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1
힐통령 251화
85장 베이스커 남작(3)
다음 날, 게임에 접속한 카이는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깨달았다.
띠링!
[차가운 바닥에서 잠들어 상태이상, ‘담‘에 걸리셨습니다.]
[딱딱한 바닥에서 잠들어 상태이상, ‘목 결림‘에 걸리셨습니다.]
[난방이 되지 않는 장소에서 잠이 들어 상태이상, ‘감기‘에 걸리셨습니다.]
“엣취.”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새어 나오는 기침.
힐 스킬 한 번으로 디버프를 깨끗하게 지워낸 카이는 1층으로 내려갔다.
창가에 응당 달려있어야 할 커튼은 모두 떼어갔기 때문인지.
여과없이 들어온 아침 햇빛이 바닥과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영주님.”
“……프레스콧도 일찍 일어났네요.”
“원래 늙을수록 잠이 없어지는 법이지요.”
낡은 식기와 찻잔이 담긴 수레를 밀고 온 프레스콧이 물었다.
“아쉽게도 재료가 없어 식사 준비는 하지 못했습니다. 커피는 있습니다만.”
“진한 걸로 한 잔 주세요. 아직 정신이 좀 멍하네요.”
“알겠습니다.”
능숙한 손 놀림으로 그 자리에서 커피를 내린 프레스콧이 낡은 찻잔에 이를 따랐다.
“찻잔이 변변치 못해 죄송합니다.”
“에이, 이게 프레스콧 잘못인가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중으로 해결할 테니까.”
“예?”
카이는 영문을 모른 채 반문하는 프레스콧을 바라보며 찻잔을 홀짝였다.
“아마 오늘 이 영지에는 많은 변화가 있을 거예요.”
“예에…….”
“그리고 고맙다는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모든 사람이 떠날 때, 마지막까지 남아주셨으니까.”
“별 말씀을. 이곳은 저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멋드러진 미소를 지은 채 잔을 묵묵히 닦아 나가는 프레스콧.
노년의 신사는 오늘도 정갈한 정장을 입고 아침부터 열심히 일을 해나갔다.
잠시 그를 쳐다보던 카이가 불쑥 질문했다.
“프레스콧이 봤을 때 현재 영지에 가장 필요한건 뭔가요?”
“……질문이 잘못되었습니다.”
“예?”
“지금의 아르칸 영지에 무엇이 필요한지보다, 무엇이 있는지를 묻는게 더 빠를 겁니다.”
사람 좋게만 보이던 프레스콧이 돌연 묵직한 팩트를 날렸다.
물론, 이에 타격을 받거나 자존심이 상할 카이가 아니었다.
“그렇군요. 이거 원,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해야 하나.”
조용히 중얼거린 카이는 아르칸의 지도를 불러냈다.
홀로그램으로 표시된 지도는 확실히 휑했다.
‘프레스콧의 말이 맞아. 영지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묻는 것보다, 뭐가 있는지를 묻는 게 훨씬 빠르겠어.’
현재 아르칸 영지에는 변변한 시설이 단 하나도 없었다.
침공 이벤트 때 몬스터의 침공을 받아 한 차례 멸망한 영지.
그 뒤에는 수많은 유저와 NPC들이 모여 땅을 차지하기 위해 공성전을 벌였던 장소다.
당연히 영지의 몰골은 폐허와 다를 바 없었다.
‘아르칸의 상태가 이 정도라면, 하베로스도 비슷하려나.’
상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래서 거추장스러운 직책은 맡고싶지 않았던 건데…….
옅은 한숨을 내쉰 카이는 프레스콧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프레스콧. 집사는 보통 무슨 일은 하는 겁니까?”
소설이나 만화, 영화 등에서 자주 본 적은 있다.
하지만 카이는 집사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직종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집사란 집안일을 돌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요?”
“흠.”
짧은 콧바람을 내쉰 프레스콧은 무언가를 그리는 듯한 깊은 눈빛으로 저택을 빙 둘러봤다.
“가장 기초적인건 가사일입니다. 휘하에 고용인이 있다면 그들의 관리를 하겠으나, 지금의 아르칸 영지처럼…… 아, 죄송합니다. 영지의 재정이 좋지 않아 고용인들을 부릴 수 없는 경우, 직접 청소와 빨래, 식사 준비부터 마당 손질까지 도맡아 할 수 있습니다.”
“와, 집사가 되려면 그걸 다 할 수 있어야 하는 건가요?”
“자랑은 아니지만 저 같은 사람이 흔하지는 않지요.”
어깨를 으쓱거린 프레스콧이 제 콧수염을 살짝 쓰다듬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도련님이나 아가씨의 예절 수업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 전담 선생님이 붙거나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기초적인 공부의 선생 역할을 도맡아 할 수 있습니다.”
