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
힐통령 257화
86장 검술의 달인(5)
“……잘 들어라.”
철혈 기사단과 수호 기사단이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 거리고있는 왕궁 내부의 연무장.
바체는 그곳의 구석에서 대기 중인 카이에게 은밀히 속삭였다.
“네가 도발을 한 녀석의 이름은 파발. 수호 기사단장이다.”
“아까 들었습니다. 솔직히 조금 의외네요. 하는 짓을 보면 정치질만 잘하는 녀석 같은데.”
“수호 기사단장이라는 자리는 정치질만으로 쟁취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실력은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게 편할거다.”
바체를 흘깃 쳐다본 카이가 물었다.
“바체님보다 쎕니까?”
“당연히 내가 훨씬 더 강하지.”
대답은 머릿속 뉴런을 거치지 않은 채 즉각적으로 튀어나왔다.
카이가 그 당당함에 감탄을 하려는 즈음, 조용한 목소리로 사족이 붙었다.
“물론 결판이 날 때까지 붙어본 적은 없지만…….”
“…….”
먼 산을 바라보는 바체를 짜게 식은 눈으로 쳐다보던 카이가 재차 질문했다.
“그런데 수호 기사단이면 방어에 특화되어있을테니, 의외로 쉽지 않을까요?”
“누가 그러지? 저들이 방어에 특화되어 있다고.”
“네? 그야…….”
카이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 수호 기사단원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손에 잡힌 단단하고 반짝거리는 둥그런 방패는 지팡이처럼 땅을 지탱하는 중이었다.
“방패를 들고있잖아요? 물론 검도 들고있지만요.”
“그대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크나큰 착각을 하고있군. 시간이 없으니 간단하게 설명하지. 알고있겠지만 로열 나이트에는 두 개의 기사단이 존재한다.”
각각 철혈과 수호라는 이름이 붙은 두 개의 기사단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이끌고있는 철혈 기사단은 국왕 폐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허나, 우리는 기본적으로 폐하의 검이다.”
“검이요?”
“그래.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일념으로 폐하의 명을 받아 걸리적거리는 방해물은 모조리 없애버리는 것이 우리 ‘철혈’이 존재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수호 기사단은 국왕 폐하의 방패겠군요.”
“그래. 그들의 파괴력은 절대 부족하지 않다. 유사 시에는 적들의 포위망을 뚫고 폐하를 탈출시키는 것도 그들의 임무이니 방심은 금물이다.”
한 마디로 저들이 지닌 송곳은 철혈에 대해 무디지 않다는 소리다.
그러나 호사가들은 수호 기사단을 방어에 특화된 거북이마냥 묘사한다.
‘철혈 기사단이랑 사이가 좋을 수 없는게 당연하겠구나.’
지닌 실력은 비슷하고 부여받은 역할만 다를 뿐인데, 그들을 대우하는 사람들의 온도 차이가 다르니 열이 받을 수 밖에.
‘물론 그렇다고 나에게 시비를 건 것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지.’
카이는 몸을 풀고있는 파발을 쳐다보며 바체에게 물었다.
“약점은 없습니까?”
“나와 대련 할 때 약점을 찾을 수 있던가?”
“……젠장. 없다는 소리를 굉장히 고급지게 하시네.”
“없지는 않다. 다만, 그대의 실력으로 그 약점을 찾을 수 없을 뿐. 허나 너무 걱정하지마라.”
“걱정이 어떻게 안 됩니까?”
“그야 파발과 대련할 때는 검술만 사용할 필요가 없으니까.”
“……어?”
생각지도 못한 충고에 카이가 눈을 깜빡였다.
‘확실히 그래.’
바체와의 대련에서 일부러 검술만 사용한 것은, 스스로의 의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파발과의 대련은 검술을 배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냥 싸우는거나 다름없지.’
그렇다면 이쪽에서 굳이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다른 기술을 사용하지 않을 필요가 없다는 소리.
카이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게 또 그렇게 되나요?”
“그렇게 된다.”
바체와 카이가 서로를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파발이 소리쳤다.
“거, 준비 한 번 더럽게 오래 걸리는군! 아예 무구를 만들어 올 생각인가?”
“……베오르크 국왕께서는 왜 저렇게 성질 더러운 놈을 수호 기사단장으로 두는 겁니까?”
