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258화 (258/441)

# 258

힐통령 258화

86장 검술의 달인(6)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

평소에는 들리지도 않을 미약한 소리였지만, 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천둥처럼 들릴 지금의 연무장에서는 달랐다.

‘마, 말도 안 돼.’

‘물론 철혈 기사단장이 로열 나이트 입단을 권유했다는 부분에서 어느 정도 실력이 있을 거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 압박감, 피부까지 찌릿찌릿해지는 이 떨림!’

‘단장님과 견주어 부족함이 없는 강자다.’

수호 기사단원들이 불안함을 느낄 때, 파발의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져 갔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뒤에 있는 수호 기사단원들은 모르겠지만, 파발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현재 카이를 상대하고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강하다, 정말 강해.’

카이의 어깨 너머를 슬쩍 쳐다보니 흐뭇하게 웃고 있는 바체 녀석이 보였다.

‘치밀한 놈! 처음부터 이 순간을 위해 함정을 파두었던 것인가……!’

물론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었지만, 파발이 이를 알 리는 없었다.

고오오오.

솔라 필드와 강림 스킬의 효과로 전신에서 황금빛 입자를 뿌려대는 카이.

그에게서는 평소 자신이 괄시하던 모험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비록 신성력과 교단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저렇게 짙은 농도의 신성력이라면 최소 대주교는 되어야 할 터.

파발은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빠르게 깨달았다.

동시에 머리도 빠르게 굴러갔다.

‘득 볼 것이 없는 상황이다.’

이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카이의 실력을 검증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시험관인 자신이 이기는 것이 당연한 ‘룰’이었던 무대.

실제로 파발은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어떤 식으로 카이를 괴롭히고, 최후를 안겨줄지를 고민했을 뿐.

하지만 그 기본적인 명제는 대련이 시작된 지 3분도 지나지 않아 뒤틀렸다.

꿀꺽.

파발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대련이 더 이상 카이라는 모험가를 시험하기 위한 무대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대가 자신을 시험하는 듯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이겨야 본전, 무승부를 기록하면 체면을 크게 구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패배라도 한다면…….’

파발의 안색이 싹 변했다.

누군가가 머릿속에서 빛의 정령이라도 터트린 것마냥 사고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가 택한 것은 ‘회피’였다.

“흠, 흠.”

가볍게 헛기침을 내뱉은 파발이 무기와 방패를 슬그머니 거두었다.

“자네의 기세를 보니 시험을 받을 수준은 아득히 넘어선 것 같군. 100점 만점에 100점을 주겠다. 무의미한 대련은 그만하도록 하지.”

카이를 대하는 말투부터 살짝 공손해졌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철혈 기사단원들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그 수호 기사단장이 저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지금 보니 상당히 귀여운데?’

‘큭큭, 잘 구운 문어처럼 머리 전체가 붉어진 것 봐.’

카이가 느끼는 감정도 그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이대로 대련이 끝나는 것이 탐탁치않다는 것 뿐.

‘자리를 피하시겠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이 대련을 위해 선행 스탯을 20개나 투자했다.

‘그러니 곱게 보내줄 수는 없지.’

카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지요. 전 괜찮으니 계속합시다.”

“크흠. 거 참 고집이 강한 작자로군. 내가 설마 나를 위해 이런 말을 꺼내는 것 같나?”

파발은 주위를 둘러보며 애꿎은 기사들을 걸고 넘어졌다.

“우리 정도의 힘을 지닌 존재가 충돌하면 주변에 끼치는 피해도 막대할 것이네. 이곳은 왕궁. 멋대로 날뛰어도 되는 장소가 아니란 말이다. 기사들이 다칠 것은 물론이고, 왕궁에 큰 손해가 발생할 걸세.”

냉정하게 따지면 파발의 말은 사실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여태까지 바체와 파발의 서열 정리가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아, 그건 걱정 마세요.”

