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260화 (260/441)

# 260

힐통령 260화

87장 기묘한 파티(2)

“미치겠네, 진짜.”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어내던 한정우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설마 타락의 성지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입장 제한이 걸려 있을 줄이야.’

다양한 방법으로 돌파를 시도해봤지만, 그건 시스템상 락(Lock)이 걸려 있는 경우였다.

결국 정우는 두손두발을 모두 들며 항복을 선언했고, 접속을 종료한 채 샤워를 마쳤다.

“혼자 클리어할 능력은 충분히 될 것 같은데.”

여태까지 다양한 던전에 다녀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던전에는 입장 제한이 있다.

던전의 난이도에 비해 더 많은 플레이어가 들어와 쉽게 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반대.

‘최대 인원 제한’이 아닌, ‘최소 인원 충족’이 던전에 입장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강민구 사장도 이번 경우는 게임 개발 단계에서부터의 기획 의도였으니 어쩔 수 없다고 했고…….’

이미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모두 동원해봤다.

하지만 강민구 사장도 불가능하다는 말만을 거듭 입에 담았다.

‘그럼 결국 나 빼고 네 명이나 더 필요하다는 소리인데.’

누구를 불러야하나.

그렇다고 던전에 들어가는데 생면부지의 사람을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

정우는 이때만큼은 자신의 얄팍한 인간관계에 머리를 쥐어뜯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링링링-!

그의 휴대 전화기가 뜬금없이 울리기 시작한 것은.

“음?”

심지어 전화기 위에 떠오른 이름조차 뜬금없었다.

[김인하 PD]

‘김인하 PD가 왜?’

그는 비르 평야 전투를 영상으로 제작하는 프로젝트의 총괄 PD였다.

‘그 영상으로 내가 떼돈을 벌기는 했지.’

아직까지도 블루레이나 인터넷 방영분 판매 수익은 끝도 없이 통장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게다가 NET미디어의 장사 수완은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안방극장만이 아닌 실제 영화관 스크린에도 비르 평야 전투를 내걸었으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그 또한 대박.

‘돈 벌게 해줬으니 고맙긴 고마운 사람인데…….’

그건 거래의 결과였을 뿐.

일방적으로 고마움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실제로 정우는 김인하 PD와 다시 연락을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었다.

“여보세요?”

[아! 정우님, 잘 지내셨어요? 절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번호 저장되어 있습니다. 김인하 PD님 맞으시죠?”

[아하하. 맞습니다. 다행히 번호가 남아 있군요. 오늘은 다름이 아니라 다음 영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연락 드렸습니다.]

“다음 영상이라뇨?”

정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NET미디어와의 거래는 비르 평야 전투, 그것 하나가 전부였다.

실제로 계약서에도 그렇게 적혀있는 상태고.

때문에 이런 식의 전화는 그의 입장에서 달갑지 않았다.

[아, 아! 혹시라도 부담을 느끼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우님도 아시다시피, 비르 평야 전투 영상이 정말 대흥행했습니다.]

“그건 그렇죠.”

그건 당장 인터넷에서 가장 큰 검색 사이트에만 들어가 봐도 알 수 있다.

ㅂ만 쳐도 비르 평야 전투라는 자동완성검색어가 표시될 정도니까.

굳이 그게 아니라도 통장으로 꽂히는 액수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만약 여기서 정우님이 정말 소소한 일상이라도 내주신다면 제가 한 번 더 터트릴 자신이 있습니다. 아! 혹시나 생각이 있으신가 싶어서 개인 차원으로 여쭤보는 거예요. 상부에서 압박이 없지는 않은데, 제가 정우님과의 관계는 저번이 끝이라고 못을 박아뒀거든요.]

깔끔한 관계의 정립과 일목요연한 설명, 마지막으로 자기 PR까지.

정우는 이토록 유능한 사람을 그리 싫어하는 편이 아니었다.

“흐음. 사실 제가 이번에 던전에 들어갈 계획이 있긴 합니다만.”

[오오오, 던전 좋지요! 어떤 던전인가요? 정우님의 레벨을 고려해보면…… 이번에 새롭게 업데이트된 가르단 도적 소굴이나, 렘파의 숲, 아니면 혹시 심해용의 둥지인가요?!]

“아니요. 공개 던전이 아닙니다.”

정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김인하 PD가 나열한 던전들은 최근 페가수스 사에서 새롭게 업데이트한 던전들.

아직 미공략된 상태인지라 자신이 도전한다면 확실히 이목이 집중될 것이다.

‘하지만 굳이?’

정우가 저곳들을 공략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약간의 레벨뿐이다.

물론 대다수는 덤으로 따라올 명성과 돈에 목숨을 걸겠지만, 정우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일찍이 세상에 공개된 적이 없던 던전입니다. 지금 파티원들을 모으는 중이예요.”

[아, 항상 솔플을 하시기에 던전도 혼자 도실 줄 알았습니다.]