“다재다능하시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 같은 사람이 흔하지는 않습니다.”
노년의 신사는 자신의 인생에 굉장한 자부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다재다능한 인력. 거기다가 충성심까지…….’
카이의 사람을 보는 눈은 제법 명확한 편이었다.
그런 그가 볼 때 프레스콧은 이런 저택의 청소나 하고있기에는 상당히 아까운 인재였다.
생각을 정리한 카이가 그의 의중을 살폈다.
“혹시 다른 일 알아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멈칫.
식기를 정리하던 프레스콧의 움직임이 돌연 멈췄다.
그는 잠시 입술을 달짝이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질문했다.
“해고…… 통보입니까?”
“예? 아니예요.”
그의 오해에 손사래를 친 카이가 자세히 설명했다.
“권력자들의 자제들을 위한 아카데미 말씀이십니까?”
카이의 원대한 계획을 들은 프레스콧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아카데미라…… 확실히 이곳의 입지 조건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아르칸 영지는 어느것도 볼 것 없는 시골이다.
달리 말하면 학업에 집중하기 좋은 장소라는 뜻.
“하지만 아카데미를 건설하는 데에는…….”
프레스콧이 잠시 주저했다.
눈앞의 새로운 모험가 영주는 항상 자신감이 넘쳐 보였고, 당당했다.
‘과연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될런지.’
하지만 아카데미를 건설하는 건 단순히 건물 하나를 짓는다고 능사가 아니다.
콧대 높은 귀족가와 대부호, 심지어는 로얄 블러드라 불리는 황가의 핏줄을 이은 자제들.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의 예술적 가치가 있는 건물들이 즐비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학생들이 학교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다양한 편의 시설들이 갖춰져 있어야 했다.
‘그 모든 것에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것은 돈.’
그것도 한, 두 푼하는 돈이 필요한게 아니다.
시설의 규모나 퀄리티에 따라선 차라리 영지 몇 개를 사는게 저렴하게 먹힐 수도 있을 정도.
‘그래도 이 부분만큼은 확실하게 말씀을 드려야된다.’
그것이 카이를 위한 배려라고, 프레스콧은 생각했다.
헛된 꿈이라면 일찍 접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이로운 법이니까.
“프레스콧,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프레스콧의 얼굴 위로 떠오른 갈등을 쳐다보던 카이가 먼저 물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프레스콧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영주님. 계획은 정말 좋습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장애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바로 자금입니다. 아카데미 시설의 건축에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갈 것입니다.”
“아, 그래요?”
그의 고민을 들은 카이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전 또 뭐라고. 별문제 아니네요.”
그는 지갑에 소국의 1년 예산이 넘는 돈을 들고다니는 남자였다.
***
“흐흐흐흥.”
베이스커 남작의 아침 일과는 간단했다.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 뒤 옷을 입는다.
그 뒤에는 개운한 마음으로 식당을 나서서 밥을 먹고, 후식인 커피를 제 집무실에서 마신다.
아침 보고는 늘 그가 커피를 마실 때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어제 보고를 드렸던 모험가 신관이 영주의 저택에서 나와 산책을 하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 특이사항은 아니지만, 어제 관심을 가지시는 것 같아서요.”
“흠. 그런가.”
베이스커 남작은 카이가 멀쩡하다는 보고에도 웃는 낯을 지었다.
‘카쿤 님은 순조롭게 성공하셨나보군.’
그가 웃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뮬딘 교의 제 16암살단의 단장인 카쿤을 절대적으로 신용했기 때문이다.
‘카쿤님의 주특기는 다른 대상으로 변신을 하시는 것이지.’
그야말로 변신의 대가(大家)라고 할 정도로 그의 변신은 놀라운 수준이다.
특히 그 진가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흉내낼 때 더욱 두드러졌다.
‘후후. 파리로 변신했을 때의 카쿤님은 빛과 같은 속도를 얻게 되시지.’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상대에게 접근한 뒤 처치한다.
그 가공스러운 암살법은 그를 빠른 시간 내에 뮬딘 교의 암살단장 중 하나로 만들어주었다.
물론 파리 상태일 때는 빛과 같은 속도를 얻는 대신, 방어력이 마이너스 수준까지 떨어진다는 사실은 베이스커 남작조차 알지 못하는 비밀이었다.
‘그럼 대충 오늘쯤 병력을 몰고 가야겠군.’
카쿤 단장은 시간을 끄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였다.
이미 그와 손발을 맞춘 것도 여러 번.
베이스커 남작은 또 한밤중에 그의 방문을 받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 병력을 몰고가서 영지를 내놓으라고 협박을 하면, 카쿤님이 양도를 해주시겠지.’
