건 놈이 그 저택에 들어갈 자격이 있음을 의미한다.”

흑의인의 분석은 정확했다.

플레이어는 자신이 소유한 영지가 아닌 이상, 영주의 저택에 방문할 때 반드시 ‘허락’을 구해야 했다.

“아아! 그렇다면 그 신관 녀석이 영주라는 뜻이군요?”

“그렇다. 이거 일이 쉽게 풀리려나보군.”

흑의인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베이스커 남작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오늘 밤, 아르칸 영지의 주인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단장님께서 나서주신다면 당연한 일이지요. 하지만…… 상대는 불사의 축복을 지닌 모험가입니다. 죽으면 죽었지 영지를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겁니다.”

“큭, 모험가를 상대로 영지를 빼앗는 법은 의외로 쉽다. 궁금하느냐.”

꿀꺽.

침을 크게 삼킨 베이스커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고 싶습니다.”

“방법은 간단하다. 모험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줄 알면 되는 것이지. 그게 뭔지 알겠나?”

“음…… 아무래도 권력자 아니겠습니까? 모험가들이 아무리 뛰어나봤자 결국 권력자의 손짓 한 번이면 다 떨어져나갈 테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권력보다 더 아끼는 것이 있지.”

흑의인이 기다란 손을 뻗어 무언가를 쥐는 제스처를 취했다.

“바로 목숨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불사의 축복을 받은 그들은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지.”

모든 플레이어는 죽는 것을 꺼려 한다.

접속 페널티와 경험치 하락, 운이 나쁘면 아이템 드랍까지.

고레벨이 될 수록 하나하나가 뼈아프게 다가오는 일들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서 더욱 쉽게 영지를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이다.”

화르르륵.

흑의인의 손끝에서 칠흑의 불꽃이 선명하게 타올랐다.

“놈들을 죽이고, 되살리고, 죽이고 되살리고……. 이 행동을 반복하면 놈들은 기가 질려서 영지를 내어주게 되어있거든.”

“오, 오오! 과연 뮬딘교의 암살단장님답습니다.”

“뭐,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은 아니지만 말이지.”

어깨를 들썩이며 이죽거린 흑의인이 베이스커 남작에게 명령했다.

“네놈은 다음 타깃을 알아보고 있어라. 뮬딘의 뜻이 이 땅에 퍼질 날이 머지않았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뮬딘 교의 성호를 그린 베이스커 남작이 눈을 떴을 때는, 파리의 날갯짓 소리가 빠르게 멀어지는 중이었다.

* * *

“이게 영주 저택이냐.”

그 흔한 침대조차 없는 영주의 침실!

덕분에 카이는 저택의 침실에서 노숙을 해야하는 신박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후우. 내가 사치를 즐기는 인간은 아니지만…….’

세간에서도 자수성가의 대표라고 떠들어대는 자신이라면, 적어도 침대에서 자는 사치 정도는 부릴 수 있지 않을까?

게임에서 침대가 웬 말이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사실 플레이어에게 잠자리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런 돌바닥에서 자면 나중에 재접속했을 때 기분이 영 별로인데.’

십중팔구 목 결림이나 피곤함이라는 디버프까지 생겨날 것이다.

물론 카이에게 있어 디버프란 있으나마나한 것이기는 하지만.

‘후우, 오늘은 뭐 어쩔 수 없나.’

프레스콧이 준비해 준 보자기 몇 개를 바닥에 깐 카이는 그곳에 누우며 생각했다.

‘일단 다른 건 모르겠고, 내일 당장 저택부터 인테리어한다.’

확고한 생각을 하고는 로그아웃을 준비하려던 순간,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놈의 영주 저택. 이제는 창문까지 멋대로 열려?’

찌그러진 캔처럼 인상을 구긴 카이는 열린 창문을 닫기 위해 창가로 향했다.

“음?”

위이이잉.

카이의 시야로, 창문을 향해 빛살처럼 날아오는 파리 한 마리가 보였다.

조금의 과장도 보태지 않고, 파리는 정말 섬전(閃電)과도 같은 속도를 지니고 있었다.

‘뭐야, 엄청 빠르잖아?’

현실이었다면 날아다니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했을 터.

하지만 게임에서의 카이는 태양의 신체로 날카로운 감각을 각성한 상태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평선의 목격자 효과가 발동 중입니다.]

[안력이 큰 폭으로 향상되었습니다.]

신들의 연회 이후, 다양한 신들의 가호가 그를 보필하는 중이었다.

다음 순간, 카이의 손바닥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짜악!

파리다운 최후를 맞이하는 파리.

“미드 온라인에도 파리가 있구나.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린 카이는 삐걱거리는 창문을 굳게 닫았다.

그때였다.

띠링!

[뮬딘 교의 암살단장, ‘카쿤’을 처치하셨습니다.]

[암살단장이 사망하면서 자신을 처치한 이에게 저주를 내립니다.]

[상태이상, ‘암흑의 인장’ 효과에 걸렸습니다.]

“뜬금없이 뭐래? 햇살의 따스함.”

[상태이상, ‘암흑의 인장’ 효과가 사라졌습니다.]

알 수 없는 메시지들에 고개를 갸웃거린 카이는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버그인가.”

어깨를 으쓱거린 카이는 자신을 기다리는 바닥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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