“여태까지는 그랬죠. 그런데 이번 던전은 입장 제한이 걸려 있어서 혼자는 못 들어갑니다.”

[그런 던전도 있나요? 신기하군요. 하지만 정우님이 파티 플레이를 하는 모습도 분명 인기가 있을 겁니다. 게다가…… 흐흐.]

김인하 PD가 돌연 변태처럼 웃음을 흘렸다.

“뭡니까? 그 웃음은.”

[아, 죄송합니다. 그리고 조금 뜬금없는 질문일수도 있는데, 혹시 TV프로그램 자주 보십니까?]

“아뇨. 시간이 없어서요.”

수많은 사람들이 랭커들을 부러워하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다.

부귀영화를 누릴지는 몰라도 마음 편히 영화관을 가거나 느긋하게 목욕탕을 갈 수도 없다.

해외여행을 가는 것은 그야말로 꿈에나 그리는 일.

랭커들의 시간은 금이기 때문이다.

물론 호사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게임만 하면서 그렇게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버는데 배부른 소리하네.’

하지만 자신이 가기 싫어서 가지않는 것과, 가고 싶어도 상황이 안 되서 못 가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물론 나 같은 경우는 스케줄이 그렇게 타이트하지는 않지만.’

다른 랭커들은 랭킹이 떨어질까 봐 고군분투하며 하루 종일 게임에 몰두한다.

반면 카이의 랭킹은 압도적인 1위.

2위인 유하린과도 레벨이 무려 50개 가까이 차이나는 상황이었다.

스스로 원한다면 해외여행을 갈 수도 있는 유일한 랭커라는 소리.

그것은 다른 랭커들이 유독 언노운을 부러워하는 웃지 못할 이유였다.

[미드 온라인이 대히트를 치고 나서, 요즘 TV예능의 판도가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요?”

[음, 제작비가 크게 안 드는 미드 온라인에서 예능을 찍는 식이지요. 최근 히트하는 예능들을 보면 모두 미드 온라인 내부에서 제작되는 것들입니다.]

“몰랐네요.”

[하하. 공사가 다망하신 분이니 그러실 수도 있지요. 이해합니다. 랭커들이 가면을 쓰고 나와 1대 1 결투를 하는 ‘복면 랭커’부터 시작해서, 기르는 펫들과 함께 뛰어노는 힐링 예능인 ‘펫과 함께’, 그리고 혼자서 카메라맨 한 명만을 데리고 던전을 클리어하는 여정을 담은 ‘나 혼자 한다’까지.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유행 중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굳이 그런 것들을 알려주시는 이유가 뭔가요?”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인건 맞았지만, 정우가 그리 궁금해하지는 않았던 부분이었다.

[크흠, 그게…… 혹시 아실까 싶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사실 제가 예능국 출신입니다.]

“PD님께서요?”

정우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르 평야 전투의 영상미는 절정이라고 칭할 정도로 잘 나왔으니까.

‘당연히 판타지 드라마 쪽 PD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그가 예능국 출신이라니.

그쯤 되자 정우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혹시 이번 제 던전 공략을 예능으로 찍고 싶은 건가요?”

[허락해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서 찍겠습니다.]

“하지만 전 말주변이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만.”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자막과 음악, 상황을 절묘하게 이어 붙여서 반드시 재미있게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게다가 무려 언노운의 던전 공략 영상입니다. 아무리 예능 타이틀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해도, 엄청난 물건이 나오겠지요.]

김인하 PD는 엄청난 자신감을 선보였다.

[혹시 생각해두신 파티원이 없으시다면, 저희 방송국 쪽에서 연예인들과 다리를 놔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원하시는 랭커라도…….]

“음. 아니에요. 던전에 데리고 갈 사람은 제가 직접 고르고 싶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아이고, 아닙니다. 저야말로 감사하지요. 그…… 저기 그래서 계약서는……?]

“우편으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우는 뛸 듯이 기뻐하는 김인하 PD와의 전화를 끊으며 피식 웃었다.

“던전에서 예능이라? 듣고 보니 궁금하긴 하네.”

오랜만에 먼지가 내려앉은 TV를 켜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왜냐하면 오늘은 화요일.

행복 보육원에 봉사 활동을 가는 날이었으니까.

***

“아! 어서 오세요.”

보육원을 방문하니 운동복 차림의 유하린은 이미 아이들과 함께 빨래를 하는 중이었다.

거대한 갈색 통을 운동장에 둔 채, 빨래를 지근지근 밟고 있는 아이들.

한 번 밟을 때마다 새하얀 거품이 방울방울 흩날렸고, 아이들은 그 때마다 웃었다.

“애들아, 봉사하러 오신 분인데 깍듯하게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진짜 오셨네요?”

“고맙습니다아!”

“그래, 애들아 안녕. 그런데…….”

정우가 묘한 시선으로 빨래통을 쳐다봤다.