“푸흐흐흐.”
그야말로 정교하게 짜여진 사기 행각!
베이스커 남작은 또 하나의 영지를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다.
‘따지고보면 나의 재산은 아니지만 말이지.’
영주는 엄연히 자신이지만, 뮬딘 교는 그런 식으로 획득한 영지를 자신들의 아지트로 삼았다.
베이스커 남작이 그런 식으로 갖다바친 영지만 무려 두 개!
‘아르칸 영지를 넘겨주면 벌써 세 개째로군.’
아쉬움에 입맛을 쩝 다시는 베이스커 남작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뮬딘 교에게 반항을 하는 순간, 지금 쥐고있는 것까지 몽땅 토해낸 뒤 죽음을 당할 테니까.
‘사람은 만족하면서 살 줄 알아야 해.’
오늘도 겸허한 마음으로 커피잔을 비운 남작이 바튼에게 명령했다.
“오전 중으로 병사들을 집결시켜라. 아르칸 영지를 치러간다.”
“예? 이렇게 갑자기 말입니까?”
바튼은 어제까지 조심스럽던 남작의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후후. 준비하라면 준비해라.”
“예에…….”
바튼이 마지못해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게도 눈앞의 남자는, 영지전을 한 번 시작했다하면 패배를 하지 않았으니까.
***
“저게 다 뭡니까?”
“……저도 좀 당황스럽군요.”
다 무너져가는 성벽 위에 서있던 두 사람의 대화였다.
프레스콧은 정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초원을 가르며 다가오는 군대를 쳐다봤다.
그는 군대가 들고있는 깃발을 잠시 쳐다보더니, 짧은 탄성을 토해냈다.
“아! 깃발에 그려진건 베이스커 남작 가문의 문양입니다. 설마 이토록 빨리 올 줄이야.”
“베이스커 남작이라면, 아르칸 영지를 탐낸다는 그?”
“예. 며칠 전부터 말이 돌기는했지만, 근원지가 파악되지 않아 단순한 소문인 줄 알았는데…….”
프레스콧의 얼굴은 그 짧은 시간에 10년 더 늙은 듯 수척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군대를 바라보는 카이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새로운 주인을 모신지 하루 밖에 되지 않았거늘…….’
프레스콧은 카이가 그리 싫지 않았다.
아니,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마음에 드는 편이었다.
젊지만 야망이 커보이는 모험가 영주를 모시는건, 제법 재미있는 나날이 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 꿈은 하루를 채 버티질 못하는구나.’
깊은 한숨을 내쉬는 프레스콧의 어깨를 카이가 토닥였다.
“한숨 쉬지 마세요. 왜 그리 울상이세요?”
“영주님은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무슨 걱정이요?”
“그야…….”
프레스콧은 걱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눈앞의 영주를 바라보며 혼란에 빠졌다.
카이는 자신이 끓여준 차가 맛있다고, 찻잔 채로 들고나와 이를 홀짝이는 중이었다.
곧 있으면 자신의 영지가 적들의 손에 넘어갈 지경인데 이 정도로 태평할 수 있다니.
‘아, 혹시……?’
무언가를 떠올린 프레스콧이 입을 열었다.
“그야 베이스커 남작의 군대가 저리 몰려오고 있잖습니까. 반면에 저희 영지는 그들을 막아낼 그 어떤 병력도 없습니다. 아, 혹시 어젯밤 제가 유일한 병력이라고 말씀드린 걸 염두에 두고 계신다면…… 죄송합니다. 사실 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어서 큰 전력이 되지는 못할 겁니다. 물론 영주님이 싸우신다면 곁은 지켜드리겠지만…….”
횡설수설 말을 내뱉는 프레스콧.
그의 말을 듣던 카이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왜 웃으십니까?”
이런 상황에서 박장대소라니.
프레스콧이 잔뜩 진지한 목소리로 묻자, 카이가 글썽거리는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전 프레스콧에 대해 이것저것 많이 물었는데. 프레스콧은 그러질 않았네요.”
“저는 영지의 주인을 따를 뿐. 그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제가 어디서 뭘하던 사람인지 정도는 알아야하지 않겠어요?”
장난스럽게 웃어보인 카이가 말을 이었다.
“따지고보면 노약자신데, 심장에 무리 안 가게 조심히 지켜보세요. 아, 이것 좀 들어주시고요.”
카이는 자신이 홀짝이던 찻잔을 프레스콧에게 넘겼다.
멍한 표정으로 이를 받아든 프레스콧이 카이를 쳐다봤다.
“그 차가 식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그 말을 남긴 채, 카이는 당당하게 적군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