상대가 바체였다면 저 말을 통해 설득시키고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을 터.

하지만 상대는 다름아닌 카이였다.

자신을 건드리지 않았다면 모를까, 한 번 문 먹잇감은 놓쳐본 적이 없는 ‘독종’.

“파발 녀석이 불쌍할 정도로군.”

바체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카이가 입을 열었다.

“절대수호영역 선포.”

우우우우웅.

동시에 거대한 울림과 함께 강대한 신성력이 연무장 주변을 휘몰아쳤다.

신성력은 순식간에 사각 형태의 벽으로 일어나며 일대를 뒤덮었다.

“이, 이건?”

“절대수호영역입니다. 저기 하늘에 계신 사탕과 과자의 신께서 신벌이라도 내리지 않는 이상 깨지지는 않아요. 그러니 안심하시고 대련에 ‘전력으로’ 임하셔도 됩니다.”

“그런 허무맹랑한!”

카이의 말을 믿을 수 없던 파발은 그대로 마나를 끌어올렸다.

까아아아아아앙!

그의 검과 방패에서 일어난 강기는 절대수호영역을 몇 번이고 두드렸다.

하나 신성의 방벽은 깨지기는커녕, 실금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파발의 정수리에서부터 굵은 땀방울이 줄줄 흐르기 시작한 것은.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는 라시온 왕국의 자랑스러운 수호 기사단장이다.

당연히 마나를 이용한 방벽 정도는 그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강기로 수십 번이나 두드려도 금조차 가지 않는 방벽…… 절대수호영역이라니?’

이건 이제 전설로 회자되는 태양교의 초대 교황.

수호의 시미즈가 일으켰다는 방벽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 아닌가.

“아차. 이걸 깜빡할 뻔했네요.”

제 이마를 두어 차례 두드린 카이가 손가락으로 파발을 가리켰다.

“무장해제.”

철컥, 철컥.

기분 좋은 울림.

지난번에 루시퍼가 그랬듯, 파발이 입고 있는 갑옷의 형태는 그대로였다.

하나 지금부터 저 갑옷들은 가죽 갑옷보다 못한 성능을 지니게 될 터.

[수호 기사단장, 파발에게 무장해제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파발의 모든 방어력이 0으로 고정됩니다.]

[사용자의 모든 공격은 파발에게 치명타로 적용됩니다.]

“음……!”

파발은 자신의 몸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단번에 깨달았다.

‘마치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강철 갑옷을 껴입고 있었지만, 실오라기 하나를 걸친 것처럼 무방비한 기분이 느껴졌다.

파발은 난생 처음 느끼는 박탈감과 함께 흔들리는 눈빛으로 카이를 쳐다봤다.

“계속 피하기만 했으니, 이번엔 제가 가겠습니다.”

카이의 무릎이 유연하게 구부러졌다.

하나, 필요 이상으로 구부리지는 않았다.

딱 추진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정도로만 굽혀진 무릎.

그 무릎이 시원하게 펴졌을 때, 카이의 신형은 이미 파발의 코앞에 도착한 상태였다.

‘빠, 빠르다……!’

가공할 속도.

하나 파발은 마스터 랭크의 노련한 기사답게 방패와 검을 휘둘렀다.

“방벽!”

우우우웅!

파발의 몸에서 일어난 강대한 마나가 방패를 감싸 안았다.

동시에 반대쪽에서 휘둘러진 검은 카이의 목덜미를 향해 나아갔다.

하나, 카이는 그것들을 싸그리 무시한 채 자신의 검을 묵묵히 내리그었다.

위에서 아래로 정직하게 그어지는 단 하나의 선.

서걱!

파발이 그토록 자랑하던 ‘방벽’이 카이의 ‘내려베기’에 잘려나갔다.

“마, 말도 안 되는!”

“단장님의 방패가 뚫렸다고?”

“아니, 뚫린 게 아니야.”

“저건…… 저건 대체?”