다른 보육원이라면 모를까, 행복 보육원에서는 굳이 이런 식으로 빨래를 할 필요가 없다.

유하린의 투자로 좋은 시설을 갖게 된 행복 보육원에는 당연히 고급 세탁기도 많이 있었으니까.

“아…… 이게요.”

정우의 시선을 알아챈 것일까?

유하린이 새삼스럽게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우물쭈물거렸다.

“예전에 제가 게임을 시작하기전…… 형편이 많이 안 좋았을 때, 자주 이렇게 빨래를 했거든요. 애들이 아직까지도 이게 그립다고…… 빠, 빨래를…….”

화악.

잘 익은 홍시처럼 붉어지는 유하린의 새하얀 얼굴.

그 장면을 쳐다본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웃었다.

“어? 하린이 누나 얼굴 빨개졌다!”

“진짜? 와! 진짜다!”

“얼레리 꼴레리이~”

“너, 너희들!”

유하린이 앙증맞은 주먹을 확 치켜들며 소리치자, 아이들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도망가 버렸다.

“신발도 안 신고! 바로 샤워실로 가서 씻어!”

그들의 뒤통수에 대고 잔소리를 하는 유하린.

정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정말이지,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유하린 같지 않다니까.’

세간에 널리 알려진 유하린은 그야말로 시크의 대명사와도 같았다.

차갑고, 묵묵하며, 비정하다.

하지만 정우의 눈으로 바라본 유하린은 그저 나이대의 순수한 여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질문했다.

“하린 씨, 정말로 막 사람들이 말 걸면 노려보고, 겁주고 그랬어요?”

“제, 제가 그랬어요?!”

유하린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아, 아니에요! 그냥…… 그냥 제가 어려서부터 따돌림을 많이 당해서…… 낯을 좀 심하게 가리는 것 뿐이에요.”

“따돌림을 당했다고요? 하린 씨가요?”

정우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학창 시절 남자들이 줄을 섰을 것 같은 미모의 소유자가 바로 그녀 아닌가.

“으윽, 그게…… 제,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기는 조금…… 그, 그렇지만…….”

“예쁘셔서요?”

“으아아아아!”

유하린이 두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녀의 얼굴은 손바닥에 가려질 만큼 작았다.

잠시 후, 마음을 추스른 유하린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냥 좀 그랬어요. 저라는 사람과 진심으로 친해지고 싶어서 다가오는 애들은 한 명도 없었거든요. 남자 애들은 다들 저랑 사귀고 싶어 했고, 여자애들도 저를 통해 좋아하는 남자와 연락을 하고 싶어 했어요. 때로는 제가 자기 남자친구를 유혹했다고 소문을 퍼트리기도 했구요. 모든 게 얼굴 때문이었죠.”

“인간 불신이군요.”

“……네, 조금.”

유하린의 씁쓸한 표정을 쳐다보던 정우는 그녀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겪는 감정은 한 때 자신도 겪어봤던 감정 아니던가.

‘나도 미드 온라인을 하면서 최근에야 많이 나아진 편이지.’

문득 자신과 그녀가 비슷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녀는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아직도 걷고 있다는 것 뿐.

‘그래서 얼굴 공개하는 걸 그렇게 꺼렸구나.’

그녀가 게임 속에서 단 한 번도 얼굴을 공개하지 않은 이유가 납득되는 순간이었다.

‘어라? 잠깐만.’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정우가 질문했다.

“그런데 저는요? 저한테는 막 얼굴도 보여주시고, 트리플 헤드 오우거 가죽도 주셨잖아요?”

“그, 그건…….”

유하린이 고개를 휙 돌리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순수하고 맑은 눈빛은 처음 봐서요.”

“뭐라고 하셨어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소리를 지른 유하린은 뭐가 그리 급한지 빨래를 빠르게 밟기 시작했다.

과연 랭킹 2위 유저의 발길질은 뭐가 달라도 다른 법!

더러웠던 빨래들은 빠르게 깨끗해지기 시작했다.

“저도 좀 도울게요. 많이 해봐서 도움이 될 거예요.”

수돗가에서 발을 씻은 정우까지 나서서 도와주자, 빨래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그 와중에 정우와 유하린은 제법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역시, 나랑 비슷한 구석이 많아.’

정우는 그런 그녀가 안타까웠다.

동시에 자신이 그녀의 진실된 모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세상 사람들이 그녀가 차갑고 매정하다는 오해를 안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그러겠는가.

‘후우. 그녀라는 사람을 세상 사람들한테 보여줄 수도 없…… 어? 잠깐만.’

그때.

옅은 한숨을 내쉬던 정우의 뇌리로 번뜩이는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곧장 눈을 반짝인 정우가 유하린을 쳐다봤다.

“하린 씨, 혹시 내일 모레 시간 있어요?”

‘데, 데이트 신처어엉?!’

안 그래도 붉게 물들었던 유하린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녀는 그날 약속이 없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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