“성격은 더러워도 국왕 폐하를 향한 녀석의 충성심만큼은 진짜다. 실력도 있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바체가 가볍게 카이의 등을 밀었다.
“가라. 지금부터는 온전히 그대만의 시간이다.”
앞으로 시작될 대련에서 바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부터는 온전히 카이가 헤쳐나가야 하는 길.
그건 누군가가 대신 걸어줄 수 있는 형태의 것이 아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파발은 호기롭게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오는 카이를 환대했다.
“이제야 나오는건가? 굼벵이 같은 놈이군.”
“늦어서 죄송합니다. 평소에 거북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늦으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빠르시네요.”
“뭐? 거북이?”
세상에서 거북이라는 말을 제일 싫어하는 파발의 정수리에서 후끈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파발은 진지하게 신성 폭발을 사용했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진한 스팀을 뿜어냈다.
“내 앞에서 그 단어를 입에 담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는건가?”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죠.”
“어이, 사냥개를 믿고 깝치는 것도 적당히해라. 애송이.”
카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도발을 한 것은 자신인데, 파발은 애꿎은 바체를 사냥개라고 낮잡아 불렀기 때문이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테니, 번견께서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번견(番犬).
언뜻보면 제법 있어보이지만, 뜻을 풀이하면 집이나 문을 지키는 개를 이르는 말이다.
베오르크 국왕을 수호하는 수호 기사단장에게는 딱 어울리는 별명.
“……그래.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해라. 응? 그 잘난 주둥이를 놀릴 수 있을 때 말이야.”
파발의 눈동자에는 살기가 번들거렸다.
‘그래, 차라리 저러는게 나도 편하지.’
이성을 잃은 적만큼 상대하기 쉬운 것은 없으니까.
바체가 까다로운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그는 항상 잔잔한 호수처럼 평정심을 유지한다.
‘전투 실력은 어떤지 몰라도, 도발에는 쉽게 걸려드니 편하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카이가 롱소드를 뽑아내자, 파발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당장 덤벼라. 나에게서 5분을 버티면 시험에 통과했다고 인정해주지.”
“10분을 버티면요?”
“너의 승리라고 인정해주마.”
“그럼 그 전에 당신을 쓰러트리면?”
“하. 네 까짓게 나를?”
파발이 코웃음을 치며 으르렁거렸다.
까앙까앙!
그는 자신의 방패와 검을 교차시키며 두드렸다.
그러고는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선포했다.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말하지! 만약 내 무릎이 바닥에 잠깐이라도 닿는다면, 나 파발은 패배를 인정하며 앞으로 저 모험가 놈을 선생님이라 칭하겠다!”
“호오.”
멀리 서있던 바체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파발도 마주 웃었다.
“정신 나간 놈이군. 지금 네 놈이 웃을 상황이 아닐텐데.”
“글쎄,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법 아니겠나.”
“쓰레기통은 뚜껑을 열기도 전에 그 안에 쓰레기가 들어있다는걸 알 수 있는 법이지.”
“앞이나 봐라.”
“뭐?”
파발은 인상을 찌푸리며 정면을 쳐다봤다.
그의 시야로 들어온 것은 코앞까지 닥친 뾰족한 검신!
“크윽!”
까아아앙!
파발은 황급히 왼팔에 달아놓은 방패를 올려 카이의 기습을 튕겨냈다.
“비겁한! 기사도도 없는 놈이 로열 나이트라니!”
“아, 그래서 안 한다고 한거잖아요.”
귀찮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꾸한 카이는 몸을 뒤로 훌쩍 날렸다.
“나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대륙 끝까지 쫓아가주지.”
살짝 위험한(?) 발언을 뱉어낸 파발이 사나운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입에서 살려달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때까지 두들겨주지.’
물론 살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죽여도 되살아나는 모험가.
이 참에 놈을 죽인다면 바체 놈에게도 확실한 경고가 될 터.
쉬이이익!
파발의 검이 허공을 파고들었다.
바체의 말처럼, 그와 동급의 실력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깔끔한 찌르기였다.
“……뭐?”
하지만 카이는 지난 12일 동안 바체와 대련을 했다.
심지어 그는 대련 말미에 바체에게 ‘독종’이라는 단어까지 끌어낸 인물이다.