파발이 내세운 방패와 강기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치 종이로 만들어진 방패처럼 부드럽게 잘려나갈 뿐.

겉보기에만 단단해 보이지, 현재 저것들은 신기루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이건 게임이니까.’

무장 해제 스킬의 효과로 인해 파발의 모든 방어력은 0으로 고정.

심지어 카이의 모든 공격은 치명타로 적용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미즈의 패시브 스킬이 조금 독특한 편이지.’

시미즈의 신념은 아군의 모든 방어력을 200% 증가시키는 반면, 주변 적들의 모든 방어력은 80% 감소시킨다.

즉, 현재 파발의 방어력은…….

“마이너스.”

게다가 시미즈의 무서운 점은 상대방의 방어력이 저하 된다는 부분만이 아니다.

푹!

“흠. 바체에게 공격을 허용해도 이 정도 데미지이려나.”

“무, 무슨…….”

파발이 방패와 동시에 휘두른 검은 카이의 목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하나, 그 공격으로 인해 깎여나간 체력은 고작 4%.

치명타치고는 위력이 굉장히 약한 편이었다.

‘확실히 시미즈의 영혼을 불러내면 안전하게 사냥을 할 수 있겠어.’

방어력 증가 효과가 상상 이상으로 좋다.

그 사실을 깨달은 카이는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날카롭게 빛나며 파발을 물어뜯는 롱소드.

“커억!”

카이의 검은 12일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롭고, 정교했다.

무식하게 심장이나 머리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른팔의 힘줄은 세 개나 끊어놨어. 이제 검을 드는 것도 힘들 테지.’

설령 파발이 기적적인 정신력을 발휘해 검을 휘둘러도, 속도와 공격력은 형편없을 터.

저벅, 저벅.

카이는 무심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저 앞으로 걸어 나가는 단순한 행위.

하나 그것을 마주한 파발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 모습에 카이는 걸음을 멈추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겁 먹으셨군요.”

“마, 말도 안…….”

반사적으로 고개를 흔들며 부정하던 파발이 말끝을 흐렸다.

‘겁을 먹었다고? 내가? 눈앞의 이 새파란 모험가에게?’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솔직해지십시오.”

카이가 자신의 심장을 가리켰다.

“지금 당신은 이곳을 찌르실 수 있습니까?”

“…….”

카이의 심장을 바라보는 파발의 검 끝이 흔들렸다.

그 정도의 고수가 검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했다는건, 정신적으로 크게 동요했다는 뜻이었다.

눈앞에 버젓이 심장을 드러낸 상대가 있었지만,  파발은 감히 검을 찔러 넣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차피 나의 공격은…….’

통하지 않을 테니까.

그것을 알고 있으니까.

반면 상대의 공격은 휘두르는 족족 자신의 방어를 무시하고 치명상을 입힌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그 불리함 앞에서, 파발은 난생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마주했다.

덜덜덜.

사시나무처럼 흔들리는 파발의 몸.

가늘게 뜬 눈으로 그 모습을 쳐다보던 카이가 돌연 손을 휘저었다.

사아악.

그러자 귀신처럼 걷혀지는 솔라 필드와, 절대수호영역.

황금빛으로 물들었던 주변은 어느새 다시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삼은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 어?”

멍한 눈빛으로 의문만 표하는 파발.

카이는 그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사람 함부로 무시하지 마세요. 파발 단장님이 강력하고, 권력자인 것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빌미로 타인을 멋대로 무시하고, 짓밟는 것은 양아치나 하는 짓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힘이란, 더 큰 힘을 만났을 때 부러진다는 것’을.”

“아……?”

‘이 정도까지 했으면 충분하겠지.’

어차피 그를 죽여서 베오르크 국왕에게 밉보일 수도 없는 일.

카이는 그의 기를 죽이는 건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지금 저건…… 나에게 하는 소리인가?’

파발은 뜬금없이 이어진 카이의 충고를 곱씹었다.

그것은 검술을 배우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듣게 되는 정석과도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동요하던 파발에게, 그 말은 제법 색다른 의미로 찾아들었다.

‘힘이란 더 큰 힘 앞에서…… 부러진다…….’

문득 파발의 머릿속으로 자신의 지난날들이 그림처럼 지나갔다.

자랑스러운 기사 가문의 출신인 그는 약자를 보호하는 아버지를 동경했다.

그를 닮아 자신도 멋진 기사가 되고 싶었다.

그는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훈련을 했고, 14살이 되던 해에 기사 서임을 받을 수 있었다.

승승장구를 하던 그가 변한 것은, 23살 때였다.

‘아버지! 대체 왜 아버지가 단장이 되지 못한 거죠? 심지어 매의 기사단장으로 발령이라니…… 이건 좌천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파발의 아버지는 왕궁 기사단장 직을 놓고 경쟁 중이었다.

경쟁자보다 검술 실력이 훨씬 뛰어났기에, 파발은 자신의 아버지가 단장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하나, 결과적으로 그의 아버지는 시골의 기사단으로, 경쟁자는 왕궁 기사단장 직에 올랐다.

그는 아직까지도 그 장면을 잊지 못한다.

허허 웃으며 수도의 귀족들과 악수를 나누는 경쟁자의 모습을.

‘기사는 검만 잘 휘두르고, 충성심만 깊으면 된다고. 저에게 그렇게 가르쳐주신 분이 바로 아버지잖습니까?’

‘맞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맞긴 대체 뭐가 맞아요? 지금 아버지 모습을 보십시오! 버림받은 강아지와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파발.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이 옳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후회는 없어.’

‘……아뇨, 이 세상은 결과가 전부입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져요. 결국 아버지는 틀리신 거예요.’

그날부터 파발은 달라졌다.

검술을 연마하는 시간을 줄이고, 사교계에 꾸준히 나가며 인맥을 쌓아나갔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8살.

그는 왕궁 기사단장의 스캔들을 터트리며 추문에 휩싸이게 만든 뒤, 자신이 직접 왕궁 기사단장 직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 때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셨지.’

그 날 이후 아버지는 파발과 단 한 번도 만나주지 않으셨다.

파발도 굳이 아버지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의 복수를 해준 셈인데, 고맙다는 칭찬 한 번 해주지 않는 그가 미웠으니까.

그로부터 3년 후, 로열 나이트의 수호 기사단장이라는 영광스런 자리까지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 흔한 축하 편지 한 장 보내지 않으셨다.

“…….”

파발이 두꺼운 눈꺼풀을 감았다.

그 사이로는 지난날의 자신을 반성하는, 뜨거운 회한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만간, 아버지를 한 번 뵈러 시골에 내려가 봐야겠군.’

결과적으로 그 분께서 옳았음을, 새파랗게 어린 모험가를 통해 깨닫게 될 줄이야.

잠시 후 눈을 뜬 파발의 눈은 전에 없이 맑아 보였다.

“카이여.”

“……?”

카이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파발을 쳐다볼 때, 파발이 돌발 행동을 했다.

“다, 단장님!”

“맙소사!”

털썩.

파발이 차디찬 연무장 바닥에 낮게 자리한 것이다.

“나의 무릎은 오직 국왕 폐하에게만 바칠 수 있기에 이 정도로 예를 갖추는 것을 용서하게나.”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카이에게 진심어린 감사의 말을 건넸다.

“세 사람이서 길을 걷다보면 그 중 한 사람에게는 배울 점이 있다고 하더군. 나이는 어리지만, 오늘 자네에게 배운 수업 내용은 평생토록 가슴에 간직하겠네. 썩어있던 나의 정신을 일깨워주어 고맙네. 나의 선생이여.”

“무, 무슨…… 갑자기 왜 이래요?”

한껏 당황하는 카이의 눈앞으로, 예상치 못한 메시지 창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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