스윽.
딱 한 뼘 차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컨트롤하고 있는 카이는 한 뼘 차이로 파발의 공격을 피해낸 것이다.
“뭐, 뭐냐 저 효율적인 움직임은……!”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거겠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단장님의 공격을 딱 한 뼘 차이로 피한다는건 말이 안 된다.”
동요하는 수호 기사단원들.
반면에 철혈 기사단원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캬, 역시 카이야. 기가 막히네.”
“내가 저 녀석 비르 평야에서 눈 까뒤집고 미친놈처럼 싸울 때부터 알아봤지.”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 때부터 다르다고, 피칠갑을 해가면서 뮬딘 교 잔당들을 찾아헤매던 녀석이야.”
함께 전장을 굴러본 이들의 전우애는 남다른 법!
물론 파발은 주변의 그러한 반응을 싸그리 무시했다.
대련을 시작한 이상, 그는 카이에게만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흥. 움직임은 제법 쓸만하군. 몸을 효율적으로 움직일 줄 아는 놈이야. 25점 주지.”
“10점 만점이겠죠?”
“미친놈. 100점 만점이다!”
카이의 질문에 버럭 화를 낸 파발이 다음 공격을 내뻗었다.
이번에 날아간 것은 검이 아닌 방패였다.
‘방패로 공격을?’
화들짝 놀란 카이였으나, 가볍게 발을 굴러 또 한 번 공격 범위를 벗어났다.
이번에도 한 뼘 차이.
“아까의 움직임이 얻어걸린건 아니었던 모양이군.”
파발은 공격이 연이어 빗나갔음에도 히죽 웃었다.
‘웃어? 이 상황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카이가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 바체가 소리쳤다.
“조심해라!”
스거어어억!
파발의 방패에서 튀어나온 원형의 강기가 카이의 머리카락을 자르면서 지나갔다.
만약 바체의 경고가 조금만 더 늦었고, 카이의 반사신경이 볼품 없었다면 치명상을 입었을만한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방패에 강기를 두른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강기라는건 마스터 랭크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고유의 기술이다.
당연히 바체와 동급의 실력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충분히 경계는 했다.
하지만 검이 아닌 방패에서 강기가 솟아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너무 안일했어.’
만약 자신이 바체와 진검 승부를 했다면,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안일하지는 않았을 터.
하지만 아직 늦은 것은 아니다.
카이는 두 눈을 반짝이며 입을 달짝였다.
“블레스, 태양의 갑옷, 태양의 축복, 헤이스트.”
온갖 버프를 때려박은 카이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호오, 나름 비장의 한 수가 있었나? 35점 주지.”
“신성 폭발.”
거기서 한층 더, 폭발적으로 빨라지는 움직임.
하지만 파발은 여전히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카이가 아무리 빨라졌다고 해도, 그에게는 가소롭게 보일 정도였으니까.
실제로 지금 카이가 선보이는 속도건 자신의 부하들도 손쉽게 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신성 폭발이라? 그건 제법 효과가 좋군. 45점.”
“솔라 필드.”
카이를 중심으로 연무장 바닥에 황금빛 물결이 퍼져나갔다.
동시에 파발의 입가에 맺혀있던 미소도 옅어지기 시작했다.
“……60점.”
“성검 소환.”
띠링!
[사도의 성물 세 개를 장착하셨습니다.]
[세트 효과 : 사도의 길이 활성화됩니다.]
[모든 스탯이 100 상승합니다.]
[신성력을 소모하는 모든 스킬의 효과가 30% 증가합니다.]
[모든 스킬의 신성력 소모량이 30% 감소합니다.]
[블레스의 효과가 증가하였습니다.]
[신성 폭발의 효과가 증가하였습니다.]
[헤이스트의 효과가…….]
……
파발의 입가에서는 더 이상 옅은 미소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버린 표정.
“숫자 왜 안세요?”
눈만 부릅뜨고 있는 파발을 쳐다보며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 카이.
달싹이는 그의 입술 사이로 마지막 스킬 명이 흘러나왔다.
“강림 스킬 사용, 수호의 시미즈.”
-어머, 웬일로 기특한 일을 다 하시네요.
살갑게 웃은 전장의 여제가 다시 한 번 카이의 몸에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